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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ykwariat Oct 12. 2023

음악이 불러오는 비의지적 기억

그리고 그들을 보살피고 우리를 돌보는 사랑이라는 것

왠지 우울해질 것 같아서, 보기를 미루었던 영화 <애프터썬>을 연휴에 보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좋으면서도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마지막에 아빠와 딸이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이었다. 춤을 추는 공간에서 흐르던 음악이 바로 퀸의 <Under pressure>였는데, 내가 무척 좋아하는 노래인데다가, 남녀가 춤을 출 때 나올 수 있는 곡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기도 했고, 그동안 그 곡을 그렇게 많이 들었으면서 가사의 의미를 그 장면을 보면서야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아빠와 춤을 춘 기억이 있다. 여섯살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깊은 햇살이 베란다를 통과해 거실까지 쏟아지던 휴일의 오후, 아빠는 요한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틀어 놓고 나에게 춤을 청했다. 어릴 때부터 조숙하여(?)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이기에 내키지 않았지만,  아빠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아서 마지못해 응했던 것 같다. 나는 아빠와 춤을 추며 눈을 맞추기 보다, 거실에 펼쳐져 있던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나온 앨범의 노란색 로고를 뚫어져라 봤던 기억이 난다. 당시 집에 있던 클래식 앨범들에는 다 도이치 그라모폰 로고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로고가 주는 의미를 알기에 그저 압도되지만, 그땐 그 특유의 노란색이 어찌나 획일적이고 지루하게 보이던지. 조금 커서야 나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곡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그 곡을 들을 때마다 아빠와 보낸 오후의 시간에 대한 기억이 자연히 따라오는 걸 경험했다. 그야말로 프루스트가 말하는 '비의지적 기억' 이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나는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아이들에게 각인 시키고 싶을 때, 그 순간에 머무르는 동안 지나칠 정도로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듣게 한다. 물론 억지로는 아니고 그 음악을 좋아해서 저절로 그렇게 되기도 하는 것이지만. 예를 들면 우리가 플로리다에 살 때는 퀸의 음악을 몇달 동안 집에서나, 차에서나, 여행을 가서까지도 매일 들었는데 아이들은 이제 퀸의 음악을 들으면 플로리다에서의 기억이 자동 재생 된다고 한다. 그외에 아이들이 들으면 엄마, 아빠가 떠오른다고 하는 특정 뮤지션의 특정 곡들이 몇개 더 있다. 그래서 나는 <애프터썬>을 보면서 영화의 주인공이 퀸의 <Under pressure>를 들을 때마다 아빠 생각이 나겠구나, 저 마지막 춤이 생각 나겠구나, 가사의 의미를 어른이 되어서 더욱 실감 하겠구나 하면서 공감이 되었다. 그러다 문득 내 아이는 예전에 그렇게 많이 들었던 퀸의  <Under pressure>를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해져서 전주에서 비빔밥을 먹고 돌아오며 짧은 로드 트립을 하는 중에 그 노래를 차에서 틀어줬다. 그리고 아이는 그 노래를 듣고 곧바로, 신기하게도 마치 각본을 짠 듯이 내가 원하는 대답을 바로 해주었다.

"와! 이 노래 2018-2019년 사이(플로리다에 머물던 시절)에 정말 많이 들었다. 진짜."​


이 또한 노래가 아이에게 불러 일으킨 '비의지적 기억'인가 보다. 음악 덕분에 우리의 삶의 한 부분에 대한 기억을 조금 미화해서 재생할 수 있어서 기쁘다. 사실 영화 <애프터썬>처럼 당시 우리의 순간들에는 삶의 무게와 어려움과 절망도 동시에 존재했기 때문에.

<Under pressure>는 퀸이 한창 앨범 작업중이던 스위스 몽트뢰 스튜디오에 데이빗 보위가 놀러왔다가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곡이다. 나는 그 즉흥성과 곡의 리듬감에만 집중해서 들어서 가사의 뜻은 전혀 몰랐다. 그냥 뭔가 억압에 관한 이야기인가 보다, 삶을 파괴하는 억압에서 벗어나자는 이야기 정도로만 생각했다. 존 디콘의 중독성 있는 베이스 리프에 맞춰  프레디 머큐리의 절규와 데이빗 보위의 읊조림이 대조되는 매력적인 노래인데, 영화 덕분에 더 자세히 들여다 본 가사는 더욱 아름다웠다. 그 절규와 읊조림은 생의 리듬을 표현한 것이었고, 모두를 보살피고 나를 돌보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랑, 사랑, 사랑...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 순 없을까?
왜 사람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는 없지?
왜 우린 사랑을, 사랑을, 사랑을 줄 수 없을까
왜냐면 사랑은 이제 낡은 표현이니까
하지만 사랑은 우리가
밤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게 하고
또 사랑은 우리가 스스로를 돌보는 방식까지 바꾸게 하지
이건 우리의 마지막 춤이야
우리 자신의 모습이지


​https://youtu.be/912Ntw7oYOg?si=VKShYFTJzwuq3e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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