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랑 크레파스’

- 나의 색깔을 정의하자면.

by 별빛서가


꼬꼬마였던 시절, 미술 선생님은 ‘노랑 크레파스’로 꼭 밑그림을 그리게 하셨다. 어차피 지워지지 않는 것은 다른 크레파스랑 똑같은데 왜 꼭 노랑이어야 했을까? 항상 궁금했다. 난 그다지 질문을 많이 하는 아이도 아니었고, 그럴 용기도 없었기에 속으로만 그 이유를 상상했었다. 그냥 하얀 도화지 위에 그렸을 때 눈에 크게 띄지도 않고, 개성 있는 다른 색들로 덮어버리기 편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그렇다면, ‘나’는 참 ‘노랑’을 닮았다. 어려서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거나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있는 듯, 없는 듯. 나서서 무엇을 대표하는 것도 불편했고, 친구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있는 편도 아니었다. 아마도 희귀하게 느껴지는 ‘선’씨라는 성만 아니었다면 나를 기억하는 이도 별로 없을 것만 같다.



가끔 남들 앞에서 나의 속내를 드러내야 할 때면, 어른이 된 지금도 가슴이 ‘콩닥콩닥’한다. ‘내 이야기가 틀리면 어쩌지?’, ‘내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만 하는 건 아닐까?’. ‘빨리 다른 사람들이 더 재밌는 얘기로 내 말 좀 덮어주었으면......’. 어느 때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꿀꺽 삼키고, 타인의 말을 그대로 듣고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들에게는 가끔 ‘고집스러운 노랑’ 노릇을 하곤 했었다. ‘왜 난 항상 밑그림이어야 하는데!’하고 발끈하는 마음이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런 내 모습에 배신감을 느끼고 떠나는 이도 있었다. 스케치북 전체를 노랑으로 삼켜버리고 싶은 욕심들이 나를 더 외롭게 만들기도 했으니까.



‘하필이면 나는 왜 노랑일까. 세상에 그 숱하게 많은 색 중에서...... 나는 왜 이렇게 평범하고, 잘하는 게 없지? 개성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런 내가 어쩌다 ‘글을 창작하는 일’을 전공했고, ‘남의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있다. 문학적 재능도 없는 내가 무슨 소설가나 시인이 되겠냐며, 난 다시 밑그림을 그리던 ‘노랑’으로 살겠다고 그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남들이 필요로 하는 글을 쓰고, 그렇게 글자를 팔며 살다 보니 어느덧 마흔이 되었다.



매일 똑같은 말, 평범한 단어를 무한 짜깁기해 생산하는 글들. 감정도 없고, 감동을 받는 이도 없는 노동의 반복. 계속 이렇게 그림자처럼 살아야 할까? 우울감이 찾아올 때면, 남편이 넌지시 나에게 말을 건넨다. ‘사람들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공감도 잘하는 게 큰 장점이라고. 당신의 글을 써보라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참 많은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고. 그걸 자신만 모른다고.’ 나를 북돋는다.



가만 추억해보면, 아이들을 가르치던 때가 생각이 난다. 나의 서툰 재주로 글쓰기를 가르쳐왔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때 참 행복했었다. 처음 5~6명도 겨우 모였던 첫 도서관 수업.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는데, 수업이 끝을 향해 갈수록 차분해지고 농담까지 건네는 경지에 이르렀다.



입소문을 타고 수업은 하나둘씩 늘어났고, 나를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을까.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남편의 이직으로 이사를 가고 수업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그 친구들이 보내온 문자를 보며 많이 울었다. 나라는 사람이 더 이상 ‘밑그림용 노랑’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으니까.



나도 혼자 색을 낼 수 있는, ‘노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무엇을 그릴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해도 ‘무엇’이라는 주제 앞에서 초라해진다. 남의 생각에 기대서 살아온 탓일까. 오롯이 ‘노랑’으로 빛낼 수 있는 작품을 한편 써보고 싶은데 머릿속이 온통 하얗다.



‘점’ 하나의 용기가 필요하다. 나에게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건 딱, 그것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