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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ykwariat Jun 27. 2023

녹음의 <넓은 바위에 누워 달을 보며>

달빛을 오롯이 감각하며,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며

국립 아시아 문화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사유 정원> 전시에서 무척 인상적이 작품이 있었다. 바로 녹음의 <넓은 바위에 누워 달을 보며> 였다. 길을 따라 소쇄원의 밤을 연상하게 하는 풍경들이 전시되어 있고, 마지막 커브 공간에는 커다란 달이 떠있는 공간 아래 향기가 그곳을 감싸고 있다. 소쇄원이라는 사전 정보가 없어도 충분히 그 자체로 아름다운 몽환적인 공간이었다. 이 작품을 보고 나서는 나의 감상과 연결지어 <달빛을 오롯이 감각하며,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며> 라는 부제를 붙여 보았다.


이 작품을 제작한 녹음은 자연을 주제로 공간을 연출하는 가드닝 스튜디오 ‘수무’의 아티스트 그룹이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태초의 자연을 인간의 공간으로 가져와 그 속에 오브제, 영상, 음악 등이 하나로 어우러진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이름 그대로 그들은 녹음(綠陰: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나 수풀)을 어디에서나 쉽게 마주하게 될 수 있는 날을 꿈꾸고 있다는데, 이들의 작품 인터뷰에서 관람객들이 "걷고, 호흡하고, 명상하고, 휴식하는 시간을 보내기를 바란다"고도 말했다.


<넓은 바위에 누워 달은 보며>는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정원인 전남 담양의 '소쇄원'에서 영감을 받았다. 1548년 하서 김인후가 소쇄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시조 48영중 '제13영: 넓은 바위에 누워 달을 보며'에 묘사한 밤풍경을 재해석하여 공간 설치작품으로 구현한 것이다. 시조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 13영 넓은 바위에 누워 달을 보며廣石臥月

나와 누우니 푸른 하늘에 밝은 달이라露臥靑天月

넓은 바위는 바로 좋은 자리가 됐네端將石作筵

주위의 숲에는 그림자 운치 있게 흩어져長林散靑影

깊은 밤인데도 잠 이룰 수 없어라深夜未能眠

이 시조를 읽어보면 소쇄원의 밤풍경이 저절로 연상된다. 김인후의 시조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대숲의 바람과 소쩍새 울음, 바위에 흐르는 물, 밝은 달, 취중에 나오는 시와 노래 등이다. 청각적인 소리, 시각적인 빛과 그늘의 대조, 등이 소쇄원의 풍경을 감각적으로 느끼게 하고 문학적 감수성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실제 자연은 아니지만, 자연적인 감각들이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높은 곳에 달이 휘영청 떠있는 모습을 마주하게 되고, 그 달빛에 비친 주변 사물과 생명체들이 하얀 천에 은은하게 투과된 풍경도 함께 마주하게 된다. 작가는 이렇게 자연과 영상이 하나가 되어 천천히 거닐 수 있는 가상의 정원을 만들었다. 그림자 정원에 흩뿌려진 영상 작품은 평소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자연의 고유 형태들과 움직임을 단순한 그림자로 표현하기도 했다. 동물 그림자가 비칠때는 외로운 밤에 찾아온 손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림자 정원을 지나면 아름다운 보름달이 떠 있는 또 하나의 정원을 마주하게 되는데, 고요한 밤산책의 경험을 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이 작품이 <사유 정원> 전시에서 만나는 마지막 작품인데, 마치 하루의 끝처럼, 이 전시의 끝에서도 달빛이 동행해 주는게 무척 인상적이었고, 구성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달과 내가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루는 경지를 느껴보게도 된다. 내가 달을 바라보는 행위는 어쩌면 달이 나를 바라보는 행위로 해석될 수도 있다.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자연 자체가 나를 예술의 길로 들어서게 했던게 아닐까? 자연 자체가 예술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라고 질문했다. 이렇듯 달이라는 자연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흥은 예술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달과 함께있는 공간에서는 서로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내가 곧 자연의 일부임을 의식하게 되기도 한다. 현대 사회는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바라봄으로써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과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면, 자연을 함부로 바꾸는 시도를 감히 할 수 없지 않았을까. 각각의 존재는 고유성이 있고, 모두 각자 타고난 존재로서 존중받기를 원한다. 내 손이 달에 닿을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하기 보다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달에 대해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는데서 머물러야 할 것이다. 다른 존재와 서로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사회, 자연, 나아가 우주안에서 공존하는 관계임을 늘 인식해야 할 것 같다.


이 작품을 감상하는 순간에는 이 작품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향기가 이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향기의 이름은 <달빛> 이었다. 이 작품 앞에서는 달빛을 시각적으로만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 시간적으로도 체험할 수 있는데, 이와 더불어 이 순간에 후각적 감각인 <달빛>향을 더 함으로써 공감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어떤 경험을 오감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경험이 기억으로 연결되도록 하는데 도움을 준다. 전에 들었던 노래를 시간이 지나 들었을 때, 그 때의 추억이 갑자기 밀려오기도 하고, 혹은 여행지에서 뿌렸던 향수나 그 때 낯선 공간에서 맡았던 향기를 나중에 일상의 어느 순간에 맞닥뜨렸을 때 갑자기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렇게 현재를, 순간을, 단순히 한가지 방법으로 감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감을 모두 활용하여 느끼는 것은 지금을 영원히 간직하는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나는 그 소쇄원의 밤 풍경 안에서, 당장 바위에 누워, 달을 보며 초여름밤의 풍류를 즐기고 싶었다. 물론, 당연히 술 한잔과 함께. 도시에서는 밤이 된 순간에도 불이 켜져 있고, 소음들이 가득한데, 그 공간에서 아무리 좋은 사람들과 술이 있다고 해도 서로에게 오롯이 집중하기는 무척 어렵다. 더욱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은 더더욱 갖기 어렵다. 요즘 조금 바빠지면서 예전에 그저 책 사고, 책 읽는데 온 하루를 보내던 때가 얼마나 감사했나 새삼 느끼게 된다. 이럴 때 잠시 고요해질 순간이 간절해 지는데, 이 작품을 통해서 잠시 사색할 시간을 가져보니, 또 바쁜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삶의 순간들을 감각 하며 온/오프의 리듬을 잘 찾아가고 싶다. 이렇게 잠시 일상에서 벗어난, 미술관이나 영화관처럼 몰입도가 높은, 너무나 비일상적인 공간에 잠시 빠졌다가 나오는 경험이종종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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