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을 통해 성장하기.
나는 겁이 많다. ‘쫄보’라는 말이 나에게는 맞춤옷처럼 잘 어울린다고나 할까. 새롭고, 낯선 것 앞에서는 ‘어떻게 하지?’ ‘망신당하면 어쩌지?’라는 물음부터 떠올라 그대로 멈춤 상태가 되곤 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시작조차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마흔이 넘어서도 가던 카페만 찾고, 익숙한 사람들과 소통한다. 나는 안전 욕구가 도전 의식을 월등히 앞서는 사람인 것 같다.
초등학교 때였나. 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을 때면 ‘엄마가 지켜보고 있을’ 그 상황이 너무나 두려웠다. 그날은 한껏 차려입은 부모님들이 겉으로는 흐뭇한 속으로는 애타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엄마는 타인의 시선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자식이 남들 앞에서도 대견해 보이기 바라셨다. 난 키도 작고 왜소한 체격인 데다가 앞에 나서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소극적이라 먼저 말을 걸기보다는 내심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여러 사람이 나에게 쏠리는 것을 무척 괴로워했다.
“넌 어째 그렇게 짜잔하냐. 야물지를 못하고.”
엄마는 내가 짱돌처럼 단단하게 자라기를 바라셨지만, 난 홍시처럼 작은 힘에도 쉽게 부서졌다. 그럴 때마다 격려나 응원보다는 얕지만 가슴을 쿡! 찌르는 비난을 자주 들어서일까, ‘오기’라는 것이 조금씩 내 마음속에 움트긴 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직장에서 매체를 다루는 일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첫 직장은 유아 교육 잡지 어시스트였고, 두 번째는 협회지 기자로 일했다. 어시스트 시절에는 취재 지원 정도라서 부담이 없었으나, 그 이후로 내 이름을 걸고 나오는 기사를 써야 했을 때에는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했다. 더욱이, 온라인 매거진 편집자로서 책임이 더 커졌을 무렵에는 현장 취재부터 인터뷰까지 기획하고 진행해야 했으니. 스무 살 이후의 나를 더욱 단단하게 키워낸 것은 ‘밥벌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이후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갓난아이의 옹알이를 해석하는 것부터 보리차를 한 모금 떠먹이는 일까지. 내가 어쩌다 겁(대가리)을 상실하여 아이를 둘이나 낳게 된 건지. ‘더 늦기 전에 아이는 낳아야지. 하나는 외로우니까 둘은 있어야지.’ 이 말이 돌림노래처럼 들려서였을까, 홀라당 넘어가버렸다. 또르르.... 서른쯤 되면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응애’ 소리와 함께 내 인생이 리셋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매일, 매년. 내가 매 순간을 불완전하고 미성숙하게 마흔을 맞이했다.
그리고 21세의 대혼란기, 팬데믹도 함께 찾아왔다. 우물쭈물 찾아온 코로나19는 그나마 질서를 찾아가고 있던 내 삶을 통째로 흔들어놓았다. 육아와 일의 경계가 없어져버린 일상에서 ‘난 무얼 할 수 있을까?’하고 ‘나의 쓰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얼마나, 더 오래 이렇게 돌밥만 하다가 지쳐 한밤중에 소주와 닭발로 위로를 받아야 할지 막막했다. 프리랜서로 겨우 ‘글밥’이나 먹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매일 뉴스를 틀어놓고 ‘확진자 수’가 줄어들기를 바라면서. 코로나19로부터 우리 가정이 안전하도록, 방어할 수 있는 울타리를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쫄보인 내가, 문을 더욱 꼭꼭 걸어 잠그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두더지가 굴을 파고 들어가듯,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심리적으로도 외부와 단절된 상태였던 것 같다.
2020년 여름쯤이었나. 땅굴파기에 한창일 무렵 아는 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3년 정도 충청도에서 살았을 때 영어 스터디를 함께 했던 친구였다. 타지에서 육아 외에 ‘나로서’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에 만난 이었다. 그녀는 “언니 요즘 영어 공부 안 해?”라고 안부를 물었다. 오늘보다 내일, 하루하루 한 발을 과감하게 내딛는 친구였기에 ‘정체되어 있는 나’를 가끔씩 흔들어 깨워줬다.
“그냥 코로나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하고 사는 중이야. 애 키우면서...”
그렇게 몇 마디 소식을 주고받다가, 자연스럽게 이어진 대화 속에서 난 ‘변화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는 온라인 자기 계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새벽 기상, 달리기, 독서, 글쓰기, 경제 공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을 성장시키는 이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이었다. 집에서 살림하며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던 나에게는 새로운 세계였다.
소소하게 운영하던 블로그도 그 기능을 멈춘 지 오래였고, 내가 접하는 온라인 세계는 떠먹여 주는 인터넷 기사나 댓글 따위였으니. 그저 알고리즘을 따라가다가 얻어걸린 ‘자기 계발’이라는 단어가 내 일상에 들어올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개 쫄보인 나는, 눈팅으로 사람들의 대화를 관찰했다. 매일 새벽 4시 반이면 하나둘씩 일어나 ‘좋은 아침!’ 인사를 건네고, 달리기 인증을 하고, 각자의 더 나은 하루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몇 달쯤 지났을까, ‘나도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작심삼일일지라도,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영어 원서도 읽어보고 블로그에 하나둘씩 무언가를 써보았다. 평생 남의 글만 써오던 내가 ‘나의 글’을 쓰는 즐거움도 알았다. 실패가 두려워서, 잘 해내지 못할까 겁이 나서 시작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에 쨉을 날려보았다.
그리고 그 작은 펀치들을 더 많은 곳에 날려보았다. 랜선의 세계는 무한하니까. 온라인 책 쓰기 모임, 매일 걷기와 달리기 모임, 필사 모임, 영어 원서 읽기 모임, 독서모임 등. 내가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분야는 거침없이 문을 두드렸다. ‘저요!’하고 이것저것 신청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집에 있으나, 집 밖에 있는 느낌이랄까. 정신머리만 집을 나갔는데 힐링이 되는 미묘한. 대부분의 모임은 줌(Zoom)으로 하니까, 낯선 상황에 대한 두려움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1년 정도, 온라인 세상을 휘젓도 다니다 보니까. ‘사람’이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면서 살아갈까?’ ‘왜 더 나아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걸까?’ 하는 호기심도 생겼다. 직접 만나서 물어보고 싶었다. 노트북 화면의 작은 섬네일, 그 너머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용기를 냈다. 랜선 밖에서 만나 ‘인터뷰’를 해보기로 했다. 소싯적 경험을 살려서.
내가 만나는 이들은, 세상에 이름을 널리 떨친 사람들은 아니다. 소박하면서도, 꾸준하게 삶을 가꾸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잘 보살펴온 작은 정원처럼, 사랑이 깃든 나무처럼 스스로를 돌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 때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도 퍼뜨리면서 매일을 살아가는,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사람들이다.
한껏 용기를 내어 지난여름에 인터뷰를 시작했으나, ‘고작’ 그런 글솜씨를 가진 탓에 참으로 오래 보관만 해두었다. 귀한 대화들을 옮길 깜냥이나 될까 하여, 호기롭게 시작한 일의 마무리를 짓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그들과 나눈 이야기를 ‘글’을 통해 전하려고 한다. 매주 연재를 통해 전하고 싶지만, 시간이 꽤 흘러 근황이 변화한 이들도 있기에... 시간과 능력이 허락하는 대로 올려볼 요량이다.
부디, 그들과의 특별한 대화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내일의 씨앗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