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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심 Sep 07. 2022

난생처음 드라마 대본을 읽어봤다

하지 않던 짓을 하는 산뜻함


평소 안 하던 것을 시도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다니지 않던 길. 잘 먹지 않던 음식. 뭔 바람이 불었는지 이번에는 드라마 대본을 읽어봤다.



어느 날 아내가 서점에 있다며 혹시 사고 싶은 책이 있냐고 전화로 묻길래. 잠시 망설이다가,

'드라마 대본집 사 올래?'

말한 나도 움찔, 아내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늘 이용하던 인터넷 서점이었다면 평소 취향에 맞게 책을 주문했을 터이지만, 갑자스런 질문에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얼마 전, 봤던 드라마를 다시 보다가, 어떻게 글을 썼길래 저런 걸작이 나올까?-궁금했다. 대본을 잘 쓴 걸까? 연출이 좋았던 걸까? 배우들의 연기가 찰졌던 걸까? 드라마를 요리로 치면 대본은 레시피니, 일단 레시피가 보고 싶어 졌다. 아내의 돌발 질문에 나의 호기심이 툭하고 튀어나왔던 가보다.



두꺼운 책 두 권에 압도되었다. 여러 날 집에서 묵힌 뒤에 한가한 날 대본집을 펼쳤다.

뒷 커버에 작가가 남긴 문구도 인상적이다.
잘 쓰려고 하면 영점 조준이 잘못된 것이다.
인물을 아끼고 사랑하자. 사랑이 다 한다.

요란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근원에 깊게 뿌리 닿아 있는 사람들. 그런 맑은 사람들에게 감동하고 싶다.
원래 인간이란 ‘이런 물건’이었다는 듯,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인간의 매력’을 보여주는…




이미 본 드라마의 대본을 읽는 즐거움



1. 인상적인 장면이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글자가 큐가 되어 장면들이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랐다. 기분이 묘했다. 배우의 얼굴, 장면과 소리가 예상보다 더 뚜렷이 기억났다. 나머지 잊은 부분은 상상으로 채웠다.


같은 글이지만 소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김영하 작가는 소설을 읽는 이유로 독자가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과 등장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따라가는  등을 꼽았다. 대본 읽기는 나의 기억력에 의존하니 소설 읽는 것과 같은 맛은 없다. 그렇지만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등장인물의 감정에  몰입되는 느낌이랄까. 아마도 TV 화면에 눈과 신경이 뺏기지 않아서였나 보다.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져 극장에 갔다가 나의 상상과 영화 속 장면이 너무 달라 실망한 적이 있다. 하지만 드라마와 대본은 완벽히 한 몸이었다.



2. 배속 조절 없이 나에게 맞춰 자동 조절된다.


TV 드라마를 2배속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감정 전달이 안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본은 2배속으로 읽어도 신기하게 감정선이 훼손되지 않았다. 60분짜리 한 회를 30분 만에 다 읽었다.


재미있는 장면은 조금 음미하며 0.8배속, 지루한 부분은 2배속.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알아서 배속이 맞춰지니 편했다. TV 화면처럼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조절하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 좋다.


인상적인 대사에 빠져 딴생각을 하더라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다. 소설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장면들 사이에 나의 생각과 감정이 곁들여져 스토리와 잘 버무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3. 배우와 연출자도 대단하다. 대본은 생각보다 간결하여 해석의 여지가 많아 보였다.


물론 작가들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읽은 대본은 지문이 굉장히 간략했다. 연출자와 배우가 자신만의 해석을 곁들일 여지가 많아 보였다. 의도적으로 작가가 배려한 것일까? 약간 건조하게 쓰인 대사를 촉촉한 감정으로 연기하는 배우에게 감탄하게 되었다. 배우는 그냥 대본에 쓰인 대로 연기를 하는 게 아니었구나.



요즘 드라마 대본과 영화 각본의 인기가 많다고 한다. 대본집을 구입하는 이유로 사람들이 ‘소장가치’를 꼽았다고 한다.

출처: https://www.joongang.co.kr/amparticle/25092403




이번 대본 읽기는 소장보다는 호기심이었다. 평소에 기회가 많았는데, 이제야 대본 읽기를 해보다니 새삼 놀랍다. 예상치 못하게 ‘트렌디한 사람’이 되었다. 해보지 않은 것을 하며 나를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대본집을 펴낸 작가의 글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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