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환 시대 대한민국의 국가 목표: 국가주의를 넘어 인간중심주의로의 모색
현대 세계는 국민국가(nation-state) 시대의 패러다임이 그 한계에 부딪히고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대전환기’에 직면해 있다. 서울대학교 정영록 명예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전환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총체적 변화이며, 각국은 표류하는 목적함수 속에서 새로운 국가 책략을 모색하고 있다. 근현대를 지배해 온 부국강병과 산업화를 통한 생활 안정이라는 시대정신은 이미 상당 부분 완결되었거나 그 의미가 퇴색되었으며, 미국(MAGA), 중국(인류운명공동체) 등 강대국들조차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국가주의의 연장선상에서 활로를 찾고 있다.
이러한 전 지구적 혼란은 대한민국에 중대한 위기이자 동시에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래 100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로 작용한다. 본고는 정영록 교수의 문건을 토대로, 현재의 국제 정세를 진단하고 대한민국이 당면한 복합적 과제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나아가, 과거의 국가주의적 목표를 지양하고 '인간중심주의'와 '주민행복'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국가의 핵심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과제와 지식인의 역할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대전환기의 현 상황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복합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첫째, 정치적으로는 ‘역사의 종말’ 이후 제국의 부활을 연상시키는 강대국 중심의 패권 경쟁이 재현되고 있으며, 민주주의의 위기와 함께 권위주의적 통치 형태가 출현하는 등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이는 미·중 쟁패를 필두로 한 국가 빼가기, 즉 동맹 강화를 통한 편 가르기 현상으로 구체화된다. 미국은 한·미·일 동맹과 인도를 축으로 유럽을 포섭하려 하며, 중국은 일대일로와 브릭스(BRICS) 등을 통해 중화 및 이슬람 문화권과의 결속을 다지고 있다. 이는 결국 새뮤얼 헌팅턴이 예견했던 ‘문명의 충돌’이 문화권의 재등장이라는 형태로 재현되는 양상이다.
둘째, 경제적으로는 전통적 산업화 시대가 완결되고 선진국을 중심으로 ‘풍요의 사회’에 도달했다. 생필품 가격이 안정되고 물질적 결핍이 상당 부분 해소되었으나, 이는 역설적으로 기존의 성장 모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산업화 시대의 공급과잉은 과거 제국주의의 배경이 되었듯, 새로운 갈등의 요인이 될 수 있으며, 전 세계적인 고령화 추세는 경제의 활력을 저하하는 구조적 제약으로 작용한다.
셋째, 사회적으로는 국가-사회-개인의 관계 재구성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특히 국가 권력의 대리인으로서 기능해 온 관료제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요구된다. 미국의 랜드 폴 상원의원이 저서 『Government Bullies』에서 지적했듯, 관료 집단은 '안전'을 명분으로 국민의 자유와 재산권을 제약하는 신지배계급으로 군림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안보경제론’과 같이 안보를 빌미로 국가 편 가르기를 정당화하는 논리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할 대상이다.
이러한 변화의 기저에는 기술, 제도, 문화라는 핵심 동인이 작용하고 있다. 기술은 디지털 전환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공개화 추세를 보이며 특정 국가의 독점을 어렵게 만들고 있고,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은 보편적 제도로 자리 잡았다. 결국 현시대의 갈등과 재편은 각 문화권이 자신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질서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혼란이 국민국가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신호이며, 과거의 연장선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글로벌 대전환의 파고는 대한민국에 더욱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첫째, 인당 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선 시점에서 0~3%대의 저성장은 선진국 진입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으나, 이를 극복할 새로운 성장 동력 부재는 심각한 문제다. 둘째, 세계적인 편 가르기 구도 속에서 국내적으로 낡은 이념 분쟁이 재현되고 있으며, 이는 경제통상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존립 기반을 위협하는 치명적 요소로 작용한다.
내부적으로는 더욱 심각한 구조적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빈부 격차와 세대 단절은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고질적 병폐이며, 특히 초고령화 사회로의 진입과 인구 절벽 현상은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위협한다. 이는 단순히 인구 감소의 문제를 넘어 과잉 도시화로 인한 지방 소멸, 가족 부양 부담의 증가 등 다층적인 위기를 야기한다. 또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어른’의 역할이 부재하고,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 간의 경험적 단절과 이념적 편향성은 세대 갈등을 심화시킨다.
정치 시스템의 기능 부전은 이러한 위기를 더욱 악화시킨다. 정당은 시대정신을 담아내지 못한 채 특정 세력의 사당(私黨)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관료화된 채 국민의 신뢰를 잃고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586세대로 대표되는 정치 엘리트 그룹은 국제 정세에 대한 편향된 인식과 조직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인구 구조 변화, 산업 전환, 빈부 격차와 같은 새로운 시대적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은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었던 ‘모방’과 ‘추격’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식민지와 전쟁, 저개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압축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인문사회 학설에서부터 경제 정책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더 이상 모방할 모범 답안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는 우리에게 식민, 분단, 저개발의 역사적 상처를 극복하고 ‘제2의 독립’이라 할 만한 진정한 국가 정체성을 확립할 것을 요구한다. 현재의 대혼란기를 패배주의적으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한국적 발전 모델’을 창출할 절호의 기회로 삼는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역사의 변곡점에서 부국강병의 국가주의를 넘어 인간 행복을 중심에 두는 새로운 국가 모델을 창조해야 할 소명을 안고 있다. 이러한 전환의 철학적 뿌리는 의외로 서구의 고전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공존의 지혜'를 찾을 수 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각 계층이 자신의 덕(德)을 발휘하여 조화를 이루는 정의로운 공동체를 이상으로 제시했다. 통치자는 사적 이익이 아닌 공동선을 위해 지혜를 발휘하는 ‘철인(哲人)’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권력의 시녀가 되기를 거부하고, 시대정신을 제시하며 국가의 백년대계를 설계해야 한다는 본문의 ‘지식인 역할론’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초고령사회에서 요구되는 ‘돌봄의 가치’ 역시 플라톤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돌봄은 단순히 약자를 시혜적으로 돕는 행위가 아니라,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각자의 역할을 다하여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는 ‘정의’의 실현 과정 그 자체이다. 강자와 약자, 생산 세대와 은퇴 세대가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며 유기적으로 결합할 때 국가는 비로소 정의로워지며, 이것이 바로 플라톤적 공존의 지혜이다.
한편, 아담 스미스의 철학은 우리에게 또 다른 차원의 통찰을 제공한다. 우리는 흔히 그를 『국부론』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만 기억하며, 개인의 이기심이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이라 이해한다. 대한민국의 압축성장 또한 이러한 시장 원리의 성공적 적용에 빚지고 있다. 그러나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sympathy)하고 이를 통해 도덕과 사회 질서를 형성하는 존재임을 먼저 설파했다. 초고령사회 진입과 심화되는 빈부 격차는 ‘보이지 않는 손’만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이제 우리는 스미스의 두 번째 얼굴, 즉 ‘상호 공감’의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 ‘돌봄’은 이기심의 산물이 아니라 공감 능력의 최고 발현이며, 시장 논리만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공동체의 핵심 자산이다. 효율적인 시장과 따뜻한 공감 능력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사회가 가능하다. 이것이 스미스가 가르쳐 준 공존의 지혜이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은 플라톤적 ‘공동선’을 추구하는 지성인들의 헌신과, 아담 스미스적 ‘상호 공감’에 기반한 시민 사회의 성숙을 통해 열릴 수 있다. 국가주의의 낡은 옷을 벗고 인간 중심주의라는 새 옷을 입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서로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고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지혜’를 체득하는 과정이다. 지금의 위기를 이 위대한 전환의 기회로 삼아, 인간의 존엄과 행복이 최우선 가치가 되는 새로운 국가 모델을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이다.
(본고는 한양대학교 수요세미나 서울대 정영록교수님의 발제를 참조하여 작성을 하였습니다. 깊은 통찰을 제시해주신 정용록교수님과 수요세미나를 이끄시는 한양대 김종걸교수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