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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순 May 11. 2020

그분이 오셨어




















































































































 발렌타인 데이 사건 이후로 나의 삶은 온통 남편을 '따라갈 수 있는' 뭔가의 근거를 만드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겨우 마비시켰던 케케 묵은 옛 꿈까지 들춰서 해매었다. 어떤 가능성이라도 다 주워담아보겠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무엇보다도 미국에서 함께 하게 된다면 내 혼자의 힘으로 두 다리로, 그렇게 해보이고 싶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시간을 개척하며 살아가기도 힘든 세상에 내 존재가 내 소중한 사람의 경제적인 부담이 되는 것만은 정말 피하고 싶었다. 그나마 내 의지로 지켜왔던 가장 소중한게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그 사람에게 전염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밤을 새워 가능성의 지도를 그려보다가 개구리 눈을 하고 출근했다. 넋이 나간 얼굴로 무거운 머리를 낑낑거리다가 문득 지긋지긋한 숫자놀이를 언제까지 해야하나 싫증이 났다.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도 남의 일을 하다가 내가 40살이 되고, 50살이 되면 회사에서 버려지겠거니 하는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잃고 싶지 않아서, 곁에 있고 싶어서 꺼내기 시작했던 마음들이 조금씩 원래 품고 있었던 다른 것들과 엉겨붙어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래서 결혼하고 미국에 와서 살기 시작하기 전부터 나와 남편은 내가 집중할 무엇인가를 찾아 해맸었다. 나의 비자는 유학생의 dependent, 다시말하면 와이프로서 미국 안에서 경제 활동이 불가능하다. 결국 미국에서의 삶을 찾으려면 자격증 취득을 준비하던, 석사를 시작하던 뭔가를 찾아내야만 했다. 우리는 같이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자격증을 공부할 수 있는 학원을 찾아갔지만, 학원비를 비롯해 시험을 치기까지 천만원 남짓한 돈이 필요하다는걸 알게되었고, 그렇다고 내 전공을 살려서 석사를 준비하기에는 더더욱 금전적인 여유가 부족했다. 게다가 돈 이외에도 석사를 하고 싶지 않았던 나름의 확고한 이유는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면 그래도 대부분은 타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돈을 버는 직장인이 된다. 나도 그렇게 남들처럼, 적당한 곳에서 직장인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나의 전공과 성향이 맞지 않는다는걸 일하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업무의 일환으로 투자제안서를 만들게 될 기회가 있었는데, 제안서에서 가장 중요한 수치들 그 내용들보다는 그저 제안서 자체를 예쁘게 만드는 행위가 더 즐거웠던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저 잘한다는 칭찬이 듣기 좋아서 경쟁 자체에 심취하곤 했었다. 그 동안 참고 버텨온게 아까워서 포기도 못하고 남을 이겨먹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내 마음보다는 돈을 최우선으로 하게 되었고, 그저 밑 빠진 통장에 물 붓는 격으로 월급만을 위해 살게 되었다. 그런데 남편의 삶은 나와는 너무 달랐다. 남편은 연구 그 자체를 가장 좋아했고, 즐거워했다. 중요한 시기에 내가 즐거워하는 일이 무엇인지 마음의 소리를 듣지못한 내 눈에는 남편은 그야말로 그냥 박사의 길을 걷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대학원은 아마 남편처럼 확신이 선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기관일 것이다. 나는 단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또 한번 내 자신을 속이면서,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닌 우리의 자산을 소비해가면서까지 석사를 준비할 수는 없었다. 

 결국, 마지막에 우리가 타협했던건 어학원. 어학원을 다니면서 삶에 적응을 하다보면 뭐라도 그림이 나오겠지 싶었다. 긴 장거리 연애에 지쳤던 나는 불가능하다는 현실 앞에서 무너질 바에 그냥 뭐라도 핑계를 붙히면 함께 할 수 있다는 설레임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그렇게 어학원의 학생이 되었다. 대학교 시절에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왔던 경험이 있어서 그때 어학원에 몸담고 있는 학생들을 몇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엔 내가 그 학생으로 다시 이 땅을 밟게 될 줄이야. 어학원에서 학교 입학을 준비하고 있는 아이들보다 내가 살짝 나이가 많기는 했지만, 어학원은 꽤나 즐거웠다. 남편의 동기가 말했듯이 어쩌면 이곳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박사생들보다도 조금 더 생활 영어를 많이 쓸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졌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썩혔던 영어회화도 마음껏 해볼 수 있었고, 한국인을 비롯해서 인도, 사우디 아라비아, 일본, 케냐등 세계 곳곳에서 온 학생들과도 친해졌다. 유치원생 이래로 태어나서 한번도 춤이란걸 춰보지 않았었는데 친구들과 술 한방울 안 들어간 맨정신에 춤을 춰보기도 하고, 같이 콘서트를 가보기도 하는등 그야말로 글로벌 대사가 따로 없었다. 나는 어쩌다보니 그중에서도 중동에서 온 사우디 아라비아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는데, 그동안 내가 가졌던 이슬람권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무지하게 짝이 없는 것이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한국에 있는 엄마 아빠에게 안부 전화를 할때마다 그 사우디 친구에 대해서 이야기했더니 아빠는 내게 ‘미국에 가더니 사우디 대장이 다 되었네.’ 라며 사우디 대장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붙여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매 학기마다 잠시 스쳐지나가듯 사라져가는 어학원 학생들과는 다르게 나의 시간은 이렇게 어학원에 영영 묶여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열등감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몸은 어학원에 있는데 마음은 남편처럼 제대로 된 4년제 대학의 학생이 되고 싶어서 발버둥쳤다. 지금은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을 안한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곳에 있는 4년제 대학교의 학생이 될 거라 굳게 믿었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걸 공부해야할지 선택도 못한채 말이다. 지난날의 커리어를 자신있게 버리고, 새롭게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현실의 벽은 한없이 높기만 했다. 사실은 내가 딴 생각을 안하고 일상에 집중하는게 우리 가계에는 훨씬 도움되는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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