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주도의 국제질서 재편:파괴적 혁신과 지정학적 격변

2025 이천포럼에서

by 장진호 Bearpd

미국 주도로 재편되는 국제 질서와 인공지능(AI)이 촉발하는 파괴적 혁신은 현대 기업 환경의 근간을 뒤흔드는 거대한 두 축이다. 미중 패권 경쟁과 지정학적 갈등이 심화되며 기존의 글로벌 경제 패러다임이 전면적으로 수정되고 있으며, 동시에 AI는 산업의 경계를 허물고 기존의 성공 방정식을 무력화하고 있다. 이러한 복합 위기의 시대 속에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점진적 쇠락을 의미하는 '슬로우 데스(Slow Death)'가 아닌, 갑작스러운 소멸을 뜻하는 '서든 데스(Sudden Death)'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경고는 더 이상 과장이 아니다. 본고는 이러한 시대적 화두를 중심으로,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한국 기업이 생존을 넘어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전략적 해법을 고찰하고자 한다.


변화의 본질과 SK하이닉스의 생존 서사

변화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생존의 필수 조건이 되었다. 특히 AI가 주도하는 현재의 혁신은 과거 아이폰의 등장이나 클라우드 컴퓨팅의 확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파급력을 지닌 '파괴적 혁신'의 성격을 띤다. 제약, 의료, 금융, 모빌리티 등 전 산업 영역에서 AI는 인간의 역할을 대체하거나 보완하며 생산성의 한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는 것은 곧 도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오히려 기회로 전환한 대표적인 사례로 SK하이닉스를 들 수 있다. 불과 20여 년 전, 전기료를 아끼기 위해 형광등을 빼고, 경비 절감을 위해 구내식당 반찬 수를 줄여야 했던 극심한 경영난을 겪었던 회사는 이제 '만년 2위'라는 꼬리표를 떼고 40년 만에 업계 1위 거인을 넘어서는 기적을 이루었다. 이러한 상전벽해의 중심에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얻은 집요함과 치열함, 그리고 미래를 내다본 기술에 대한 전략적 투자가 있었다.

특히 AI 시대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 메모리(HBM) 개발사는 SK하이닉스의 저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13년 세계 최초로 HBM을 선보였으나 높은 가격과 제한된 시장성으로 인해 사업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경쟁사의 추격 속에서 기술적 난제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SK하이닉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칩을 쌓을 때 발생하는 발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부서가 머리를 맞대고, 금속 기둥 추가, 압착 방식 변경, 액체 주입 방식 개발 등 다양한 시도를 거듭했다. 이러한 '원팀(One Team)' 정신과 실패를 자산으로 삼는 처절한 노력이 있었기에 HBM 신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의 근간에는 인간의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을 추구하는 SK그룹의 경영철학, 'SUPEX(Super Excellent Level)' 정신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려움 속에서도 끝없는 의지와 노력으로 실천해 나갈 때 비로소 길이 열린다는 '지불자유(知弗由)'의 가치를 증명한 것이다.


미중 패권 경쟁과 한국의 전략적 선택

기업 내부의 혁신 노력과 더불어, 외부 환경인 국제 질서의 재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대응이 필수적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은 기존 동맹 관계와 국제 무역 질서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미국은 과거 동맹국에 공공재를 제공하며 장기적 이익을 추구하던 '확산적 호혜주의'에서 벗어나, 모든 협력 관계에서 구체적인 대가를 요구하는 '거래주의(Transactionalism)'로 선회했다. 무역 적자를 자국에 대한 기만으로 간주하고, 동맹국에게도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등 예측 불가능한 전술을 구사하며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 변화는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바이든 행정부를 거쳐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도 미중 경쟁 구도는 지속 혹은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중국의 기술 굴기를 저지하기 위해 반도체 등 핵심 기술에 대한 수출 통제를 강화하고 있으며, 자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에 맞서 중국은 핵심 광물 통제와 같은 '초크 포인트(Choke Point)'를 활용해 압력을 가하고, 기술 자립과 내수 시장 중심의 경제 성장을 통해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는 다층적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미중의 격돌 속에서 한국은 더 이상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전통적인 틀에 기댄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양국 모두 동맹국들에게 명확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으며, 우리의 선택 공간은 점차 좁아지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전략과 정책의 분리, 즉 미국 중심의 안보 전략이라는 큰 틀을 유지하되, 개별 정책에 있어서는 국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유연성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다. 미중 경쟁을 단순히 위협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재편되는 질서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위기 속 기회와 한국 기업의 대응 전략

미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은 한국 기업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이어 트럼프 행정부 역시 자국 제조업 부활을 강력히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한국은 2023년 기준 미국의 투자 유치 건수 및 고용 창출 1위 국가로, 자동차, 이차전지, 반도체 등 핵심 산업에서 선제적으로 현지 생산 체제를 구축하며 기회를 선점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조선, 원자력 등 약화된 제조 기반을 한국의 기술력과 경험으로 보완하는 협력 모델은 양국 모두에게 큰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분야다.

또한, 안보 및 경제 리스크를 공유하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과거사 문제에서 벗어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상호 호감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양국은 핵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해야 하는 안보 공동체이자, 상호 보완적인 경제 구조를 가진 경제 공동체로서 협력의 잠재력이 크다.

물론, 이러한 기회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기업 차원의 과감한 체질 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 현재는 비주력 사업 및 한계 사업을 정리하고 핵심 사업에 자원을 집중하는 포트폴리오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이다. 이는 단순히 실적이 부진한 사업을 매각하는 수준을 넘어,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창출하더라도 미래 성장성이 불투명한 사업을 과감히 포기하고 AI와 같은 미래 산업에 집중하는 결단을 의미한다. SK그룹이 추진하고 있는 포트폴리오 리밸런싱과 운영 효율화(Operational Improvement)는 이러한 변화의 좋은 예이다. AI 시대에 요구되는 천문학적인 투자 규모를 감안할 때, 선택과 집중을 통해 확보한 자원을 핵심 전략 실행에 투입하고, 개방형 혁신을 통해 외부 역량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 될 것이다.


변화를 주도하는 능동적 자세를 향하여

지금 우리는 지정학적 쓰나미와 AI라는 기술 혁명이 동시에 밀려오는 거대한 변화의 변곡점에 서 있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강한 종이나 똑똑한 종이 아닌,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다고 역설했듯, 오늘날 기업의 생존 역시 변화에 대한 적응력에 달려있다.

SK하이닉스가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위기를 혁신의 동력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우리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고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나 전략적 모호성에 기댈 수 없다. 다가올 미래를 명확히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변화의 파고는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내면에 잠재된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혁신 정신과 위기 극복의 경험을 바탕으로, 변화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파도를 헤쳐나가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지혜와 용기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2025년 8월 18일 SK에서 주최하는 이천포럼의 [Opening Speech] & [Keynote]를 참고하여 정리하였습니다. 주요 연사로는 Victor Cha, Jing Qian, 김현욱, 박석중, 윤치원, 김유석 등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