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대 동인지 문학과 관련하여
'사실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의 조선식 '변증법'
- 1920년대 동인지 문학과 관련하여
목 차
1. 서론
2. 본론 - 사실주의와 낭만주의
1) 사실주의의 출현
2) 낭만주의의 출현
3) 다시 사실주의로.
3. 결론
1. 서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문학도 사회적 존재성을 부여받고 있다. 대략 큰 범위로 나눈다면 두 가지로 보아 우리는 그러한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그 한 가지는 소위 작가라고 불리는 생산자는 자신의 작품의 원료나 재료를 현실에서부터 구한다는 사실이며, 또 한 가지는 작가가 쓴 작품은 어떤 형태로든 현실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전자는 작품의 생산과정을 전후하는 시기에 해당하는 것일테고, 후자는 일단의 작품이 이미 생산된 이후에 이루어지는 외부세계와의 상호관계를 이야기함일 것이다. 결국, 작품의 존재 자체를 규정지어줄 수 있는 것 중의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한 부분이 바로 외부적 현실이 될 수 있음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1920년대, 조선의 문학적 상황도 바로 '외부적' 요인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사회적, 현실적인 요인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었음도 매우 당연하다. 즉, 1919년에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3. 1 운동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조선통치방식은 소위 말하는 '문화통치'의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그러한 외부적이자 현실적인 양상 속에서 우리의 문학도 식민지 현실에 대한 '정신적 대응'을 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3. 1 운동 이후의 양상이 어떠했는가를 추려본다면, 첫째로, 조선인에 대한 교육의 기회를 한정적이나마 허용함으로써 조선인 스스로의 문학적 활동이 가능해졌다는 것. 둘째로 흔히,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창간으로 대표되듯이 조선인에 의한 출판의 자유가 제한적인 형태로나마 가능해졌으며, 마지막으로 그로 인해 조선인들 스스로의 발언과 발표의 영역이 이전에 비해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3. 1 운동 이후, 혹은 1920년대 조선의 문학판에는 이전과는 달리 서구의 문예사조가 조선인 지식인들에 의해 대량 유입이 될 수 있었을 뿐더러, 비슷한 문학관을 공유하는 문사들이 조직적인 행위를 통해 문학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사회적으로 공언할 수가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문학적 움직임 속에서 우리 문학사조사상 의미있는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남을 볼 수 있는데, 사실주의적 조류와 낭만주의적 흐름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2. 본론 - 사실주의와 낭만주의
1) 사실주의의 출현
주지하다시피, 1920년대 조선의 문예사조는 일본 유학생들에 의한 갑작스런 유입으로 인해 한꺼번에 여러 가지의 사조들이 혼재하는 양상을 보였다. 물론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어서 그것이 받아들이는 쪽의 여건에 맞게 조정되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의 문예사조의 혼류현상도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조선역사를 관통하면서 획득한 나름의 '특수성'이라 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막연한 설명보다는 식민지로서의 조선이라는 당시 상황에 대한 구체적 조건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말하자면,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통치라는 여건에서 서구사조의 유입 또한 주체적일 수 없었다는 식민지역사의 외부적 요인과, 김기진이 [10년간 조선문예변천과정]이라는 글에서 지적했듯이 "소부르조아 지도정신의 박약"이 "사조의 혼란, 운동의 혼란"을 야기했다는 사실과 식민지의 작가들이 어떠한 특정한 사조를 확실히 내면화시키면서 운동을 일으킬 수준이었다기 보다는 연령상, 기술상 습작기에 불과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혼류현상을 야기했다고 하는 등의 그 내부적 요인이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조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1920년대는 작가들이 비슷한 문학관을 가지고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동인지 시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시의 서구 문예사조의 흐름을 이러한 동인활동을 중심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주의의 유입, 영향 등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러한 문학적 관점을 공유하고 표방한 동인지 <창조>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창조>는 조선 최초의 순문예지로서 3. 1 운동이 발발하기 한 달 전인 1919년 2월에 창간되었는데, 당시 일본 유학생이었던 김동인, 주요한, 전영택에 의해 창간되었다. <창조>는 육당 최남선이나 춘원 이광수에 의해 움직여지던 이전의 교훈적, 계몽적 성격의 문학운동에 반발하여, 시로서는 자유시, 소설로서는 리얼리즘(사실주의), 혹은 자연주의적 기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본래 서구에서의 사실주의(리얼리즘)는 19세기 초의 낭만주의적 조류에 반발하여 이상적, 공상적 묘사와 표현 등을 배격하고 세계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 반영함으로써 사물의 본질이나 의미를 포착하자는 문학적 운동이었다. 19세기 프랑스의 스땅달이나 발자끄에 의해 사용된 사실주의는 이후 19세기 말경에는 졸라, 모빠상 등에 의해 보다 그 영역이 확장되었는데, 자연과학이 세계를 아주 객관적으로 관찰하듯 세기말 인간세상의 추악한 면을 면밀하고도 객관적으로 분석하자는 취지에서의 자연주의의 출현이 바로 그 확장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창조파'에 의해 주창된 사실주의, 혹은 자연주의는 이러한 두 사조 사이의 확장적 구분과는 상관없이 거의 동일한 의미로 쓰인 듯 하다. 아무튼 이러한 사실주의의 도입은 이른바 '조선 신문학(新文學)의 제 2기'로의 돌입을 선언하는 것이며, 1910년대와는 달리 '순문예운동'의 기치를 내건 것이었다. 또한 <창조>의 개간을 통해 주목해야 할 점은 시와 소설의 보다 엄격한 구분과 소설적 기법으로서의 '사실주의'의 도입이라 할 수 있다. <창조>의 주도적 인물이었던 김동인은 이러한 사실주의, 혹은 자연주의적 기법의 도입을 강조하면서 '신문장 운동'을 펼치는 바, 이는 보다 철저한 구어체의 사용, 방언의 사용을 통해 '리얼리즘적' 서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갑오경장 이후 신문학 운동의 특징 중 하나가 언문일치, 즉 구어체 문장의 확립이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창조> 그룹의 신문장 운동은 우리 문학의 언문일치 운동의 영역을 넓히는데 기여했던 것이며, 이는 바로 사실주의적 기법의 도입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할 수 있겠다.
2) 낭만주의의 출현
제국주의적 식민지통치에는 근본적 변함이 없었지만 표면상이나마 '문화통치'로 통치방식을 바꾼 일본의 '지시'로 1920년에 들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조선인이 펴내는 신문들의 창간과 더불어 수많은 출판물 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런 시대적 흐름을 타고 1920년 6월에 천도교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개벽>이 창간되었으나 이는 문예동인지의 성격을 띠었다기 보다는 일종의 월간종합잡지였다. 1차 세계대전후 승전국들에 의해서 보기좋고 듣기좋게 제창되었던 국제주의, 세계주의, 민족자결주의 등의 영향으로 평등주의에 입각한 독립정신의 고취를 표방했던 <개벽>은, 그러나, 문예면에 많은 지면을 할당함으로써 여러 작가들로 하여금 민족독립의 기치 아래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김억, 김소월, 박종화를 비롯, 현진건, 염상섭, 뿐만 아니라 신경향파의 김기진, 박영희 등의 작가들까지도 이 월간종합잡지를 통해 활동을 했으며, 특히나 '파스큘라'를 결성한 박영희가 이 잡지의 문예면 기자로 활동하게 되면서 김기진 등의 신경향파 문학이 활동할 수 있는 거점이 되었던 <개벽>은 그럼에도 문학동인지가 아니었으므로 문예사조와는 상대적으로 큰 관련이 없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술하였듯이, 당시는 여러 가지 출판물들이 쇄도하던 '문예부흥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각종의 문예사조들이 혼잡되는 양상을 띄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의미에서 조선에서의 문학적 '부흥기'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낭만주의적 조류. 이런 움직임은 1920년 7월에 창간된 <폐허>와 1922년 1월에 창간된 <백조>, 이 두 문학동인지를 통해 보여진다. 약간의 도식화를 시켜서 본다면 1920년대 소설은 사실주의, 혹은 자연주의 기법으로 표현되었던 것에 반해 시는 낭만주의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 나타나는 전자적 현상은, 김기진이 같은 글에서 분석한 것에 따르면, 조국의 "참담한 현실과 그에 대한 내성(內省;자기반성)에 기인"하는 것인 반면, 후자의 시에서 나타나는 낭만주의적 경향은 다분히 퇴폐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본래의 서구적 낭만주의는 19세기 초반에 이전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던 고전주의, 이성주의, 보편적 합리주의 등에 대한 반발로서, 개인주의, 감성주의, 자유 등의 기치를 내걸었던 조류로서, 그 시기 급부상하고 있던 부르조아계급의 시민의식을 대변하던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사상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세기말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의 보들레르, 랭보, 베를레느, 말라르메 등의 상징주의, 탐미주의, 예술지상주의(딜레땅), 퇴폐주의(데까당) 등의 변질을 겪게 되는데 이는 더 이상 진보를 담보하지 못한채 타락과 속됨으로 드러나던 부르조아계급의 본질적 실체에 대해 일어나는 환멸, 그에 대한 왜곡된 반대심리로서의 사라져가는 봉건적 귀족계급에 대한 찬미 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폐허>, <백조>로 대표되는 당시 조선의 '낭만주의적' 조류는 전자의 진보적이고 사회적인 모습이 탈각된 상태로 전이된 일종의 퇴폐주의, 탐미주의, 향락주의의 일종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양상들조차도 어떠한 문예사적 조류를 내면화시킨 것들이 아니라 그러한 경향적 성격만이 혼재했을 뿐이었다. 문학 운동에 있어서의 이러한 현상은 낭만주의의 굴절된 수입에도 기인할 수 있지만, 동시에 "시대에 대한 지식인들의 의식적 나태"로서 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는 3. 1 운동 이후 일본제국주의가 취한 '문화통치'라는 것이 결국 식민통치의 표면상의 기만적 술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식인 계층이 깨닫게 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그에 기인한 지식인 계층의 절망, 좌절을 나타내는 병적인 현상이었으며, 나아가 주체적이고 자생적인 과정을 거치지 못한채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이식되어야만 했던 조선의 근대화 과정으로 인해 사회지도계급이 현실적으로 부재했던 사실을 통해서도 당시 문학상 퇴폐적 흐름의 원인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창조>의 후계지로서 김동인에 의해 창간되었던 <영대>는 이와같은 퇴폐적 조류를 계승하여 이에 유미적, 악마파적 성격을 더욱 짙게 띄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퇴폐적, 기형적인 낭만주의는 그 나름의 이중성으로 인해 문학운동의 발전을 예견하고 있었다.
3) 다시 사실주의로
1924, 25년경, <백조> 그룹의 해산으로 인해 공식적 낭만주의는 해체되었다. 여기서 해체되었다고 얘기한 낭만주의는 <폐허>, <백조> 등의 명맥을 유지하며 동인의 형태를 통해 공식적이라 할 수 있는 퇴폐적인 성격으로서의 낭만주의적 조류라 할 수 있다. 이런 낭만주의의 붕괴, 해체는 자체내의 반성에서 시작된 그것이 아니라, 그 당시 일본에서 풍미하던 사회주의 사상을 이식받은 김기진과 같은 신경향파 문인의 결합을 계기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백조> 3호부터 그룹에 가담한 김기진은 보다 현실주의적인 문학이념을 주장함으로써 낭만주의적 그룹의 해체를 징후해주고 있다.
"생활을 인도할 사람은 누구냐? 예술가이다. 예술가의 할 일이다.
예술가는 모든 의미의 창조자이다. 생활에 대한 선각자이다. 생활은 예술이오 예술은 생활이어야만 할 것이다. 생활의 예술화가 되지않으면 안될 것이다. 세계의 인류 생활의 극한에까지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여야 할 것이다. 책상 앞에서 만들어낸 예술은 우리에게는 무용한 것이다. 세계의 백성들의 생활과 생활이 일치되고 세계의 백성들의 영혼과 영혼이 융합되는 때에 일어나는 위대한 교향악은 예술 그것이어야만 될 것이다. 그외에는 예술이 없어야만 한다. 그외에 무엇이 예술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유희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 그것은 유희일 뿐이다."
- 팔봉 김기진.
물론, 아직까지 김기진은 "예술가"가 "생활을 인도"한다는 관점을 드러냄으로써 <백조>류의 '영웅주의적 예술가'적 입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의 조류와는 다르게 현실주의적 문학관을 피력했다는 면에서 퇴폐적 낭만주의의 쇠락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백조>파의 병적 성향이 짙은 낭만주의는 유물론적인 철학에 기반한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과 그로 인해 자연스레 힘을 얻게 되는 문학적 사실주의의 기세에 밀려버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문학적 제현상을 고찰함에 있어 식민지적 현실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백조>파가 해산된 후, 낭만주의적 조류를 찾아보기가 힘들어졌으며 대부분의 동인들이 자연주의나 사실주의로 방향을 선회했다는 사실은 그 시기 식민지적 현실의 절박함을 증명해주는 부분일 것이다.
낭만주의 이후, 다시금 문학계를 주름잡기 시작하던 사실주의, 혹은 자연주의는, 그러나, 이전 <창조> 시기의 '순수문예 운동'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이전의 교훈, 계몽문학에 강하게 반발한 나머지 '순수문학'이라는 기치를 걸고 바깥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겠다는 미숙한 단계로서의 사실주의가 아니라, 식민지적 상황에 처해있는 현실의 비참함, 참담함을 보다 객관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사실주의, 혹은 자연주의였다는 것이다. 이는 크게 두 가지 노선으로 갈라질 수 있다. 하나는 조선 '자연주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염상섭 부류의 국민문학 집단이며, 다른 하나는 계급해방의 대전제를 문학 아래 깔았던 김기진, 박영희 류의 신경향파 그룹인 것이다. 염상섭은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구분없이 사용되어 오던 <창조>식의 문학기법과는 다르게 자신의 것을 자연주의라 확정했는데, 그 요지는 '근대과학의 문학', '구습타파', '우상파괴'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신경향파의 김기진, 박영희 등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을 건설함으로써 암담하기만 한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혁파하기 위해선 제국주의 뿐만 아니라 국내 지배계급-지주, 민족 부르조아지- 등도 타도해야 한다는 계급적 관점에 입각하여 보다 급진성을 필요로 하는 사실주의적 기법을 주장하게 된다.
어쨌건, 우리는 결국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짓밟히고 있던 식민지로서의 당시 조선의 현실은 각기 문학적 조류의 움직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미숙한 유학생 작가들에 의해 제창된 '순수문학적' 사실주의, 혹은 자연주의, 절망적 현실에 기인한 퇴폐적, 염세적 형태로서의 낭만주의, 그리고 참담한 현실에 대한 점차적인 각성을 증거하는 현실비판적 자연주의와, 현실타파적 또는 변혁적 사실주의까지, 그 시대의 저변을 흐르고 있던 것은 사회적, 역사적 현실이었고, 그 외부 현실의 구체적 양상은 식민지 조국이었던 것이다.
3. 결론
지금까지 1920년대, 동인지 문학을 중심으로 당시 조선의 문예사조적 움직임을 관통하는 거대한 줄기, 사실주의와 낭만주의의 흐름을 보았다. 그러한 문예사조들이 처음으로 태동하였던 서구에서는 19세기 초에 고전주의에 대한 반항으로서 낭만주의가 발생하였고, 또 그러한 낭만주의의 이상성과 공상성에 대한 반발로서 사실주의가 일어났으며, 사실주의의 확장적 변형태가 자연주의였다는 사실은 위에서도 언급을 한 바이다. 하지만 1920년대의 조선 문단에서는 그와는 반대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즉, 1920년의 교훈, 계몽문학에 대한 반발로 '순수문학적' 사실주의, 또는 그와 비슷한 의미로서의 자연주의가 동인지 운동과 함께 일어났으며, 그러한 지식인 계층에게 식민지 현실이 점점 절망적으로 인식됨과 함께 퇴폐적 낭만주의가 팽배했던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이후 현실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문단에 낭만주의의 허무적 망령이 사라지고 사실주의, 자연주의라는 바람이 다시 불기는 하지만.
그런데 어쩌면, 이러한 전도된 현상도 우리 나름의 '특수성'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런 사조들이 언제, 그리고 어느 것이 먼저 수입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어도 그들이 문학계에 만연되게 된 원인은 바로 당시 조선이 처한 식민지 현실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며, 그런 식민지로서의 현실이 바로 이땅 역사에 있어서의 당시의 특수성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1920년대 동인지 문학시대의 문학사조적 흐름을 통해서도 외부 환경적, 현실세계적 조건이 문학을 규정하며, 문학은 그러한 현실을 어떻게든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전제(前提)적인 사실에 불과하다. 물질적 측면으로서의 사회, 역사적 현실이 그것의 의식적 측면이라 할 수 있는 문학을 규정한다는 말이 결코 문학은 현실에 역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1. [한국문학대사전], <고려출판>,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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