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거면 바둑대회 같은 건 나가지 않을 걸 그랬어요. 난 정말 바보, 멍청이, 항상 지기만 하는 아이에요."
첫째 아이는 여덟 살이 되던 해에 바둑을 시작했다. 그리고 1년 반 만에 급격하게 실력이 상승했다. 어떤 부분에 재미를 느꼈는지 나는 도통 모르겠지만,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흠뻑 빠져있었다. 난 그 열정과 노력이 예쁘고 기특해서 매 순간은 한껏 응원했다.
아이가 처음 바둑에 빠진 건, 유치원에서 겨울방학 기념으로 나눠준 체스판 때문이었다. 아빠에게 규칙을 배우고, 말을 하나씩 옮기면서 '전략'이 필요하다는 걸 감지한 것 같았다. 틈만 나면 체스를 두자고 졸라댔는데, 난 전혀 관심이 없는 분야라 '이참에 바둑을 가르쳐 볼까?' 생각했다. 집 앞 작은 바둑학원에 체험 수업을 신청했고, 아이는 꽤 흥미로워했다. 매일 가고 싶다는걸, 천천히 해보자고 일주일에 2~3번 가는 것으로 등록했다.
아이는 바둑학원에서 매일 지기만 한다고 불평이었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학원에 갔다. 한 달쯤 지났을까?
"엄마! 나 드디어 1승을 거뒀어요!!" 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하원을 했다.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그런데, 몇 분 지나지 않아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선생님이 앞으로는 지는 날들이 더 많을 거래요. 난 왜 자꾸 지기만 하는 거냐고요. 이겼는데 왜 또 진다고 하냐고요."
선생님과 상담을 해보니, 그 말씀의 뜻은 이러했다.
"어머니, 저도 찬이가 첫승을 거두어서 기뻤어요. 하지만, 승부에 연연해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앞으로는 질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인데... 아마도 아이가 아직 어려서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나 봐요."
아이의 심정도 이해가 가고, 선생님의 말씀도 충분히 공감하니까. 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남편과 상의를 했고, 한 달 정도는 쉬어가자고 결정했다. 실력이 느는 것도 좋지만, 마음 그릇을 키우는 일도 필요하다고. 그리고 수일이 지났을 때, 아이는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엄마, 나 바둑학원 다시 가고 싶어요."
"또 질 수도 있는데 괜찮아, 이제?!"
"네... 제가 열심히 하다 보면 이기는 날이 오겠죠."
그 후로 아이의 실력은 계단을 오르듯 한 번씩 멈춰서길 반복했다. 어떤 날은 상수들과 바둑을 두어도 이기는 날이 있었고, 어떤 날은 하수들과의 대국에서 참패를 하는 날도 있었다. 가끔씩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될 정도로 눈물을 삼키고 집에 오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잠시 쉬어서 갈 것인지를 물었다. 아이가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봐야겠다 생각했다.
바둑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났을 무렵, 아이는 예비선수반으로 승급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또래 2학년은 찬이보다 먼저 시작한 3명이 전부였고, 대부분은 4~6학년 형아, 누나들이랑 대국을 해야 했다. 아이가 승급하던 첫날, 전화가 걸려왔다. 울음과 겁이 섞인 목소리.... 걱정이 앞섰다.
"엄마, 나 문을 못 열겠어요. 온통 형아들뿐이라서, 반에 들어가는 것도 무서워요."
"찬아, 그러면 집으로 올래? 아니면 엄마가 학원 앞으로 갈까?"
"아니요. 저는 정말 못하겠어요. 모두 상수들뿐이라서.... "
그날부터 아이는 다시 바둑을 쉬기로 했다. 그리고 남편은 쉬는 동안 뭐 할 것인지를 슬쩍 물어보았다.
"아빠, 저는 바둑학원에 안 가는 동안 할 일이 있어요. 상수들을 꺾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할 거예요."
오마이갓, 누구 배 속에서 나온 걸까? 아이는 자신에게 필요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책을 사달라고 했다. 매일 바둑TV를 2시간씩 시청하고, 학원에서 배운 책을 다시 보고 또 봤다. 거실에 바둑판을 항상 깔아놓고, 양손을 번갈아가며 혼자 바둑을 두었다. 눈을 뜨자마자, 밥을 먹으면서도 바둑 책을 보고, 잠들기 전까지 바둑 앱을 깔아놓고 연습했다.
스스로 준비가 되었을 때, 아이는 다시 학원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기재와 노력이 합쳐져서 실력이 빨리 는다고 하셨다. 아이도 나도 슬슬 욕심이 생겼다. 코로나19가 일상화되면서 대회들도 하나둘 열리기 시작했고, 참가하기로 했다. 자신만만해진 채로.
연달아 세 번의 대회를 등록했다. 결과는, 참패였다. 첫 번째 단체전에서 노메달, 두 번째 개인전은 본선 진출까지만, 세 번째 지역대회에서는 1승 2패. 마지막 대회를 마치고 난 후, 아이는 그동안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고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패배감에 풍덩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아이와 부모 둘 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패배의 원인을 찾고 싶었다. 너무 기대감에 들떠있어서 그랬나? 완급 조절을 못하고, 욕심이 앞서서 그랬나? 하루에 2시간씩 하고 싶다고 해서 학원비도 두 배나 들었는데.... 왜 실력이 늘지 않은 걸까?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 속이 감싸고 있었고,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아이보다 내가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학원 선생님과 면담을 신청했다.
"어머니, 찬이가 너무 빨리 성장했잖아요. 오히려 그 부분이 독이 된 것도 같아요. 처음에는 실력이 부족하다고 여겼을 때는 긴장도 하고, 의지가 컸는데... 요즘에는 마음이 붕 떠있는 모습이 보여요. 아마 초심을 잃은 게 아닐까요. 이럴 때에는 천천히 해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초심... 그러고 보니,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학원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전부였다. 남들보다 더 오래 수업을 듣는다는 것이, 실력보다는 자만심을 키웠던 건 아닐까. 절실함보다 익숙함이 더 컸으니까.
아이가 커가는 걸 보면서, 나는 왜 글쓰기가 어려웠던 것일까? 생각했다. 오래 글밥을 먹어왔다는 자격을 자신에게 부여하고, 그만한 이야기를 쏟아내지 못할 거면 포기해 버렸었다. "책"이 마치 내 실력을 증명하는 트로피라 정의하며, 잿밥에만 더 관심이 많았던 날들도 있었다. 남들보다 특별하고 싶은 마음만 앞서서 '무엇을 쓸까'만 쉼 없이 궁리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그러니 남들 다 쓴다는 책을 나는 왜 못 쓰냐며 울부짖을 수밖에. 천천히, 야금야금, 휴식기도 가지면서 성숙해야 하는데... 난 오만하게 성과물만 기대했다.
그래서 난 이제... 아홉 살 아이처럼 나를 스스로 키워가 보려 한다. 때로는 미흡하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써보기도 하고, 마음대로 안될 때는 주저앉아 울기도 하면서 단짠단짠하게 커나가 보련다. 훗날, 내가 한 뼘 더 커져있길 기대하면서...^^
아, 아홉 살 아이가 엄마를 키운다. 증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