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를 달리 보기 시작한 건 집을 나온 후부터다. 그전까진 집 안에서든 집 밖에서든 차려진 밥상 앞에 앉아 고기가 있으면 맛있게 먹고 고기가 없으면.. 없어도 군말 없이 먹지만 주방장(어쩌면 엄마)에게 섭섭한 마음(어쩌면 불만)을 조금 갖는, 고작 그 정도의 인간이었다. 당시 나의 음식 세계관은 이랬다.
1. 음식은 고기가 들어간 메인메뉴와 고기 이외의 서브메뉴(나물, 장아찌, 김치, 과일 등)로 나뉜다.
2. 서브메뉴는 메인메뉴의 맛을 돋우는 주변부 음식이다.
3. 고로 육류는 과채류보다 우월하다! (나는 밥상 위의 종 차별주의자였나?)
자취를 시작하고부터 나는 먹기만 하는 사람에서 장을 보는 사람, 요리를 하는 사람, 상을 차리는 사람으로 몇 단계 진화했다. 내 손으로 음식을 차리면 반찬 하나하나가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식당에서 별생각 없이 리필하는 장아찌 하나도 뚝딱 나오지 않는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 음식에 관여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중심(고기)과 주변부(고기 외 음식)의 경계는 점점 지워졌다. 어느 절에서 먹은, 채소와 나물만으로 차려진 사찰음식도 (허기가 반찬이긴 했지만) 아주 맛있었다. 그럼에도 고기와 비(非)고기의 관계가 완전 평등해지거나 역전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맛있는 채식도 좋지만 맛있는 육식이 조금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고기가 조금 더 맛있으니까. 내 미각은 그렇게 굳어졌으니까.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싶었는데, <고기로 태어나서 / 한승태>를 읽게 되었다.
<고기로 태어나서 / 한승태>는 독서모임에서 읽었다. 모임의 주제는 '목소리들'이었고 노인, 장애, 엄마, 동물 네 개의 키워드로 네 권의 책을 선정했다. "이번 북살롱 주제는 '목소리들'입니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고, 말해도 잘 듣지 않았던 목소리를 듣습니다."라고 시작하는 자못 진지한 모임 소개 글을 올렸다. 6명 정도의 사람이 모였다.
1주차 - 노인 :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 (최현숙, 글항아리)
2주차 - 엄마 :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 (정치하는엄마들, 생각의 힘)
3주차 - 장애 :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사계절)
4주차 - 동물 : 고기로 태어나서 (한승태, 시대의 창)
<고기로 태어나서>는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었다. 저자인 한승태는 서울을 떠날 핑곗거리를 찾다가 소개소장이 추천해 준 옥수수 농장과 양계장 중에 덜 지루할 것 같은 양계장에 취업한다. 양계장은 실제로 지루하지 않았지만, 한승태는 한 달을 못 채우고 도망쳐 나왔다.
"돈을 달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내가 원한 것은 악몽에나 나올 법한 그 닭들에게서 멀어지는 것뿐이었다." <고기로 태어나서 / 한승태>
충격을 받은 한승태는 서울로 돌아가다가 고기를 위해 길러지는 동물들이 어떻게 먹고 살고 있는지, 작정하고 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 이후로 금산, 정읍, 이천, 강경, 횡성, 포천, 그 외 미공개 지역에 있는 식용 동물 농장에서 일했고, 그렇게 돌아다니며 몸소 경험한 것들을 적었다. 농장에서 사육되는 돼지, 닭, 개의 삶은 처참했고, 처참한 현장을 목격한 한승태의 눈, 코, 귀도 처참해졌다. 책을 함께 읽은 우리들의 마음도 처참해졌다. 이 책을 보기 전에도 공장식 축산 시스템으로 인한 전염병, 살처분 등의 문제를 뉴스로 접하긴 했지만, 한승태가 현장을 클로즈업으로 찍은 듯한 글을 읽고 훨씬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모임원 J는 독후감에 이렇게 썼다.
"특히, 병에 걸려 (돈이 되지 않는) 자돈들이 어떻게 죽는 지가 내겐 너무 충격적이었는데, 그냥 바닥에 패대기쳐서 죽인다는 것이다. 그런 자돈의 얼굴은 온통 피범벅이 된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자돈은 분뇨장에서 버려져 배고픔과 추위에 허덕이다 목숨을 잃는다. 나는 그런 아기 돼지들의 모습들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져 괴로웠다."
J는 앞으로 돼지고기는 못 먹겠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후에 친구와 먹은 김치찌개에도 돼지고기가 들어있었다. 어느 저녁에 엄마가 목살을 구워줄 때는 별로 먹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저항했지만, 잠시 후에 부드러움과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J야, 가끔씩 고기는 먹어줘야 돼."
고기로 태어나서를 읽은 후에도 나는 고기를 먹었다. 그런데 고기를 볼 때마다 마음 한 쪽에서(어쩌면 위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건 아니지. 그래 이건 아닌데. 아무래도 아닌데. 내 안의 목소리가 반복해서 들릴수록 조금씩 변화가 있기도 했다. 채식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친구와 가끔씩 비건 식당에 가며 채소와 과일 위주의 음식과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러면서도 고기는 먹었다.
채식과 육식을 둘러싼 논쟁들도 관심 있게 찾아봤다. 채식을 했다가 건강을 잃었다는 사람의 이야기, 그 사람이 건강을 잃은 건 채식 때문이 아니라 편식 때문이라는 이야기, 1인분의 고기를 생산하려면 3인분의 곡물이 필요하기에 육식은 효율 면에서도 좋지 않다는 이야기, 단백질은 식물성으로 섭취할 수 있고 개인에게 맞는 채식 식단을 체계적으로 조절하면 대부분 괜찮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을 꽤 신뢰하면서도 고기는 계속 먹었다.
이후에 <사랑할까 먹을까 / 황윤>에서 소규모 농장의 돼지 가족 '십순이와 돈수'를 만나 정이 든 사람 가족 '황윤과 도영이'의 이야기를 읽었고, <아무튼 비건 / 김한민>에서는 동물의 극심한 고통을 보고 도 닦는 심정으로 비건이 된 김한민의 이야기를 읽었다. 디카프리오가 출연하는 환경 다큐 <비포더플러드>에서는 기후 변화의 큰 요인 중 하나로 '소'를 꼽았다. 소의 트름과 방귀가 지구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은 농담 같은 실화여서 놀랍다.
책과 영화를 볼 때마다 위기감과 처참함을 재확인한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3분 동안 데워 먹는 소고기 카레를 먹었다. 며칠 전에는 함께 잡지를 만드는 원주부가 데리고 간 마장동 축산물 시장 앞 식당에서 갈비탕도 먹었는걸. 아무래도 이따 저녁에는 채식 재료로 만든 고추장 비빔밥을 먹어야겠다. 최근 신간으로 <매일 한끼 비건 집밥 / 이윤서>란 책이 나왔던데 사봐야지. 그럼 내일은 뭘 먹을까. 육식을 만류하고 채식을 독려하는 마음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또, 고기를 먹게 될까.
채식과 육식의 경계에서 방황하고 모순된 생활을 이어가는 중에도, 목소리는 계속 들려온다. 이건 아닌데. 아무래도 아닌데. 귀를 막고 되는 대로 먹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무언가를 계속 찾아 읽고, 보게 되지 않을까. 비건을 선언한 김한민처럼 극적이진 않지만, 미세하게 달라지는 순간이 쌓이다 보면 고작 이정도 인간에서,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먹어야 나은 인간이 되는 걸까. 고기를 줄이고, 동물 복지 고기를 먹거나 비건이 되면 나은 인간인걸까. 아무래도 변화가 더딘 건, 고기로 안 태어났기 때문은 아닐까.
**이 글은 2020 마장도시재생 기획공모로 만들어진 <마장동 축산물 시장> 잡지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