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2022년 경기도 양주 옥현중학교
“너, 이리 와! 조유현 또 지각이냐?”
운이 좋으면 그냥 교문을 통과할 줄 알았는데 오늘 화요일이라는 것을 깜박했다. 학생부 선생님 중에 가장 깐깐한 박 선생님이 교문 지도를 할 줄 알았다면 굳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괜한 참견을 하지 않았을 터였다.
“너 이 버스 꼭 타야겠어?”
“누, 누구세요. 저 아세요?”
아침 시간에 갑자기 자기 팔을 잡아끄는 중학생을 보고 초등학생 꼬마는 꽤 당황했을 거다. 유현도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안 보인다! 안 보인다! 이렇게 주문처럼 외치며 그냥 지나가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만 칠천삼백칠십사는 너무 크다. 게다가 이 꼬맹이가 버스를 타려는 순간 버스 안에 사람들의 숫자가 모두 10단위씩 가파르게 올라갔다. 이건 매우 안 좋은 징조다.
“나, 나쁜 누나 아니야.”
유현이 최대한 웃어 보였지만 초등학생 꼬마의 얼굴은 벌써 사색이 되었다. 다행히 마을버스는 두 사람의 실랑이를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출발했다. 그와 동시에 마을버스 사람들의 숫자가 빠르게 낮아졌다. 꼬맹이의 숫자도 급격히 추락하여 이제 20대 후반으로 떨어졌다. 다행이다. 모두 평화롭고 안전하다. 다만 뒷수습을 해야 하는 유현의 처지가 그저 난감할 따름이었다. 일단 막무가내로 버스 타는 걸 막은 이유에 대해 꼬맹이에게 설명해야 한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 그래 될 대로 되라지….
“그냥, 네가 내 이상형이라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순간 유현은 이 꼬맹이가 이 말도 안 되는 변명이 정말인 줄 알고 자신에게 찰싹 달라붙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었다.
“전 연상 안 사귀거든요.”
꼬맹이는 꽤 단호했다. 그 단호한 취향에 유현은 안심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잘 먹고 잘살아라.”
이렇게 말하고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정류장에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을버스의 배차 간격은 15분이다. 이 어색하고 난감한 시간이 10분이나 더 견뎌야 한다는 말이다. 이게 뭔 꼴인지. 유현이는 자기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5분쯤 시간이 지났을 때 꼬맹이 녀석이 입을 열었다.
“제가 정말 누나의 이상형이라면….”
“아, 아니 괜찮아. 나 원래 상처 안 받는 타입이야.”
이렇게 말하고 유현은 꼬맹이를 피해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누나, 잠깐만요!”
다급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절대 붙잡히면 안 된다. 한순간이라도 이 꼬맹이 녀석과 같이 있다간 손발이 오그라드는 끔찍한 상황을 견디어야 한다. 결국 유현은 네 정거장이나 남은 학교 길을 뛰어야 했다. 그 결과가 또 지각이다.
“선도부들! 얘들 이름 확인해서 벌점 정확히 부과하고 얘는 3학년 7반 조유현이다. 너희들도 알지?”
박 선생님의 말씀에 선도부장 연우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3학년 최고 인기남 연우에게 이렇게 지각 대장으로 낙인찍힌 채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니! 최악의 인생이다. 유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벌점 다 받았으면 너희들은 모두 나 따라와.”
박 선생님이 뒷짐을 지고 앞에서 뒤뚱뒤뚱 걸었다. 이번 주만 지각이 세 번이다. 오늘처럼 쓸데없이 참견만 안 했어도 유현이 벌점 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놈의 오지랖! 사람들의 숫자가 5만이 넘든 10만이 넘든 신경 쓰지 않았어야 했다.
“자 너희들은 여기 쓸고 너희는 이쪽 화단 정리 좀 해라.”
박 선생님이 지휘봉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면 지각생들이 쪼르르 달려가 청소를 하였다. 10년 전이었다면 박 선생님의 지휘봉이 지각생들의 볼기짝을 사정없이 내리쳤겠지만, 요즈음엔 체벌 자체가 금지되어있는 터라 박 선생님의 지휘봉은 본래의 쓰임새보다는 허공을 가리키는 역할에 머물고 있었다. 지휘봉이 원래의 지휘봉의 역할을 하는 셈인데 박 선생님은 그게 불만이었다. 그는 옥현중이 학력이 떨어지고 생활 태도가 개판이 되는 것은 모두 지휘봉이 허공을 가르며 정신이 썩어빠진 아이들의 볼기짝을 강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학교에서 자신에게 전권을 주면 옥현중의 미친개 박정진 선생의 참모습을 학생들에게 보여줄 수 있으련만.
“조유현 너는 학교를 청소 하러 오는구나!”
화단 난간에 걸터앉은 박 선생님이 유현에게 괜히 시비를 걸었다.
“헤, 그러게요.”
유현은 괜히 실실 웃어 보였다. 미친개에게 물리면 약도 없다. 미친개가 괜한 시비를 걸 땐 무조건 납작 엎드려야 한다는 것쯤은 유현도 잘 알고 있었다.
“학교가 청소하러 오는 곳이냐 공부하러 오는 곳이냐 인석아.”
박 선생님이 지휘봉으로 유현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네네 저도 잘 알고 있어요. 미친개 선생님. 어 그런데 뭐야. 이거!’
박 선생님의 숫자가 바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벌서 3만이 넘었다. 유현은 당황해서 주변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모두 15에서 30 사이였다. 그렇다면 이건?
“어, 내, 내가 왜 이러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박 선생님이 순간 휘청했다. 그는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눈을 치켜떴지만 소용없었다. 하늘이 노랗게 변했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주변의 모습은 흑백 필름같이 뚝뚝 끊기다가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귀를 찌르는 사이렌 소리! 그와 동시에 박 선생님은 마치 거대한 고목이 쓰러지는 것처럼 화단으로 풀썩 쓰러졌다.
“뭐, 뭐야?”
“선생님!”
청소하던 지각생들이 당황해서 웅성거렸다. 박 선생님의 숫자가 4만 5천이 넘었다. 숫자가 얼마만큼 커지면 사람이 죽는 거지? 그걸 직접 본 적은 없다. 분명한 건 박 선생님의 숫자가 지금 빠르게 올라간다는 점이었다.
“누구 CPR 할 수 있는 사람 없어?”
학생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일이다. 유현은 박 선생님에 달려가 두 손에 깍지를 끼고 박 선생님의 심장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숫자가 내려가지 않는다. 어떡하지 진짜 죽을 수도 있어!
“아, 선생님 정신 차리라고요!”
유현의 팔 힘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손이 떨린다. 더 이상 힘이 없다. 이런 모습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유현의 머릿속에 미연의 마지막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또 누군가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때였다. 누군가가 유현을 밀쳤다. 연우였다. 곧바로 바르고 정확한 CPR이 시작되었다. 유현은 벌게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행이다. 박 선생님의 숫자가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다행이야. 아무도 죽지 않아서….”
유현은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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