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볼 수 없게 되었어…

폭삭 속았수다를 보고

by 베하

드라마를 볼 수 없게 되었어.

오랜 연애 끝 이별을 하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던진 말이었다.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그러한 과거를 상기시키는 모든 드라마가 보기 힘들어졌다고 했다.

전화기를 타고 내게 닿은 목소리는 약하고 힘이 없었고, 후회와 자책의 마음을 견디기 어려워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다는 말도 엄살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렇구나. 당신은 참 여린 사람이구나. 여려서 악하지는 못하지만, 그래서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자신 또한 그 상처를 감내해야 하는 사람.

그때에 나는 그를 용서했던 것 같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를 보기 시작했다. 바람 부는 제주의 땅에서 가혹한 현실을 씩씩하게 돌파해 가는 애순과 관식의 어여쁜 모습에 감탄하면서.

그러다 문득, 그가 생각났다.

그도 이 드라마를 보고 있을까? 드라마의 판타지조차 불편하게 만들던 마음의 짐이야 물론 진작에 던져 버렸을 테지만, 문득 이렇게 맞닥뜨리는 멜로의 판타지가 조금이나마 불편하기도 할까?

그 옛날 우리가 맞서야 했던 현실의 장애는 드라마 속 젊은이들의 멋진 서사에 비하면 대단치도 않은 거였을 수 있는데… 우리는 왜 애순과 관식이 되지는 못했을까? ....


애순과 관식의 딸 금영이 자라서 영범과 이별을 선택하는 걸 보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휴, 다행이야, 진짜 잘했어. 애순이 “네가 그런 선택을 할 줄 알고 있었어, 내가 너를 그렇게 키웠어”라고 말할 때는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 한 배우-아이유-가 연기하는 엄마와 딸이, 마치 한 사람의 삶 안에서 펼쳐지는 과거와 현재처럼 이어지면서, 삶을 사는 방향으로 이끄는 생명의 고귀한 경향성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옛날 우리가 이별하는 장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론 우리는 매우 “덜 생긴” 사람이었지만서도 ^^;) 아프지 마, 잘 살아야 해,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전화해… 하면서 마지막 포옹을 하고…

무엇보다 그의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말은 매우 유사했다. 어울리는 사람들끼리, 비슷한 집안끼리 만나야 한다는 말.(무슨 재벌집도 아니면서!) 내 아들은 내가 고이 키운 ‘꽃’인데 네가 함부로 따가려 한다는 폭력적인 말들. (드라마에서 영범의 어머니는 아들을 나의 프라이드, 내 인생이라 말한다.)


어둡고 칙칙해 보이는, 행복과는 매우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영범과 그 어머니의 미래 모습이 살짝 위로가 되었다는 건 부인하기 어렵겠다. 나와의 이별 후 두어 달 만에 다른 이와 결혼을 했던 그가 심한 이별 후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솔직히 걱정과 연민 한편에 살짝, 아주 살짝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알고 있다. 그것이 한 때의 일이었다는 걸.

그때의 그의 결정이 관식이 아니라 영범의 것이었다 해도, 지금 그는 또 다른 관식이 되어, 자신의 애순과 금명과 은명을 지키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우연하게 맞닥뜨린 SNS 속의 그들의 모습은 어찌나 근사하던지. 나도 모르게, ‘내가 기꺼이 헤어져 주길 참 잘했지”라고 중얼거렸으니까.

애순이 아닌 금영의 결정을 한 나 역시, 그가 없는 현재의 나를 사랑하며 무사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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