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온 이후부터 여름나기는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그동안 거쳐온 집은 고시원, 하숙집, 옥탑방, 그리고 지금 사는 1층 투룸 셋방으로 이어진다.
첫 여름을 보낸 고시원은 중앙 냉방이어서 주인이나 총무의 변덕에 맞춰야 했다. 천장에 뚫린 에어컨 구멍을 바라보며 솔솔 부는 26도씨 바람은 언제나 오시려나, 기다리곤 했다. 그러다 시원한 바람이 내려올 때면 반가움에 들뜨면서도 마냥 속이 편치는 않았던 것 같다. 님의 침묵 한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언제 떠날지 모르는 솔솔바람은 소중했고, 그만큼 염려스러웠다.
하숙집은 에어컨이 없었다. 솔솔 26도씨 바람을 기다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선풍기를 틀면 30도씨를 웃도는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희망이 없으니 애타는 마음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그냥 몸이 탈 것 같았다. 샤워하고 나와서 선풍기 앞에서 만끽하는 쾌감은 순식간에 증발했다. 정말 찰나였다.
옥탑방은 건물 꼭대기에 덩그러니 놓인 콘크리트 박스 모양으로 한낮에 쏟아지는 태양열을 온 몸으로 받기 때문에, 그 열기를 방 안에 있는 작은 에어컨이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한참 달궈졌을 때는 마치 화덕 속의 구이가 되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십년후 연구소에서 열을 반사하는 페인트를 지원받아 지붕에 칠한 후에는 좀 나아졌다.
지금 사는 1층 투룸은 옵션으로 에어컨이 달려 있고, 사방에 우뚝 솟은 건물이 햇빛을 최대한 막아주고 있어 피서에는 최적인 장소인 듯하다. 겨울에는 채광에 아쉬움이 많았지만, 지금은 채광보단 쾌적한 실내온도가 우선이어서 그런지 삶의 질이 한층 높아졌다. 에어컨을 틀고 다리를 쭉 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얼음 동동 띄운 아이스 커피를 마시며 멍때리고 있으면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것이다.
전기 요금 고지서가 나올 때까지, 이 행복을 충분히 만끽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