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추억과 ENTP의 관점에서 바라본 수박예찬론
1. 수박을 좋아하는 이유
여름을 좋아한다. 유태오를 가진 그녀는 ‘땀이 나면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 한 여름을 좋아한다고 했다. 비슷한 이유로 여름을 좋아한다. 뻘뻘 나는 땀 한 방울이 씻겨갈 때의 시원한 바람이 좋아서, 매미들의 노랫소리로 살포시 걸어가는 밤 산책이 낭만적이라, 여름이란 명목 하에 아끼고 아껴 둔 마음 다해 이 ‘과일’을 취할 수 있어서. 여름이면 떠오르는 과일. ‘물 수에 빛날 박’이었던가. (물 수에 빛날 빈은 내 본명 뜻이다)
새빨갛고 새초롬한 수박을 좋아한다.
수박을 가장 즐겼던 건 2018년도 여름이었다.
당시 나는 24년 인생에서 가장 큰 침체기를 맞고 있었다. 흔히 ‘노잼 시기’ 라고 불릴 정도로 이유 모를 무력감에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주변 사람들 모두가 놀랄 정도였다. 학업, 대외활동, 동아리, 봉사활동까지 ‘대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라는 생각으로 매 학기를 ‘열정 만수르’로 보냈던 나는 어느새 사그라지는 불꽃 마냥 에너지가 소진되어갔다.
스스로 가장 외로웠던 시기에 역설적이게도, 내 곁에 친구들이 항상 있던 때였다.
기숙사에 틀어박혀 침대에만 누워있던 무료한 저녁, 친구들은 나를 학교 옆 공원으로 불러냈다. 인공 폭포에서 돗자리도 없어 학교 신문지를 깔고 앉고, 밤에는 벌레도 많아 모기밥(?)이 되기 일쑤였지만 오손도손 모여 앉아 땀으로 촉촉한 발을 포개고 수박 한 통을 서걱, 잘라냈다.
자취 집에서 숟가락을 챙겨 온 친구 덕에 숟가락 3개와 근처 마트에서 산 사이다 한 병과 수박 한 통. 그것 만으로 멋진 일탈이 되었다. 칠흑 같은 밤과 비슷한 색깔의 수박 껍질을 잘라내면, 가로등 불빛보다도 환한 바알간 속이 드러났다. 대충 아무렇 게나 몇 숟가락 파먹은 후, 준비해온 사이다를 아낌없이 부어주면 흐르는 인공 폭포 마냥 콸콸 시원하게 흐르는 수박 즙에 연신 셔터를 눌러 대며 까르르 즐거워하는 우리였다.
가을에 데굴데굴 굴러가는 낙엽만 보아도 즐거운 여고생처럼 한여름 섬벅섬벅 베어 무는 수박만 먹어도 행복한 청춘이었다.
그냥 그렇게 함께해주었다.
구태여 기운 없는 이유를 묻지 않고, 무력감을 애써 피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지나가는 여름의 한 계절처럼 그 시간을 함께해주었다.
달큰한 향에 촉촉한 과육을 한껏 머금고 나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곤 했다.매미 울음에 파묻힌 귀뚜라미 소리가 그제서야 조금씩 들리고,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에 달빛을 가리는 나뭇잎도 보이기 시작했으며
저마다의 고민들로 이 순간을 함께 보내는 온기도 느껴졌다.
2. ENTP (엔팁)과 수박의 상관관계
한창 작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MBTI. 트렌드에 뒤처질 수 없는 마케터라 <MBTI를 활용한 이벤트 사례>, <MBTI가 유행하는 이유>를 분석했지만 MBTI의 진정한 매력에 빠져든 건 올해부터다.
항상 MBTI 검사를 하면, ENFP와 ENTP가 번갈아 나왔는데, 올해부터는 줄곧 ENTP으로 나왔다.
ENTP (이하 엔팁)과 수박의 장점 3가지를 꼽아봤다.
1) 겉과 속이 다른 매력을 지녔다.
‘이성적이나 몽상가’, ‘내향적인 외향인’, ‘높은 IQ에 그렇지 못한 정신연령’. 엔팁으로서 가장 공감가는 특징이다. 한평생 극과 극의 기질을 중간으로 맞추는 밸런서의 숙명을 타고났다. 하지만 이런 양면성 덕분에,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이해하기 쉽고 다양한 세상의 모습에 호기심이 많다. 수박 역시 마찬가지다. 여름을 대표하는 과일이지만, 겉의 초록색과 속의 빨간색을 보고 있으면 ‘한여름에 크리스마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수박 한 통을 해체할 때 들어가는 칼의 깊이와 달리, 한 입 꿀꺽 삼키면 솜사탕처럼 금방 사라지는 순간은 ‘사막 속의 신기루’와도 같다. 그 반전 매력 덕분에 질리지 않고 오래 함께 하고 싶다.
2) 주도적이고 적극적이다.
엔팁은 새로운 일을 시도할 때 망설임이 없다. 하고 싶은 것이 넘쳐나고 제 할 일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엔팁인 나에게 스타트업은 딱 맞는 직장이기도 했다. 이것과 수박이 무슨 상관이냐고? 수박은 혼자 가만히 있으면 절대로 못 먹는 음식이다. 요즘에야 대형마트에서 조각 수박, 컷팅 수박을 팔기도 하지만 대체로 수박은 한 통에서 한 입이 되기까지 많은 노력과 아이디어를 필요로 한다. 예컨대, 이 단단한 껍질을 자취생의 최소한의 도구로 어떻게 분해할 것인가, 남은 수박을 최대한 신선하게 어떻게 보관할 것인가 등. 주도적, 적극적, 진취적인 자세가 없으면 먹기 힘든 과일. 그게 바로 수박이다.
3) 다방면의 호기심으로 이뤄내는 다양한 조화
엔팁의 특징 중 하나는 넓고 얕은 호기심이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호기심이 영감이 되어, 여러 분야를 경험해보고 싶은 열정으로 이어진다. 수박도 마찬가지다. 수박은 특유의 단 맛으로 그 자체로 훌륭한 식사가 되기도 하지만 어울리는 단짝 친구도 다양하다. 수박을 맛있게 먹는 나만의 방법은 ‘소금’을 뿌려 먹는 것이다. 상극일 것 같은 짠맛과 단맛은 함께했을 때 단 맛이 더 배가 된다. 이것을 ‘대비효과’라고 하는데, 사람의 미각은 짠맛을 먼저 맛보았을 때 이어지는 단맛을 더 강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일부 제주 지역에서는 수박을 된장에 찍어 먹기도 한다. 여름에 먹을 것이 없을 때 덜 익은 수박을 먹을 때가 있는데 마치 오이, 또는 무의 맛 과도 같아 된장에 찍어 먹는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3. 그래서 결론은, 꾸준하게 좋아한다. 수박.
과거의 슬럼프, 현재의 계절, 그리고 미래의 내 업(work)으로까지. 수박이 가진 매력을 살펴봤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수박을 먹고 있다. 친구들과 함께 먹을 때처럼 다이내믹한(?) 즐거움은 덜하지만, 그래도 흘러가는 여름 밤에 꽤나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주곤 한다. 톡톡 튀면서도 담백하게, 한결 같이 따뜻한 열정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
아삭, 베어 무니 어느새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