유럽, 그리고 백일

그 애

by 스위트피

20대 초 나는, 가진 것이 없어도 다 가졌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무엇하나 손에 쥐고 있지 않음에도 어깨와 가슴은 늘 위로위로 향해있던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 상태를 가능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시 나는 밤낮으로 일했다. 가진 게 많은 친구들의 경험을 사기 위해.

휴학계를 내고 본격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정말이지 몸을 갈아가며 일하던 시절이었다.(당연히 합법적이고 떳떳한 아르바이트였다)

새벽에 퇴근하는 나날들이 이어졌고 사람의 발톱이 빠질 수도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온갖 무례한 인간들을 만났고 퇴근길에 발에 치이던 쓰레기와, 그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발톱이 빠지고, 그렇게 노력해도 안 빠지던 살이 빠지고, 입술과 손엔 포진과 물집을 달고 살았지만 나는 그 시절이 좋았다. 뒤돌아보면 모든 게 빠지고 있음에도 모든 게 채워진 채 가장 빛났던 순간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가진 것 없지만 내손으로 돈을 벌어 더 큰 세계로, 더 큰 세상으로 떠난다는 무언가에 도취되어 있었고, 그 감정은 나를 멋진 사람이자 뭔가 있어 보이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사실 끝내 경비를 다 모으지 못해 큰언니와 엄마에게 일부를 빌려 메꾸었지만 말이다.

(물론 큰언니에게는 다 갚았다. 엄마는,,, 협찬이라고 해두자)


그때 난, 첫 남자친구를 사귀고 막 오십일이 지날 무렵 유럽으로 떠났다.


그 애는 한나절이 넘는 시간을 늘 뛰어넘었다.

매일 왕복 여섯 시간을 통학하던 그 애는 내 연락이라면 자다가도, 수업 중에도, 버스 안에서도 답했다.

우리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줄곧 함께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잘 자라고 마무리하고, 잘 때쯤이면 굿모닝을 인사하는 사이.

향수병이 심해질 무렵 여행은 허무하게 끝이 났고 나는 패잔병처럼 어깨와 가슴을, 손과 다리를 바닥과 땅으로 질질 끌며 한국에 도착했다.


당시엔 커플들에게 백일을 챙기는 게 유행이었는데,

내가 막 나와의 전투를 끝내고 패배를 인정하고 돌아온 순간이 그 애와 나의 백일 무렵이었다.

우리는 남들 하는 것처럼 백일을 챙기고, 기념비적인 기록을 남기고, 그 애가 준비한 커플티셔츠도 입었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백일 중 오십일 가량을 떨어져 있었는데 이것을 기념해도 되는 걸까?

우리는 백일을 함께한 것일까?


그 애는 여러 방면으로 늘 나와 함께했다.


그렇게 백일이 지나고, 그 애는 내 앞에서 사라졌다.

어떠한 사정이 있든 간에 그 애는 사라졌고 나는 그제야 내가 아닌 타인에게 너무 많은 의지를 했음을 깨닫는다.

어떤 날엔 울다가, 어떤 날엔 웃다가, 어떤 날엔 다짐을 하고, 또 어떤 날엔 질이 안 좋은 친구들과 어울렸다.

처음 보는 남자애들과 술을 마셔보기도 하고, 옆 테이블에 앉은 지들만 오빠라고 우기는 아저씨 같은 인간들에게 술을 권유받기도 했다.(걱정 마시라 안 마셨다.)

걱정할만할 일은 일말도 없었지만, 그때 더 많이 나아가지 못했던 것을 조금은 후회한다.

한 번쯤은 방탕하게 살아볼걸 하는 후회는 아직도 여전하다.(농담이다. 아니 농담 반 진담 반이다..)


그리고 닿지 않는 메신저에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너는 알잖아, 우리는 알잖아.

너는 나를 잘 알잖아, 끝을 말할 나는 얼마나 차가울지 알잖아.

나에게 두 번은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잖아.

네가 모를 리 없어,

우리가 나눴던 시간의 가치를, 매일같이 나눈 아릴 만큼 달았던 대화들을.

나는 운동을 다시 시작했고, 운전을 배워.

어제는 친구들과 나들이를 갔어. 날씨가 너무 좋더라.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줘서 고마워, 덕분에 행복했어.

하는 일 모두 잘되길 바랄게. 잘 지내, 안녕.


개뿔, 돌이켜보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첫 이별을 하고 나는 나답지 않아 졌다.

연애라는 게 이런 거라고?

나 자신을 잃고, 타인에게 내 모든 걸 공개하고, 그 타인에게 나 자신을 모두 맡겨서 결국 나는 사라지는 게 사랑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두 번 다신 연애 따위 하지 않겠다. 사랑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미친 듯이 산을 탔다.

그 무렵 내가 쓴 글엔 그런 문구가 있었다.

뇌가 당으로 가득 차서 너무 달다. 제구실을 할 수 없어 글이 나오지 않는다.라는 문구.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등짝을 거나하게 때렸을 것이다. 여자망신 그만시켜라!!!


뭐 어쨌든,

그 애는 나의 아우라(?) 같은 것들이 좋다고 했다.

너에겐 특별한 분위기 같은 게 있어, 남들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그런 분위기 말이야.

라고 자주 말했다.

그래서 늘 나를 동경해 왔다고 했다. 감히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고 있다니 너무 행복하다고.


그렇게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던 상대도 나의 진가를 깨닫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사실 그 아우라는 우울이라는 것이란다, 분위기라는 것은 침울이라는 것이고. 남들은 잘도 알아서 피하던데 너는 용케 다가와서 왜 도망을 가니.


도망치듯이 끝내버린 처음. 나는 아주 가끔 그 애 생각을 하곤 한다.

꿈이 많던 너는 모든 것을 이뤘을까? 계획했던 일들을 진행했을까? 걱정했던 것들은 해결되었을까? 너는 지금 행복할까?


아니, 사실은 그 애를 만나던 나를 생각한다.

가진 것 없어도 모든 걸 가지고 있던 나를 말이다.

꿈이 많던 나는 모든 것을 이뤘을까? 내가 계획했던 일들은 뭐였을까? 내 걱정은 왜 아직도 머무를까? 나는 지금 행복할까?


그때로부터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모든 게 바뀌었지만 바뀌지 않은 것은 오늘도, 그때도 커피를 마시며 글을 썼다는 것이다. 고작 그것뿐이다.


내가 추억하던 모든 것은 결국 그 애가 아니다.

그 애가 아닌 , 그 애가 사랑하던 나.

그 시절의 나와, 어깨와 가슴이 늘 하늘로 향해있던 나, 그리고 조금은 차갑고 친절하지 않았던 나. 나만의 신념과 가치관으로 안이 가득 차서 심지가 단단했던 나.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동경할까?


오늘도 커피는 쓰고 탄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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