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어릴 때 예민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9살 된 아들이 나처럼 예민하다. 내가 원인이 되었고, 아들은 결과가 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다. 이것 말고도 아들에게서 나와 비슷한 점을 많이 보게 된다. 닮지 않았으면 했던 것도 나의 바람과 상관없이 쏙 빼닮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예민함은 닮지 않기를 바랐지만, 아들은 민감한 감각을 지닌 아이로 태어났다. 비록 원하지 않은 예민함이지만, 아들이 그것을 잘 가다듬어 세상을 더 섬세하게 느끼며 살기를 바랄 뿐이다. 다만, 예민함을 다듬어가는 과정이 힘든 것을 알기에 걱정된다.
그래서 아이는 평소에 입이 짧다는 소리를 듣는다. 입이 짧다니... 그 표현이 참신하다. 어릴 적 이와 똑같은 말을 했던 나의 엄마가 떠오른다. 밥투정을 하는 아이를 보면, 내 엄마에 빙의되어 약간의 불편함도 감수하지 못하는 아들이 못마땅해 다그칠 때도 있다. 그 즉시 후회가 밀려온다. 예민하게 느껴지는 것이지 예민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주 잊는다.
손 끝의 감각이 아주 예민한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일도 있다. 아이는 잘 때 베고 자는 베개에 붙은 보풀을 늘 손끝으로 만지며 잔다. 아이 말로는 '작은 공'처럼 만들어서 손 끝에 대고 굴린다고 한다. 하루는 자려다 말고 애가 울고 있어 이유를 묻자, 자기의 보풀이 없어졌다 말했다. 내 귀를 의심했다. 아이에게 보풀은 최소한 만화 속 캐릭터쯤 되나 보다. 보잘것없는 보풀에 정이 들었던 듯했다. 다른 보풀들이 잔뜩 붙어있는 오래된 천을 갖다 줘서 겨우 진정시켰다.
아들은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삐진다. 어쩔 때는 몇 번 정도 삐지는지 세어보다가 횟수가 너무 많아 무의미하다 생각하여 그만두었던 적도 있다. 엄마 아빠가 하는 무의미한(?) 말과 행동에도 기발하게 기분 나빠할 이유를 찾아내고 서운함을 토로한다. 그러다가도 장난감에 푹 빠져 자신이 삐진 것을 금세 잊기도 한다. 나도 어릴 적 그랬던 것 같은데, 언제쯤 덜 삐지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아이가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 것을 보아 덜 삐지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희망을 가져 본다.
예민한 두 남자와 사는 아내는 조금 둔감한 편이다. 나의 예민함을 알아 채지 못했듯이 예민한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가끔 한다. "누굴 닮아서 저런 거야"라고 말할 때가 있다. 속으로 뜨끔하다. 아이의 예민함이 나에게서 비롯된 것을 모르는 눈치이기에 자연스럽게 "그러게 말이야"라고 말하고 넘어간다. 그런 아이를 진짜 이해하고 싶다는 표정을 지을 때는 내가 가끔 중간에서 통역을 하기도 한다.
예민한 남자는 남자답지 못하다고 예전에 생각했었다. 어릴 때는 그나마 괜찮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감춰야 하는 나의 약점 같은 것이라고. 늘 남에게 들킬까 마음 졸였었다. 나의 친구들과 아내는 내가 어느 정도로 예민한지는 모른다. 그런 내가 그나마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는 것은 나의 노력과 운이 서로 콜라보를 이뤘기 때문이다. 일단 운 좋게 자극이 덜한 환경에서 자랐고, 늘 친구들과 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의 예민함은 꽁꽁 숨겨도 송곳처럼 뚫고 나오곤 한다. 사소한 자극에도 내 마음이 여러 감정들로 출렁거릴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파도 위에 올라탄 서퍼처럼 감정의 출렁거림을 오롯이 느낄 뿐이다. 내 감정뿐만 아니라, 남의 감정에도 가끔 크게 동요한다. 그럴 때는 애써 둔감한 척했다. 그리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기보다는 살짝 거리를 두거나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를 대한다. 어떤 때는 내가 그것에 너무 능숙해서였는지 상대로부터 무심하다는 말도 듣는다.
감정적인 예민함은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 줄일 수 있지만, 민감하게 타고난 감각기관은 생활에 불편함을 줄 때가 있다. 특히 나는 소리에 민감하다. 그리고 이어폰을 사용할 때는 귀에 닿는 감촉에도 민감하다. 어찌 되었든 나는 예민함을 나름 잘 다스려 '섬세한' 어른이 되었다. 소리에 민감했던 나는 소리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었고, 세상이 조용해지도록 내 신경을 거스르는 소음을 없애는 일을 하고 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그렇겠지만 예민한 사람에게 특히 배우자가 중요하다. 나는 아내의 둔감함이 좋다. 나의 예민함이 줄어들기를 원했던 것이 상대에게 호감을 느낀 이유였던 것 같다. 살면서 느낀 것이지만 예민한 남자와 둔감한 여자는 잘 맞는 것 같다. 아무리 둔감하다 해도 여자가 지닌 섬세함의 기본 값 때문이다. 아내의 기본적 섬세함이 나의 약간 줄어든 예민함과 딱 맞다. 만약에 반대로 예민한 아내와 둔감한 나였으면 무정한 남편으로 보였을 것도 같다. 그럴 바에야 오히려 예민한 여자와 예민한 남자가 나은 조합 인지도 모르겠다.
대화를 주고받을 때도 서로 잘 맞는다. 아내는 돌려서 말하는 적이 없다. 의미와 말이 일치하여 그 밖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애써 다른 의미를 찾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집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주고받는 말들은 그 말에 다른 의미가 있을 때가 많다. 매너라는 이름으로 덧붙여진 껍데기를 벗기어 속 뜻을 곱씹어야 할 때가 있다. 나의 섬세함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더 깊숙이 숨겨진 의미까지 찾으려 할 때가 있어 나를 지치게 한다. 적어도 집에서는 그런 수고로움을 겪지 않아도 된다.
아내는 나에게 충분한 휴식을 보장해 준다. 예민함을 무디게 하는 것에는 쉬는 것만 한 것이 없다. 민감한 감각과 불안정한 감정은 제대로 쉬지 못했을 때, 스트레스와 합쳐져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 결혼 전에 데이트를 할 때도 그랬다. 같이 놀고 집에 돌아 가면, 나를 찾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피곤함이 다 없어질 만큼 푹 쉴 수 있었다.
내가 예민함에 대해 고민했을 때, 크게 도움 되는 방법이 딱히 없었다. 내가 그랬듯이 예민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섬세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딱 하나 위안이 되었던 것은 나와 비슷한 사람이 세상에 많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