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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서가 Sep 03. 2021

배움과 가르침 사이에는 '나이'가 없다

가끔 나이를 잊고 살 때가 있다. 특히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는 녀석들이 올해 몇 개월인지, 몇 살인지만 신경 쓰게 될 뿐 '나의 나이'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 사회생활을 한다면, 직급이나 몇 년 차 정도의 경력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전업주부에게 '나이'는 그저, 새로운 관계에서 호칭 정리에 잠시 이용될 뿐이다.


그러다, 어느덧 난 '마흔'을 맞이했다. 왜 자꾸 여기저기 내 나이를 떠벌리게 될까 생각해보니, 기억하기 쉽기도 하고 인생에 한 레벨을 상승한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인 듯하다. 첫째의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난 새로운 세대로 진입을 했으니.... 동시에 그 설렘도 함께 온 것 같다.

Pixabay License



2학기가 시작되고, 아이들이 다시 학교와 유치원에 가면서 난 또 무언가를 도전해 보고 싶었다. 어떤 글을 쓸까, 애태우며 고민하다가 '출간 기획서'로 정리해보니까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또 들끓었다. 하던 일이나 제대로 하지, 나도 참 '나답다'. 요즘 여러 책을 읽다 보니까 문학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는데, 새삼스럽게도 '학부 때 치를 떨게 싫어했던 시'에 특히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왜, 이럴까 정말. 아마도 첫째가 쓴 동시를 보면서, 마흔인 나도 써보고 싶다고 느낀 걸까. 이런 걸 질투하나, 엄마가... 또르르....


정보를 얻고 싶을 때는 어디?! 그렇지, 맘 카페를 또 들어가 봐야지. 검색을 목적으로 들어갔다가 아줌마들의 이런저런 글을 읽는 걸로 시간을 허비하기 일쑤지만. 그 유혹을 이기고 '문예 활동'에 대한 글을 발견했다. 어느 대학 국문과 '명예교수님'께서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힐링 문예 수업'이 그 주제였다. 강의계획서를 가만 들여다보니까, '시'를 맛있게 읽고 쓰는 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이거다!'


코로나19 2년 차가 되니까,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온라인 수업을 듣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직접 만나서 소통하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비교적 적은 금액으로 '이동 시간'에 대한 제약 없이 '좋은 강의'를 접할 수 있는 건 참으로 좋은 일이다. 또, 여러 수업을 들으면서 참가하는 분들을 보면 '나처럼 전업 주부'로 사는 분들도 많고, 일과 육아 사이의 틈을 비집고 열정적으로 '배우는 분'들도 많았다. '화상 수업'이라는 낯선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도 종종 뵐 수 있었다.



오늘은 문예활동 첫 시간. 역시 줌을 이용한 비대면 강의였는데 난 입장하자마자, 깜짝 놀랐다. 참, 사람이 편견을 가지면 안 되는데.... 강의하시는 교수님은 '명예'라는 말이 딱 와닿을 정도로 연세가 꽤 있으신 분이었다. 아, 맞다. 교수님 앞에 그 수식어가 붙을 때에는 고령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텐데... 내가 그 부분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수강생들의 구성도 인상 깊었는데, 이제 막 앉기 시작한 어린아이를 키우는 젊은 엄마부터 40~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육아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한 여성 분들도 계셨다. 그리고, 60세가 넘어 보이는 인생 이모작을 꿈꾸는 어르신들도 절반 이상은 된 듯했다. 왜 이 분위기가 적응이 되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보니, 화상수업은 젊은 세대들이 주로 이용할 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어쩜 이렇게 세상을 보는 눈이.... 요것 밖에 안될까?



노인이 되면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는 것이 어려울 거라는 편견. 그분들의 소외를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내 삶에 함께 어울리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나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어색한 미소'가 대신하고 있었다. ​


한편으로는, 70세가 넘어 보이는 교수님의 입장을 떠올려봤다. 문단에서, 교단에서 40년은 넘게 학생들을 직접 만나면서 사람 냄새 맡아가며 수업을 하였을 텐데...... 고작 노트북 화면을 통해 손바닥보다 작은 학생들의 얼굴을 보아야 할 때,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그리고, 한 고령의 수강생이 화면으로 공유한 시를 읊기 위해 돋보기를 가까이 들이대면서 한 글자, 한 글자를 읽어나가는 걸 보면서... 이 상황이 너무 진지하면서도 흥미롭고 마음이 말랑해졌다.

​​​


오늘 강의에서, 교수님은 시 한 편을 공유하셨다.


<아버지의 등>

​     하청호


​아버지의 등에는

늘 땀 냄새가 났다.​


내가 아플 때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셨지만

아버지는 울지 않고

등에서는 땀 냄새만 났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힘들고 슬픈 일이 있어도

아버지는 속으로 운다는 것을

그 속울음이

아버지 등의 땀인 것을

땀 냄새가 속울음인 것을


교수님은 이 시를 읽은 후의 소감을 물어보셨다. 시를 감상하는 것에는 공식이 없다고, 그저 독자가 읽고 느끼는 것이 '감상'이라고 설명을 덧붙이셨다. 난 살포시, 작은 용기를 내어 그 느낌을 말했다.


"저는 시인이 아버지의 '등'에 시선을 둔 것이 인상적이고, 감동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엄마와는 정면으로 마주 보고 이야기를 잘 나누는데, 아버지는 얼굴보다 등을 바라보는 게 익숙한 것 같아요. 저의 어린 시절도 아버지의 뒷모습을 많이 보고 자랐거든요. 더욱 아련했던 건, 아버지는 그런 슬픔을 가족 앞에서 보여주지 않으셨으니까... 아마도 시인 또한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그 울음'과 '슬픔'을 공감하고 위로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난 오늘 이 시 한 편으로, 그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돌이켜 보기도 했고. 다양한 연령의 수강생들과 소통하면서 삶의 폭이 아주 조금이나마 넓어진 것 같아 감사했다. 앞으로 4번의 강의가 더 남아있는데, 그때 마나 난 어떤 배움을 얻게 될까 설레고 기대된다.


'배움에도 나이가 없듯, 가르치는 것에도 한계가 없다.'


한때 난, 무언가를 시작하기 너무 늦은 게 아닐까 한계를 지었는데... 아직 고작, 마흔밖에 안됐다. 건강하게, 잘 지내기만 한다면 뭐든 해도 좋은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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