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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미 May 23. 2019

어느 날의 일기 1

11월 20일, 2016

집 앞에 앉아서 다닥다닥 붙은 달동네의 불켜진 창가를 보다가, 문득 내일이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지 모른다며 멈춰둔 마음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깨달았다. 살아지는 것도 살아가는 거라며 우울을 끊임없이 외면하는 일이 왜일까 참 익숙하다. 사실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한다. 지나며 누군가를 한 번이라도 마주치듯 끝까지 외면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이리라. 누구나 마음을 참고 살 수야 있지만 누구나 괜찮기만 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슬프고 우울할 때, 뱉고 싶은 말을 입끝에서 들숨으로 삼킬 때, 공백이 많은 대화를 나눌 때, 어색하지는 않아도 참 익숙해지지가 않더라. 마음을 참고 들여다보고 낮게 간직하는 일이 많아 나는 보통 듣는 편이다. 무난한 법이 많은 나의 생을 부끄러워하며 가만히. 때로는 조용히 듣기만 하지만, 때로는 무언가를 해줘야 할 때도 있다. 그런 마음을 나에게 내어주는 것이 참 고마우면서도 그게 고맙다고 말하긴 또 힘든 일인 것 같다.


사회를 바꾸는 일이 시스템을 바꾸는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건 운동은 결국에는 사람을 돌보기 위한 일이라는 것이다. 사회가 변화해도 사람이 변화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무너진다. 과학이 변화하는 건 사람이 변화하기 때문인 것 아닌가. 과학은 모든 사람이 온전하게 인간다움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지, 다시 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의 몫이 있듯 나의 몫이 있다는 것. 관계가 변화할 때 우리가 때로 다른 존재가 되는 경험, 그 순간에서 우리는 이제 막 심연을 건너려는 사랑을 보아야 한다.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돌봄의 모든 것은 아니겠지만, 누군가 나에게 기대어 울 수 없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다. 때로는 어떤 목적 같은 게 아니라 그저 존재가 필요한 것이기도 하니까. 언젠가 터트려질 마음을 받아내기 위해 조마조마하면서도 곁을 지켜주고 말을 터주는 사람이고 싶다. 동지라는 말로 모든 걸 설명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가장 힘든 일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받아안는 일이다. 단단한 피부를 여린 말로 깨어내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 중에서도 어렵고 지난한 것이다. 하지만 이 불완전함이야말로 우리에게 길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때로는 밀어내는 힘으로, 또 때로는 끌어당기는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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