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향순 Sep 25. 2017

보여주기 위한 삶의 졸업

소비와 과시는 삶의 원동력이 아니다.


 미국 EA사에서 나온 심즈라는 게임을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 심즈는 사람의 인생을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보게 해주는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이 게임의 제일 큰 단점은 엔딩, '끝'이라는게 없다. 원하는 것을 달성하고 해소하고 나도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책상에 앉아있다는 점만 빼면 우리 인생이랑 다를 바가 없는 신기한 게임이다. 나는 내가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제2의 인생을 시뮬레이션 하는 재미 때문에 이 게임을 줄곧 붙들고 늘어졌다. 심즈 속에서 나는 부자였고, 원하는 것을 다 가졌으며, 어딜가도 다른 심들의 주목을 받는 셀러브리티였다.


일하는 심. 항상 시몰레온$이 부족하다!!!

 내가 게임을 할때면 치트키를 써서 일단 돈을 잔뜩 만들어두고 시작했다. 얼마나 냉정한 게임인지 일단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여행을 가고 싶고 예쁜 집에 살고 싶고 좋은걸 먹고 싶은데 이 가상의 세계에서도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돈이었다.

 때로는 어느날 갑자기 현실세계에서는 잘 찾아오지도 않는 노력과 도전의식이 일어서 치트키 없는 인생을 플레이 해보겠다는 심보가 생길때도 있기는 했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꼭 내가 놀고 먹고 플레이하는 주체가 되는 심 이외에 필요한 제3자. 돈을 벌어다 주는 '일하는 심'이 필요했다. 놀고 먹고 하고싶은거 다 하는 동안 이 일하는 심은 언제나 직장에 간다.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서 하는 거라곤 자는거 씻는거 화장실 가는 일 정도 뿐이다. (꼬맹이시절에 이 게임을 하면서 나는 절대 일하는 심같은 인생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런 심이 되어 살고 있다.) 이 일하는 녀석이 끌어모아다 준 게임머니로 나는 이 세계의 셀러브리티로써, 값비싼 가구와 옷, 여행용품으로 내 한없는 과시욕을 채워나갔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그림을 그렸다. 가장 친한 단짝친구 한명이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 그 친구처럼 되고 싶어서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의 내게 하루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이어폰을 꽂고 선하나에 내 모든 감각을 집중했었던 새벽의 드로잉 시간이었던 것 같다. 한 두번 그냥 심심풀이로 올렸던 나의 스케치들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댓글로 칭찬해주었다. 나는 칭찬에 목이 말라있었다. 어쩌다가 갑자기 댓글수가 3개 이상을 넘어가면, 어떤 희열을 맛보았다.


 ' 아, 이게 재미라는건가?!'


 하지만 같이 국내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학교에 입학하자고 했던 친구와 나의 꿈은, 선택하나로 크게 달라져 버렸다. 생존을 위해서 절대로 미술의 길을 걸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던 우리 아버지는 그무렵 친구와 내가 함께 미술학원에 가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셨고, '착한 아이'로 사는 것이 내 큰 보람이었던 나는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르면서  별 다른 저항없이 그 선택을 받아들였다. 그림을 그려서 받는 칭찬과 아버지의 칭찬을 저울질해본 결과, 아버지의 칭찬이 더 무겁다고 여겼었나보다. 뭐,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배를 곪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가지 않은 길에는 미련이 남는 법이다.


그 시절에 패기 넘쳤던 나는 그림이 잘 그려지던 말건 온라인으로 해외커뮤니티에 내 스케치를 올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좋아요' 혹은 칭찬으로 인정받는 것을 낙으로 삼았었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나의 생활에 총체적 시간을 다이어트하는데 최우선이 되었던 나의 드로잉은 얼마가지 못하고 대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도무지 실력이 느는 것 같지도 않고 혼자서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자니 내 자신이 한심해져서 스스로 미술도구들을 상자에 쳐박아버린 내 탓이기도 하다. 혹은 내가 성공한다면, 그냥 평범한 어른으로 자라서 왠만큼 밥벌이를 한다면, 하루종일 그림만 그려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자유가 있다고, 먼저 성공하고나서, 자유를 쟁취하고 나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일단은 먼저 다른사람들에게, 혹은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다. 인정을 받고 싶었다. 정말로 그랬다. 일에 순위를 매겨주는 행동이 얼마나 무거운 결정이었는지 알지도 못한채, 그렇게 쉽게 놓았다. 나는 그저 머릿 속에 있는 감정들을 표현해내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내 행복이었는데, 예술은, 행복은, 비싸기만 했다.


나는 아직도 내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아, 그 상무님이요? 저도 잘 알죠. 얼마나 유명했었는데."


"요즘 국내 시장에 물건이 그렇게 없어요. 이제 해외로 밥그릇을 돌려야 하는데 일거리는 없고 사람만 늘어나니 업계의 미래가 안좋아."


"그걸 그렇게 구시대적으로 처리하는 사람이 요즘 어딨어요? 내가 아는 감사님이 예전에 한번 그걸로 엄청 태클걸었었어. 요즘은 국제기준에 맞춰야 되는거 몰라요?"


오랜만에 만난 전회사의 선임 여자 차장은 자신의 오랜 커리어를 이야기하며, 그녀의 존재를 과시했다. 그녀가 정한 삶의 방식이고 행복이라면 충분히 존중해마땅하고 우러러보아야할 이야기들이었지만, 사실 그렇게 집중해서 듣지 않았다. 한마디로 '남의 이야기'라는 거다. 아마 그 테이블에 있었던 누구라도 그랬을 것 같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출세를 가슴속 깊이 축하하며 행복을 기원할 수 없다. 더욱이 그게 생존에 있어서 중대한 회사라는 정글이라면 슬프게도 그게 진실이다. 어라,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남에게 하나라도 더 인정받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던 그 시간들이, 받았던 칭찬들이 전부 다 나처럼 속이 텅텅빈 인정이었단 말인가!


당신은 그저 열심히 벌기만 하면 되니까요.

 보통 초봉이 높은 직종일수록 끝은 치킨집 사장님이 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사용자는 노동자의 삶이라는 시간을 계약으로 사서 높은 급여로 영위하는 풍요로운 일상생활에 적응시켜나간다. 사용자는 노동자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비생산적이고 지루한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알맞은 조건으로 유혹시켜야 한다. 고용자에게 주어주는 일은 보통 노동자가 홀로 자본시장에 섰을 때, 자력으로 부를 창출할 수 없는 부수적인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루한 일을 맡기려면 어떤 다른 매력적인 요소로 이 노동자를 붙잡아두어야 하는 것이다. 매력적인 요소(높은 급여등)이 없다면, 노동자는 이곳에서 힘든일을 계속 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며 그때마다 사용자는 또다른 노동자를 찾아서 일을 가르쳐야하는 수고가 발생한다. 45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마시다가 어느날 갑자기 300원짜리 커피를 사 마실 수 있을까?냉정하게 보면 높은 곳을 잠시라도 경험했던 사람이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애초에 한번도 고품질을 따져본 적이 없었던 사람보다 몇배로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신용카드값이 점점 늘어가면서 신입사원시절 한달 100만원으로도 풍요로운 일상을 살았던 사람이 이제는 한달에 200, 300만원씩 카드값으로 지출한다는 이야기,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나? 우리는 보다 많이 소비할 수 있는 사람에게 능력자라고 하며, 고품질의 그것을 많이 가진 사람들의 행복을 부러워한다. 마치 모두가 나를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관심'에 배가 고파지는 것이다.  나는 나에 대한 이해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사용자에게 유혹당했다. 소비에 점점 중독되어 소비로써 삶의 만족을 채우는 쳇바퀴 안에 내가 있다.


 회사의 발전을 위해 머릿속에 수많은 지식을 단순하게 채워넣은들, 회사를 위해 뛰어줄 더 젊고 패기있는 누군가는 항상 존재하며, 회사도 이런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국 회사를 위하는 시간동안 내 자신을 만들어갈 시간은 충분히 갖지도 못한채 아무것도 모르는 어른아이같은 상태로 세상에 내버려질 수도 있다. 질투라기보다는 그 차장님의 발언으로 인해 당연하지만 잊고 있었던 사실을 직감하게 되어 집으로 오는 길 내내 슬펐다. 그녀와 나의 삶이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무겁게 내 기분을 짓눌렀다. 나는 아직 그런 시기가 오기까지 한없이 먼 갓 신입상표를 뗀 꼬맹이지만 더 이상 남을 보여주기 위한, 인정받기 위한  인생을 사는 것을 관두고 싶다.


디지털시대의 노예는 어디로 가야하나요?


보여주기 위한 삶의 졸업(일까?)


 동물이 본능적으로 먹이를 갈구하는 것처럼, 사람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의 관심, 사랑을 갈구한다. 사치품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존재를 입증받은들, 표면상으로는 잠깐의 보람을 느낄지라도 결국은 모두들 똑같이 삶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이다. 사치품을 가진 사람도, 갖지 못한 사람도 전혀 다르지 않다. 사치품을 가진 사람이 조금 더 삶에 있어서 풍요롭고 편한들, 다른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정말 있는 그대로 축하해줄까? 있는 그대로 축복하며 존재를 입증해줄까? 사람들은 왜 SNS에 자신의 행복의 단편을 업로드하는 일부 셀러브리티의 화려한 삶에 대해서 태클을 거는걸까?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이 그런 행위를 하면서 사실상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상처를 주거나 피해를 준 것은 없다.


 사치품을 과시하는 사람이 가장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짐작해보건데 '나는 너희와는 달라.' 혹은 '나를 좀 주목해줘. 나를, 나의 인생을 부러워하고 사랑해줘.' 다. 만약 행복을 기록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면, 뻔히 일어날 사람들의 관심을 피해 개인적인 공간에 기록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SNS의 최전선은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행복을 나누고자 '알리는 것'에 목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잠깐의 이슈로 인한 관심은 절대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과시'는 유치하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여자들은 소개팅 자리에서 스포츠카로 무장한 남자들의 허세를 싫어한다.(물론 예외는 언제나 있다.)


 그래서 나는 죽어서 세상을 마무리 짓는 그 날까지 회사를 다닐 것이 아니라면 어차피 준비해야 하는 것들을 조금만 빨리 시작하기로 했다. 사치품을 사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고, 먹고 입고 사는 것에 대한 과시가 아니라 나의 '창조'로 다른 사람들의 '진짜' 관심을 얻어서 그 관심으로 행복하고 싶다. 아, 방식이야 어쨌든 결국 보여주기 위한 삶이지만 자기 만족을 충만하게 하는 연습은 어쨌거나 필요하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월급을 아껴본다. 아, 이런 그런데 아껴볼 월급조차 안남았다. 우리 회사의 사용자가 나한테 딴 생각하지말라고 충분한 유혹이라도 좀 해줬음 싶다. 풋.

항상 나를 가로막는 나에게 - 알프레드 아들러
매거진의 이전글 시스템 속의 아주 작은 개인으로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