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중독자의 소소한 고군분투기

커피가 빠진 일상이라고 향기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by 향순

"커피를 너무 좋아해서 많이 마시고 있어요, 이렇게 마셔도 괜찮은가요?"


커피에 들어있는 폴리페놀 성분은 항산화 효과에 좋습니다.
커피는 고혈압을 막아주고 암을 예방해줍니다.
운동하기 전 약간의 커피는 집중력을 좋게 해 주고 체지방 분해를 돕습니다.


10년간 마구 마셔댄 커피를 하루라도 안 마시면 분명하게 몸에서 이상신호를 보내오는데 인터넷에서 말하는 커피는 나에게 지나치게 낙관적으로만 느껴졌다.





1일 차.


영화에 보면 종종 안경을 잃어버려서 괴물에게 제일 먼저 죽임을 당하는 인물이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 인물이 나인 거 같다는 상상을 줄곧 하는데 나를 고문할 때는 안경을 뺏거나 커피를 공급해주지 않거나 하면 속수무책으로 죽임을 당할 것만 같았다. 내 약점이자 물처럼 마시는 최고의 기호식품 커피.

그런 내가 중대한 결심을 했다. 신물이 올라오는 출근길이여 이제 안녕!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스틱 두 개씩 홀짝홀짝하던 버릇에서 시작된 기나긴 커피 인생에 과감하게 사표를 던져본다. 평소라면 석 잔째 들이켰을 점심시간 후에도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아직까지 큰 무리는 없다. 이대로 일주일만 버텨보고 성공하면 나 자신에게 큰 보상을 해주리라. 커피가 마시고 싶을까 봐 일부러 두둑이 먹은 밥 덕분에 배도 부르고 나름 제대로 한 결정인 거 같다. 장염에 심하게 걸렸을 적에 커피를 마시지 못하고 두통에 심하게 시달렸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지만 괜찮다. 점진적으로 끊어나가면 되니까 소심하게 박카스 한병 사 먹어 보는 오후 4시 십분 땡땡이 시간.

퇴근길, 머리가 무겁다. 아직 잠자리에 들려면 한참 멀었는데 벌써 눈앞이 눈송이가 아른거리는 거 같다. 눈 언저리를 넘어 귀 뒤와 뒤통수 사이로 울끈불끈 올라오는 두통이 체내에 카페인 부족 경보를 알린다. 걸을 때마다 두개골이 울려서 8시 반 즈음 침대 속에서 곯아떨어졌다.


2일 차.

아침밥을 먹고 꿀꺽꿀꺽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이 너무나 절실하다. 저까짓꺼 한잔 먹지도 못하고 충실한 노예의 하루를 달성하려니 막막할 뿐이다. 억지로 허브티 하나를 대충 타마시고는 회사로 나선다.

어떻게든 출근하기는 했는데 이런 두통에는 어떤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약국에서 타이레놀이라도 한알 사다 먹어야겠다. 나참. 커피 하나 끊겠다고 약을 먹다니. 내 '어깨 위의 고양이 밥'에 나오는 마약중독 주인공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건뭐.. 마약이나 담배 중독과 거의 비슷한 느낌이다. 내 몸의 상태를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게 이렇게 무서울 수가. 역시 몸속에 카페인 한 방울 안남 긴다는 건 무리였다. 박카스와 타이레놀을 한알 삼켜본다. 점심 먹고 나서는 얼그레이 티를 한잔 마셔줘야겠다. 회사 사업계획도 이렇게 분 단위로 수정하고 짜지는 않을 텐데. 수액을 갈아 끼우는 것처럼 그렇게 카페인은 십 년 동안 이미 내 몸 깊숙이 지배하고 있었다.


3일 차

아침에 일어나는 건 여전히 버겁고 힘들지만 어쩐지 두통은 약이 없어도 참을만한 수준이다. 몸이라는 게 정말 정직해서 박카스나 홍차를 마시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면 살짝 쑤시고 올라오는 느낌은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틀간 성공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해봤다. 뭐 그까짓 거 안 마시는 게 대수냐고 시큰둥한 반응들이다. 나한테는 어마어마한 인내력이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매정한 사람들. 목표를 일주일로 잡았다. 오늘은 타 지역으로 외근을 가니 제일 불안한 건 기차역에서 보이는 따끈한 커피숍 간판 들일뿐이다. 움직여서 잊어보자! 향긋하고 구수한 커피 향이 절실하긴 하다. 대체 이놈의 커피가 뭐라고. 평소에는 몰랐었는데, 지하철 역에서도, 횡단보도 옆에서도, 어딜 가도 카페가 보인다. 마음만 먹으면 5분 내로 눈을 돌려서 근처 카페를 갈 수 있는 이곳, 내 나라는 카페인 중독자들이 벗어나기엔 너무도 치명적인 곳이었다.


4일 차

내일이면 퇴사를 앞둔 과거 회사 동료직원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직장인의 식후 티타임은 필수적인 수혈! 그 와중에 오늘도 자랑스럽게 '저 커피 끊었어요. 얼그레이 티 한잔 주세요.'로 PR을 해본다.

"에이, 진짜? 말도 안돼! 내가 아는 OO 씨는 항상 아침부터 커피부터 찾던 애호가였는데. 그냥 오늘만 한잔 먹어. 이거 먹는다고 안 죽어."

"아뇨, 한번 마시면 내일도 마시고 싶을 거예요. 그냥 아예 입을 대지 말아야지. 흑흑."

"우리 내기할까? 나 이직하고 다음번에 OO 씨 만날 때 그때 커피 시키면 커피값 내기."

"오 그거 좋은데요? 좀 힘들긴 한데 그래도 할 수 있는 자신은 충분히 있어요. 크크"

카페 안을 가득 메운 커피 내리는 향에 취해서는, 씁쓸한 얼그레이 티를 한 모금 들이키며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5일 차

머리가 아프지 않다. 요 며칠 커피는 마시지 않았지만 하루에 8시간 즈음 푹 잠을 잘 자서인지 나름대로 정신도 맑다. 아침마다 인간 콩나물 지하철 안에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쥐어뜯으며 이따금씩 삼켜보던 목구멍의 타는듯한 통증도 잦아들었다. 거참, 5일밖에 안되었는데 이렇게 변화가 뚜렷하다니. 값비싼 한방 다이어트도 이렇게 효과가 빠르지는 않았었다. 기대도 안 했는데 육체적 고통 5일 만에 이 정도라면 정말 해볼 만한 게임이었다. 하지만 식사 후에 강하게 유혹하는 커피의 향은 여전히 온갖 좌절과 상념을 떠오르게 만든다. 마신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우울해야 하나 싶어서 몇 번이고 카페 안의 에스프레소 머신을 멍하게 쳐다만 보았지만, 5일이나 되어서 그런지 왠지 모를 오기가 생겨서 이제와서는 마셔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마음이 크다. 빨리 사무실로 돌아가서 잔뜩 주문하여놓은 외제 허브티나 쭉쭉 마셔없애야지.


...


31일 차

인간의 습관이 고착화되려면 21일의 법칙, 최소한 21일간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습관으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어떤 구절에서 본 기억이 난다. 장장 약 10년이 넘는 내 커피의 세월을 태어나서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오래 버텨냈다. 매일 홍차로 카페인을 조금이나마 섭취하고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100% 막아냈다고 하기엔 뭐하지만. 매일 아침과 점심 식후에 가벼운 홍차 한잔씩, 그 이외에는 물과 허브티만 줄곧 마시고 있다. 이제 직원들과 함께 카페를 가면 물어보지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해주던 동료들도 "아, OO 씨는 커피 안 마신다고 했지."라고 기억해준다.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당기던 금단현상도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커피를 마시기 전보다 잠은 한두시간가량 많아졌으나, 오히려 정신은 더 깨끗해졌다. 한 달을 달성했다고 내일부터 다시 아메리카노를 쭉쭉 들이킬 것도 아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고통스러웠던 한 달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테니까. 돌이켜보면 커피가 빠진 일상이라고 해서 향기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올 한 해 가장 처음으로 쟁취한 나의 작은 성공, 혼자 싸우느라 겉으로 티가 안나는 도전이라 더 값지다. 1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카페인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계속 감시해야겠지만.

그냥, 그런 것이다. 하루에 스쿼트 50개만 해도 돈을 들여 휘트니스 정기권을 끊지 않더라도 건강해질 수 있는데 '하고 싶지 않다'는 내 자신의 본능과 하루하루 죽을 때까지 싸우며 쌓아가는 것처럼. 오늘 하루도 나는, 살아냈다. 버텨냈다.






나는 커피를 사랑했다.
여전히 커피를 마시는 상상도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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