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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미 May 23. 2019

어느 날의 일기 4

11월 13일, 2015

비가 밉게도 온다. 


말할 수 없는 무엇이 징그럽도록 자기 생을 내보이면 이미 언어는 존재를 얼버무릴 수 없게 된다. 얼마만치 비를 맞아도 잠깐 젖은 옷은 또 잠깐 말리면 그만이었다.


우연하게도 어제는 오래도록 불을 지폈다. 45년 전 오늘, 한 노동자가 자기 몸에 불을 댕겼다. 다 타서 숯이 되어가는 장작을 함께 지켜보던 친구는 사람이 분신해도 구호만 외치지 않으면 살 순 있다고 했다. 기도로 화염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숨이 속을 태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몸에 불을 댕긴 그 어떤 사람도 구호를 외치지 않은 일은 없다고 했다. 수많은 동지들이 자기 몸에 불을 지폈고, 또 그 동지들의 동지들은 불이 되어 말을 떠나가는 이들을 지켜봐야만 했다. 자기가 숯이 될 줄 몰랐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텐데도 꼭 그랬었다고 한다. 


드럼통 위로 작은 불꽃이 자꾸 튀었다. 재가 온 곳에 날렸다. 


언젠가부터 말을 포기하고 산다. 말로는 뭐든 이루어질 것 같았지만 자꾸 사람들이 죽었다. 반 백 년 동안 사람들은 함께 살자는 똑같은 이야기만 했는데 자꾸 사람들이 죽었다. 죽은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자꾸 산 사람들이 와서 섰다. 잊지 않겠다고 구태여 말해야 하는 사람들이 오늘 같이 비 오는 날 광화문에 있었다.  


이 정부의 담화문이라는 걸 읽었다. 사람이 자꾸 죽어야 하는 세상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십 몇 만이라는데 이들은 국민이 아니란다. 그것이 국가이든 무엇이든 일단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껏 쳐내고 밀어내려고 한다. 가진 것이 목숨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 공중으로 바닥으로 보내야겠단다. 사람들이 스스로 사람이길 포기할 때까지. 


땅은 젖어 있다.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발 밑에서 땅으로 옮겨간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언제나 지저분한 흔적들이 남았다. 역사는 또 다른 오류로부터 오늘로 이어질 것이다. 언젠가 한 사람이 자기 몫의 재 한 줌을 남기면 다른 한 사람이 이제 없는 재를 쥐며 발로 흙을 비벼 왔다. 


다시 내일을 돌아볼 때 부끄럽지도 서럽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죽은 사람에 기대어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말을 이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단단하게 마른 아스팔트 찬 바닥에 내 신발에서 떨어진 몇 먼지가 내가 살아간 흔적이었으면 좋겠다. 


비가 그만 그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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