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나의 감정조절법
2010년대 이후 태어난 아이들의 기대 수명은 150살 정도라고 한다. 머지않아 미래에는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신의 권능을 누리게 될지 모른다. 불사의 인간에게 ‘생존 도구’로 고안된 감정은 용도를 다했으니 폐기될 운명이 되는 것일까?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격한 감정의 파도가 몰아친다. 마치 파도 위에 서핑을 하는 것 같이 감정에 따라 출렁거린다. 이렇게 감정을 느낄 때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오롯이 느낀다. 때로는 감정이 증폭되어 압도당하는 경우도 있다.
감정 존중 시대에 살고 있지만 가끔 이것이 거추장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극한으로 보내보자..
lim(감정) = ?
수명->oo (무한대)
2016년 tvN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에서 불멸의 삶은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죽어 이별하는 고통을 낳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죽지 않는 도깨비와 유한한 삶을 사는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필연적인 상황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불멸의 삶을 산다면, 누군가 먼저 죽어 헤어지는 고통은 없어진다. 대신 삶이 의미 있냐 없냐만이 논의의 대상이 된다.
출처: tvN
삶이 의미 있다고 여기는 이유는 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말은 짧은 인생을 사는 무기력한 인간을 위로하기 위한 ‘정신 승리’가 아닐까-라는 냉소적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유한한 삶이 왜 의미를 만드는지는 ‘공포 관리 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에 의해 설득력을 갖는다. 이론에 따르면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람이 살려고 ‘악착같이’ 노력하여 삶의 의미가 발생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죽지 않을 경우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 않으므로 삶은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 마땅하다. 영원한 삶이 주는 무의미한 방치는 지루함이라는 감정과 닿아있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뒤 따른다.
다른 모든 감정을 누르고 지루함이 지배할까?
감정의 뿌리는 우리의 생존 본능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생존에 유리한 자극은 ‘쾌’이고 불리한 자극은 ‘불쾌’라는 기본 감정에서 수많은 감정들로 나뉘었다고 한다. 감정이라는 형태로 생존과 관련된 자극에 반응하는 이유는 위협에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한 진화의 결과이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긴 세월을 거치며 생존과 별개로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인식하지만, 뇌는 여전히 감정을 유발하는 자극을 죽고 사는 문제로 받아들인다.
감정의 기능과 근원에 비춰보았을 때, 영원히 살아 생존의 위협이 없어지면 감정은 없어져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뱃속에 기능을 다한 맹장이 남아있듯이 한동안 감정이 쓰임이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결국 없어질 것 같다. 우리가 느끼는 행복과 즐거움이라는 감정도 예외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유쾌한 감정들도 생존에 유리한 자극을 보상하기 위해 비롯된 것이니 말이다.
감정이 없어진 세상은 사건만 나열된 건조하고 차가운 곳일 것이다. 하지만, 괴로운 감정도 없어지니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불멸의 신들만 사는 세상은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는 ‘무’와 같은 상태일까?
lim(감정) = 무감정
수명->oo (불멸)
결론: 감정 = 생존욕구
괴로운 감정은 나의 생존을 걱정하는 뇌의 메시지다. 그런 이유로 ‘나는 살아 있다’라고 뇌를 안심시키면 괴로운 감정을 줄일 수 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오늘도 살았다!’라고 외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있는 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