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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Mar 14. 2020

[자본론(Das Kapital)] - Karl Marx

"노동은 인권이다." - 노동/계급/노동자계급

[자본론](1867), 칼 마르크스,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96.

"노동은 인권이다"

- 노동/계급/노동자계급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한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필두로 전세계에 걸쳐 연쇄적으로 이룩되었던 민주주의 사회 치고 나라의 가장 큰 법인 헌법에 이 문구를 집어넣지 않은 나라는 없다. 약소국가로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늦게나마 ‘민주주의 국가’를 만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의 의식이 조금씩 더 민주화되고 다양한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주체로서 자리매김해 가는 현대사회에서 사람으로서의 기본적 권리, 즉 ‘인권(人權)’에 대한 관심은 발전되어가는 사람들의 의식의 속도만큼, 어떤 면에서는 그 이상으로 커지고 있다. 물론 다양성이 인정되는 지금 시대에서는 ’인권’에 대한 이해와 해석도 각양각색일 터이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대다수 봉급쟁이들에게 있어 ‘인권’은 어떠한 색깔을 지니고 있는가.
 
 
1. 노동(勞動)
 

"... 노동은 모든 가치의 창조자이다. 오직 그것만이 자연의 산물에 경제학적 의미의 가치를 부여한다. 가치 그 자체는 어떤 사물 속에 대상화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인간 노동의 표현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은 어떤 가치도 가질 수 없다.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그것을 결정할 수 있다면 이와 똑같이 사람들은 가치의 가치에 관해서 논하거나, 무거운 물체의 무게가 아니라 무거움 그 자체의 무게를 결정할 수 있다."
- F. Engels, [반뒤링론], 1878, <제6장 단순노동과 복잡노동>, 김민석 譯, 새길, 1987.
 
현대사회라는 거대한 수레를 굴러가게 하는 요소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무수히 많은 것들이 떠오르겠지만 경제학적(經濟學的)으로 사고를 좁혀 생각해 보면, 우리가 경제활동을 하는 무대가 있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사회이기에 ‘돈’이 있어야 할 것이며 다음으로는 우리 모두의 경제활동 행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고전적으로 위의 요소들을 3대 생산요소로서 정리하였는데, 가치생산의 잠재적 공간으로서의 토지(土地), 끊임없이 자기가치증식하는 화폐로서의 자본(資本), 이들에 결합하여 최종적으로 가치창출을 실현하는 노동(勞動)이 그것들이다. 앞서 현대사회라는 말을 했으니 이들 요소들에 좀더 현대적인 해석을 가해보자. 우선 첫 번째 요소인 토지. 경제사상적으로 ‘중농주의(重農主義)’가 한 주류를 형성할 수 없는 현대사회에서 단순하게 ‘토지’ 자체에만 그 의미가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경제적 가치들이 발현될 수 있는 물질, 대상, 공간 모두를 아우를 수 있을 것이며 여기에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축적된 지식, 정보 또한 이 첫 번째 요소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요소인 자본. 이는 지금 경제체제에서 일반적으로 화폐, 즉 ‘돈’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단지 그 화폐형태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언급하였듯이 끊임없이 회전하면서 자기가치증식을 하는 ‘돈’을 말하는 것이다. 예금이나 주식을 비롯하여 다른 여러 가지 재산의 형태로 이자 및 이득을 발생시키든지 각종 생산수단에 재투자되어 이윤창출에 혁신적인 변화를 촉진시킴으로써 가치량 증가에 기여를 하든지 간에 다양한 형태로 자기운동을 하면서 가치를 증식시키는 ‘돈’ 모두를 이르는 것이 자본이라는 요소이다. 마지막으로 노동. 전술하였듯 이는 인간이 행하는 일련의 경제활동의 행위라 할 수 있는데, ‘토지’, ‘자본’ 등으로 매개되는 다른 재화에 결합하여 최종적으로 가치를 창출하고 기업에는 이윤1)을, 사회에는 물질적 발전과 생산력 증대를 이루는 요소인 것이다. 여기에서 노동 혹은 노동력의 가치에 대한 고찰은 이후에 구체적으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위에서 두 가지 요소, 즉 ‘토지’나 ‘자본’ 같은 단어들은 고매하고 권위있는 주류경제학자(主流經濟學者)들을 비롯하여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구에 날마다 회자되는 것들이라 경제학적 권위나 전문성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본 글에서 굳이 그 의미를 되새길 필요는 없다. 다만 ‘자본’으로 일컬어지는 노동대상이나 노동수단과 같은 일체의 생산수단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나타내는 대다수의 사람들, 우리 모두는 거의 대부분이 ‘토지’나 ‘자본’의 소유와는 무관하게 현실적으로 ‘노동(력)’이라는 결정적 생산요소 하나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만을 언급하자. 대다수 사람들의 삶이 ‘노동’을 통해 영위가 되고 있기에 대다수의 우리들은 바로 이 ‘노동’이라는 생산요소에 더욱 주목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는 이 운동(노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천성)을 변화시킨다… 우리가 상정하는 노동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의 노동이다. 거미는 직포공들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며, 꿀벌의 집은 많은 인간 건축가들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라도 가장 훌륭한 꿀벌보다 뛰어난 점은, 그는 집을 짓기 전에 미리 자기의 머리 속에서 그것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즉 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의식하고 있는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키는 것이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처럼 그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는데, 그는 자신의 의지를 이것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기관들의 긴장 이외에도 주의력으로서 나타나는 합목적적 의지가 노동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필요하다."
- K. Marx, [자본론] 1권, <제3절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김수행 譯, 비봉출판사, 1996.
 
다분히 원론적이라 약간 지루하지만, 우리 모두의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그 물적 기반이 되는 노동이라는 생산요소를 탁월하게 규정하고 있는 글이라 인용을 했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개념인 ‘노동’에 대해 위 글을 기초로 정리를 해보면,
첫째,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다. 동물의 한 종(種)으로서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가장 먼저 접하는 대상은 객체로서의 자연이기에 당연한 전제이다.
둘째, 노동을 통해 인간은 객체로서의 자연을 변화시켜 자신의 합목적적 의지(合目的的 意志)를 실현한다. 원시적으로 인간은 하나의 종(種)으로 살아남기 위해 자연이라는 대상을 극복해야 했는데 자신의 삶에 맞게 관념적이나마 목적을 세우고 그에 따라 물적으로 자연을 변화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노동을 통해 인간은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 또한 변화시킨다. 인간은 대상을 변화시키는 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변화된 대상으로 인해 스스로의 삶의 양식을 변화, 발전시킨다는 의미인데 경제학적으로는 증식된 가치의 형태로, 축적된 자본의 형태로 생산력의 발전을 이룩하여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고 그에 따라 지속적으로 발전을 기획한다. 변화, 발전에 대한 ‘합목적적 의지’는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행동방식을 규정’한다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넷째, 노동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주체, 객체의 변화 및 발전을 이룩하려는 인간의 ‘합목적적 의지’와 그것의 외화(外化)된 형태로서의 노동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교육되며, 혁신되고 축적되어 인간 역사발전에 복무한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하고 있는 노동을 위와 같은 원론적인 개념으로서만 설명해내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음은 인정하자. 다만 지금까지 서술한 노동의 개념을 볼 때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만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즉, 노동이라는 것은 시초적으로는 탄생과 함께 자연이라는 거대한 대상과 마주하게 된 인간 개체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신체기관을 통해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출발하지만 하나의 개체로서만이 아닌 인류라는 하나의 종(種)으로서 존속하기 위해 더욱 발전된 노동을 실현하기 위한 생산도구를 다름아닌 바로 그 노동을 통해 축적, 발전시키게 되는데, 이와 같이 노동이라는 행위는 각각의 사회를 형성하는 인간 역사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혹은 생산력 발전이라는 유구한 과정에서 필연적인 계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본질적으로 한 개체로서의 인간인 개인의 시각에서는 ‘자아실현’의 매개로서 기능하는 동시에, 인간 역사의 발전을 견인해 내는 원동력으로서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획득할 수밖에 없다. 노동은 결국 인간이 창조해 온 역사와 각각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떠나게 되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궁극적인 존재의미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노동은 항상 인간의 역사, 사회형태와 함께 고려되어야 할 개념인 것이다. 물론 인간의 역사가 발전해온 각각의 단계에 따라 인간의 노동이 실현되는 양상에 각각 차이가 있었으며 실제로 각 시기의 경제체제에 따라 인간 노동 실현의 양태는 각각 다르게 규정이 되어 왔다.2) 이후 노동이라는 아직까지 다소 친숙하지만은 않은 개념과 관련하여, 그럼에도 현대사회에서 실제로 노동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대다수의 우리의 삶을 조망하기 위해 논의를 전개하면서 좀더 구체적인 언급을 하기로 하고 일단 이 장에서는 노동이란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인간이 가진 필연적인 의무이자 권리일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해석에 만족하면서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2. 계급(階級)
 
"계급들은 사람들의 대규모 집단들이며, 이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의 생산체계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지위에 의해, 생산수단들에 대한 그들의 관계(대부분의 경우 법으로 고정되고 형성된다)에 의해 노동의 사회적 조직에서 그들의 역할에 의해, 그리고 결국,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회적 부의 몫의 정도와 그 부를 획득하는 양식에 의해 서로 구별된다."
- V. I. Lenin, [위대한 출발] 中
 
노동은 언제나 사회, 역사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며 그런 한에서만 그 존재의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형태인 ‘사회(社會)’에 대한 언급이 누락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전적으로 사회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같은 무리끼리 모여 이루는 집단, 서로 협력하여 공동생활을 하는 인류의 집단, 온갖 형태의 인간의 집단적 생활, 어느 특정한 발전단계를 이룬 집단(민중실용국어사전, 민중서림 편)’ 등으로 설명된다. 쉽게 이해하면 주지하다시피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모여 이루는 집단을 일컫는다는 포괄적인 의미에서부터 이 속에 존재하는 각종 모임, 회합, ‘패거리’ 등을 지칭하는 것이 바로 사회라는 어휘인 것이다. 사회라는 개념에 대한 정치하고 학적인 설명은 우리 주변에서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많은 사회학자들에게 맡기고 본 글은 ‘패거리’로서 존재하는 인간 사회에 대한 고찰에 주목하고자 한다. 논의의 시작으로서는 약간의 무리가 있을 지 모르나 앞에서 작위적으로 명명한 ‘패거리’라는 말을 사회적 ‘계급’이라는 기호로 대체하고 이야기를 전개하자.
이 장 서두에 인용한 글에서 ‘계급이란 사람들의 대규모 집단’이라는 말을 이해함에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계급은 단순하게 사람들의 집단만을 이르는 것이 아닌 ‘대규모 집단’이라는 것이다. 즉, 대규모이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해당 사회에서 그 존재가치가 클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결국 위에서 행한 잘못된 비유와는 달리 계급은 단순한 ‘패거리’와는 다르다. 그런데 우리의 사회와 계급에 대한 이해에 앞서 이 대상들에 대한 우리 인간의 인식은 어떠한지 잠시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의 구절을 되새겨 봄이 적절할 지도 모른다.
 
"사회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를 반영한다… 반영은 반영되는 것의 근사적으로 정확한 복사일 수는 있으나, 여기에서 동일성을 운운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의식 일반은 존재를 반영한다. 이것이 유물론 전체의 일반적 명제다."
- V. I. Lenin,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박정호 譯, 돌베개, 1992
 
따분한 이야기일 지는 모르나 철학적으로 인간의 유물론(唯物論)적 인식론(認識論)에 대한 언급이다. 즉,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 그들의 의식(意識)의 토대는 사회 자체를 물(物)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객관적 존재들이라는 의미이다.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초(楚)나라 지방 말단관리였던 이사(李斯)를 강대국 진(秦)나라의 재상으로 만든 계기가 되었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오래된 격언으로 이해하든,3) 제복을 예찬한 나폴레옹이 ‘군복이 진정한 군인을 만든다’는 의미로 이해하든 포괄적 의미에서는 무방하다. 인간의 모든 인식과정에서 어떠한 의식이든 그 기저에는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종의 물적 토대가 반영되어 있으며, 이 객관적 존재는 의식 형성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로 이해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의식은 물질적 조건이 그대로 반사된 것에 불과하다는 식의 유물론의 기계적인 해석은 온갖 물신적(物神的) 시각과 행태로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음에 물적 존재와 인간 의식 사이의 ‘동일성을 운운하는’ 터무니없는 시각은 진정한 유물론적 관점과 전혀 관계가 없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물질들 사이의 관계로 보이는 것들은 결국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의식에 절대적으로 반영되지만, 존재를 토대로 일단 형성된 의식은 상대적으로 그 토대가 되는 물적 존재에, 그 변화와 발전에 궁극적으로 기여한다는 변증법적(辨證法的) 인식론이 결국 진정한 유물론의 방법론이 된다. 이 같은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에 대한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회, 그 속의 ‘계급’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장 서두의 인용문으로 다시 돌아가자. 사회 속에서 각각의 ‘대규모 집단’을 이루는 ‘이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의 생산체계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지위에 의해, 생산수단들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 의해 노동의 사회적 조직에서 그들의 역할에 의해, 그리고 결국,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회적 부의 몫의 정도와 그 부를 획득하는 양식에 의해 서로 구별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의 생산체계란 무엇인가. 주지하다시피 지금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정의로서 자본주의는 어느 순간 하늘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노동을 통해 사회를 조직, 존속시켜온 인간은 노동의 도구, 혹은 생산수단을 포함한 사회적 부에 대한 소유를 중심으로 특정한 인간관계를 맺어왔다. 이를 정치경제학에서는 생산관계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민법, 상법 등의 사법(私法)적 형태로 대부분 규정되고 보장되는 이 관계를 통해 인간의 노동은 그 특정 사회에 맞게 조직되어 왔고 노동을 하는 인간은 그 관계 하에서 그들의 역할이 주어졌으며 그에 따라 인간의 ‘대규모 집단’들도 형성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회적 ‘계급’인 것이다. 따라서 계급이라는 것은 앞 장에서 서술한 노동과 함께 고려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계급을 형성하는 생산관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노동과 함께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의 문제가 다루어져야 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생산력의 발전, 즉 양적 증대의 측면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각 사회의 생산체제를 특정지어온 각각의 발전단계는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형태를 중심으로 노동이 조직되어가는 방식인 생산관계를 통해 질적으로 변화되어 왔다는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또 다른 개념이 노동의 ‘분업(分業)’인데, 고전경제학의 시조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위대한 발견이 바로 이 질적인 생산관계의 역사적 특질을 이루는 ‘분업’의 발견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아담 스미스의 역작인 <국부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개념이 바로 ‘분업’이라고도 한다.
 
"번영하는 문명국의 가장 일반적인 수공업자 또는 날품팔이 노동자의 생활용품을 관찰해 보면, 그에게 이러한 생활용품을 제공하기 위해 노동을 조금이라도 투하한 사람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수천 명의 도움과 협력 없이는 문명국의 가장 초라한 사람조차도 우리가 단순하다고 오해하고 있는 단순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것이다."
- A. Smith, [국부론(An Inquiry into Nature and Cause of the Wealth of Nations)], <제1편 제1장>
 
분업에 대한 위와 같은 간단한 소개와 함께 스미스는 노동의 분업이야말로 생산력을 증진하는 중요한 계기라는 설명을 하는데 그의 제자들인 고전경제학자들에게서 분업은 상품의 교환을 매개로 하는 시장경제의 측면에서만 이 의미가 국한되고 있다. 그러나 생산력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는 생산관계로서의 분업은 보다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얻어야 한다. 앞서 후에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로 했던 역사발전단계에서의 인간 노동 실현의 양태에 대한 고찰은 생산관계로서의 노동의 분업에 대한 이해와 불가결하다.
원시 공동체사회로부터 인간 노동의 경험이 축적되고 농업발전이나 전쟁 등을 통해 남는 재화들이 생겨나면서 이것에 대한 소유를 둘러싸고 인간 공동체에서는 대립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물론 원시 공동체사회에서는 남는 재화에 대한 소유가 기본적으로는 공동체에 귀속되었지만 생산력 발전을 위한 재축적과 관리의 필요성에 따라 다수의 노동하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소수의 계층이 생기기 시작되었는데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가 바로 최초의 사회적 분업의 형태이다. 육체노동자의 물질적 노동에 의해 부양되던 이들 지배자들, 즉 당시의 철학자였던 ‘정치적’ 정신노동자들은 생산력 발전을 위한 생산수단의 사적인 소유를 영속화시키기 위해 국가(國家)라는 단위를 형성하면서 인간 역사에서 고대사회를 열게 된다. 앞서 고대 사회는 노예노동에 기초한다고 했다. 즉 단위내 모든 사람들이 평등했던 원시 공동체적 사회관계는 소멸하고 노동력을 지닌 인간 자체인 노예를 포함한 일체의 생산수단을 독점한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라는 이름으로 대다수를 지배했던 사회가 바로 동서양을 막론한 고대사회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체제가 언제까지 영속될 수는 없는 법, 생산력의 증진이라는 물질적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의식들도 조금씩 고양되기 시작했고 이는 종교로 대표되는 사상(思想)의 형태로 고대사회를 압박하기 시작하였으며 분열된 지배층은 봉토(封土)의 형태로 당시에는 중요한 요소였던 토지를 분할하며 봉건지주(封建地主)들이 됨으로써 인간 역사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주지하다시피 철저하게 신분제에 기초한 사회였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은 고대사회에서 중세 봉건사회로의 질적인 발전을 이루는 데 이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어느덧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데 있어 주요한 지배이념으로 자리매김한 종교의 역할이었다. 어쨌든 중세봉건사회에서의 대다수 사람들은 고대 노예들과는 다르게 약간의 사적소유가 허용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토지와 지주들에게 인신적으로 구속이 된 채 자신의 노동생산물 대부분을 수탈당해야만 했다. 언제나 대다수가 노동을 통해 생산한 ‘잉여가치’는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축적되었으나 대다수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이러한 체제를 감당하기에는 어느덧 과학과 생산력의 발전이 너무나 앞서가게 되었다. 국제적 교류를 통한 상업의 발전, 전문적 수공업자들에 의한 산업의 발전이라는 양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농업노동에 기반한 중세의 봉건적 신분관계와 소유관계에서 상인이나 수공업자들과 같은 계층들은 항상 소외되어 왔던 것이다. 역사발전과정에서 생산력 발전이라는 양적인 형태에 질적인 변화를 촉진하였던 생산관계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더 이상의 발전을 막는 질곡(桎梏)이 된다.4) 여기에서 또 다시 나타나는 분업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분리였다. 또한 근대 자본주의사회가 시작되면서 대규모 공업이 등장하였고 인간의 노동은 본격적으로 생산력 발전을 위한 철저한 ‘부문내 분업’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으며 몇 백년도 안되어 인간 역사에서 생산력 발전의 신기원을 이루게 된다. 고전경제학자들이 예찬하는 ‘분업’은 근대사회 이후에 나타난 바로 이 자본주의적 ‘부문내 분업’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시각을 좀더 넓혀보면 ‘분업’은 인간의 역사발전단계에서 생산력 발전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던 생산관계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연적인 계기이다.5)
이제 다시 계급이라는 본 주제로 돌아오자. 산업도시의 발전과 봉건지배의 약화는 대다수 중세농노들을 농촌으로부터 쫓아내었고 이들의 노동은 이제 달라진 근대적 생산체제에 맞게 다른 형태로 조직된다. 한편 중세체제의 말기에 이르러 과학 및 산업의 발전과 함께 이들 상인 및 수공업자들은 최초에는 ‘중세 중산층’으로서 ‘부르주아지(Bourgeoigie)’라는 대규모 집단으로 형성이 되었고 공장 및 일체의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를 통해 사회적 생산체제의 질적인 발전에 기여하면서 이른바 자본주의적 생산체제를 구축하였으며 그 이후 지금까지 ‘자본가’라는 대규모 집단으로 사회를 지배해 왔다. 자본가는 산업발전의 근간이 되는 자본을 비롯하여 모든 생산수단을 독점한 집단을 지칭하며 자본주의 생산체제에서 끊임없이 자기가치증식을 하는 자본의 운동이 계급적 형태로 인간화되어 표현된 것이다.6) 지속적인 자본축적과 생산력 발전을 이루기 위해 자본가라는 계급은 역시 일체의 사회적 생산수단을 소유한 상태에서 노동자들을 고용하였는데, 소위 부르주아지라고 하는 자본가 계급과 대비되어 모든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는 전혀 없이 노동력이라는 상품 하나만을 지닌 채 임금을 대가로 각 산업에 고용된 자들을 ‘임금노동자’ 혹은 근대적 의미로서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7) 라고 한다. 물론 자본주의 초기단계에서 이들의 대부분은 중세적 토지로부터 추방된 농노들이었다. 노동을 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 대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생산수단의 소유를 둘러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인해 철저하게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데, 그 원인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개념이 바로 분업, 생산수단을 비롯한 일체의 사회적 부에 대한 소유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 살고 있는 지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근대사회를 시작하게끔 했던 특정 생산관계에는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사회에 있어 가장 주요한 대규모 집단이자 전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계급은 사회 계층적 존재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대규모 집단, 즉 ‘자본가’와 ‘임금노동자’의 계급이며 결국 이 계급들의 역관계에 따라 해당 사회의 구체적인 성격이 규정된다.
 
 
3. 노동자계급-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임금노동자
 
"'임금이란 사용자가 근로의 대가로 근로자에게 임금, 봉급, 그 외 어떠한 명칭으로든지 지급하는 모든 금품’. 따라서 기본급, 시간외 수당, 연차수당, 상여금 등 명칭에 관계없이 ‘근로에 대한 대가성’, ‘노동력이라는 생산요소에 대한 상품값’만 인정되면 모두 임금에 포함된다. 임금의 전제가 되는 ‘근로의 대가’라 함은 사용종속관계 아래에서 제공되는 근로에 대한 보상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근로기준법 제 14조에 규정된 근로자가 같은 법 제 15조에 규정된 사용자의 지시, 명령 아래에서 제공한 근로에 대한 반대급부라고 규정할 수 있다."
-윤욱현, [새노동법 해설], 한국경제신문사, 1999.
 
지금까지, 태어나자마자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게 된 인간은 물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노동이라는 생산적 행위를 해야만 했고 하나의 종으로서 존속하기 위한 조건인 생산력 발전을 위해 노동대상 및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를 중심으로 일련의 생산관계를 형성하면서 그 속에서 노동을 사회적으로 조직, 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대규모 집단’인 계급을 이루어 왔다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근대를 거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전유(專有)를 통해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자본가 계급과 시장에서 가치로 교환되는 상품화된 노동으로서의 노동력만을 가진 채 그에 고용되어 살아가는 노동자 계급이 주된 ‘대규모 집단’들이라는 뭔가 석연치 않은 규정까지 내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은 어떤 구체적 형태로 현상하고 있는가. 각 산업에 고용되어 노동을 통해 일상을 영위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 구체적 형태인데,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파는 대신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노동을 하는 우리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될 ‘근로의 대가’, 즉 ‘임금’에 대한 언급부터 시작하자. 이 지점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12년간의 제도교육을 통해 바르게 성장한 우리들 귀에 자본가 계급이네 노동자 계급이네 하면서 어쩐지 께름직하게만 들리기만 하는 규정에 대한 해명이 필요한 출발점이다.
임금(賃金,wage)에 대한 정의는 이 장 서두에 인용했듯이 애써 표현하지 않아도 ‘봉급쟁이’인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이에 더하여 우리나라의 근로기준법 제 14조 ‘근로자의 정의’ 및 제 18조 ‘임금의 정의’를 보면, ‘사용자가 근로의 대상으로 근로자에게 임금, 봉급 기타 어떠한 명칭으로든지 지급하는 일체의 금품’을 ‘임금’이라 정의하고 이를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근로자’라고 한다. 이 법에서 말하고 있는 ‘근로’라는 개념은 본 글 첫 장에서 고찰한 인간의 역사적, 사회적 ‘노동’이라는 개념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지면의 한계로 인해 편의상 동일한 의미로 보자. 따라서 ‘노동’이라는 어휘와 좀더 친숙해지기 위해 법에서 규정한 일체의 ‘근로’를 그 맥락상 본 글에서는 ‘노동’으로 대체하도록 한다. 어쨌든,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노동’(근로)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이 법 제 16조 ‘근로의 정의’를 보면 노동은 정신노동, 육체노동 모두를 포함하는데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노동자는 이 사회에서 ‘직업을 불문’하고 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노가다’, 또는 육체노동에만 노동의 의미가 국한될 수는 없다는 것인데, 우리가 주목하는 노동이라는 개념은 단지 노동과정에서의 ‘기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노동을 통해 살아가는 하나의 ‘대규모 집단, 즉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노동자는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생산직 봉급쟁이든 사무직 봉급쟁이든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같은 사회적 지위에 있다는 인식이 우선된다. 고전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상품의 가격을 중심으로 볼 때 우리가 신고 다니는 신발의 가격과 옷의 가격이 같다면 상품시장에서 같은 값의 화폐를 통해 구매를 할 수 있기에 일반적으로 가치(교환가치)가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이는 결국 신발과 옷의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각각 지출된 추상적 형태로서의 노동량이 같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고전적이고 도식적인 이해로서 복잡한 현대사회의 다양한 노동을 설명할 수는 없다. 현대경제학에서 상품은 단순하게 재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형의 서비스도 포함하므로 각각 상품들의 가치측정에 관한 다양한 양태들은 좀더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기본적으로 상품생산을 위해 결정적 요소로서 결합되는 노동은 ‘직업을 불문하고’ 동일한 사회적 가치를 지니며, 그로 인해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력을 지불하는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동일한 사회적 지위를 차지한다는 의미로서 이해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앞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노동자들은 일체의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기관 및 그에 기반한 지식 등만을 지닌 채 임금이라는 대가를 목적으로 노동력을 지불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지닌 노동력이라는 요소 또한 시장에서 자유롭게 판매, 구매, 교환되는 다른 상품과 다를 게 없다. 즉, 노동력도 하나의 상품인 것이다. 여기에서 잠깐 상품 일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 상품은 생산된 하나의 재화로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목적물로서 지니는 가치와 상품이기에 시장에서 교환되고 거래되는 과정에서 획득하는 또 다른 형태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정치경제학에서는 전자(前者)를 상품의 본질로서의 ‘사용가치(使用價値)’, 후자(後者)를 상품의 현상형태로서의 ‘교환가치(交換價値)’라고 구분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평범하고 가장 대량적인 것’이 지니는 이중성(二重性)을 폭로한다.8) 그러나 대상(對象)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배제하면서 기능적인 ‘과학’으로서 존재한다고 자부하는 경제학에서는 ‘사용가치’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교환가치’만을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가치’로 한정시키고 있다.9) 이 ‘가치’가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상품의 ‘가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술했듯이 우리 노동자들이 지불하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에도 하나의 경제학적 ‘가치’, 가격이 존재하는 바, 이것이 바로 임금이며 ‘노동력의 가치’인 것이다. 따라서 상품 일반에 이중성이 존재하듯, 노동력이라는 상품에도 위와 같은 이중성이 있다. 즉, 인간의 협동적 행태, 분업을 비롯하여 사회적으로 조직된 총노동, 그리고 인간 본연의 창의성을 기반으로, 그 자체로는 잠재가치에 불과한 물적 대상들에 변화를 가하여 현실적인 가치-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사용가치’로서의 본질적 측면, 다른 한편으로 생산된 상품이 시장에서 교환되기 위해 측정되는 가치척도로서의 현상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로써 노동의 사용가치로서의 전자는 ‘노동의 가치’라 하고 후자를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교환가치를 형성하는 ‘노동력의 가치’라 하여 양자간에 본격적으로 구분선을 그을 수 있다.
상품의 가치가 측정되는 척도로서 그 상품에 결합된 노동력은 시간으로 측정되어 왔는데, ‘노동의 가치’로서의 본질은 질(質)적인 측면을 지칭하는 데 반하여 ‘노동력의 가치’로서의 현상형태는 시간으로 측정되는 양(量)적인 측면을 지칭한다. ‘사용자는 근로계약 체결시에 근로자에 대하여 임금, 근로시간, 기타의 근로조건을 명시하여야 한다’며 ‘근로조건의 명시’에 대하여 규정한 근로기준법 제 24조 조항에서 보듯이 노동자가 결국 임금과 맞바꾸는 것은 자신의 노동 자체가 아니라 양적으로 표현된 노동, 즉 일정한 노동량이며 이는 본질적인 ‘노동의 가치’가 아닌 ‘노동력의 가치’인 것이다. 봉급쟁이들이 가진 것이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다고 해서 ‘몸을 팔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단지 ‘노동력’이라는 상품만을 팔며 살아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상으로도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그렇다면 더더욱 ‘자유경쟁’의 시장경제에서는 임금과 노동력을 맞바꾸어 교환하는 자본가와 노동자 또한 실제로는 어떠하든 일단 법적으로는 평등하다. 노동력을 팔았다고 해서 노동자의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인격, 본성, 권리 자체를 팔았다는 의미가 아닌 것인데, 이것이 고대사회의 노예, 중세사회의 신분제적 농노와 다른 점이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노동자계급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현대사회의 임금노동자들이 근대적 의미의 ‘프롤레타리아트’, 이미 화석화되어 버린 낡은 계급주의적 관념으로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갈수록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지금은, 지난 역사에서 항상 소외되어 왔고 객체로만 머물러 왔던 대다수 사람들에게 ‘계급’의 형태로든 ‘대중’의 형태로든 사회의 구성과 발전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과 지위가 주어져야 할 시점이며, 현재 이 대다수 사람들의 존재적 근거가 되는 것이 다름아닌 노동이라는 것이다.10)
임금과 자신의 능력으로서의 노동력을 교환하는 우리 사회 모든 봉급쟁이들, 즉 임금노동자들에 대하여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 글 첫 장에서부터 지루하게 고찰해 온 본질적 노동, ‘노동의 가치’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여 양적으로 표현된 ‘노동력’과 그것의 ‘가치’에 대해 주목해야 하고, 임금노동자 즉 봉급쟁이인 우리들이 상품으로서 판매한 노동력에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고 있는지, 사회 대다수인 봉급쟁이들에게 사회적 노동을 통해 축적된 사회적 부(富)가 정당하게 분배되고 있는지 고려해야 함은 물론, 우리 사회에서 임금노동자 즉 노동자계급이라는 ‘대규모 집단’의 사회적 지위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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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태어나서 당연하게 누려야 할 기본권으로서의 ‘인권’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며 평등하기에 법률상의 조문으로만 규정된 형식적 평등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평등한 ‘인권’을 확보해야 하는 출발점은 다름아닌 우리들의 ‘노동’일 것이다.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의 노동3권을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노동(勞動)이 곧 인권(人權)인 것이다.
 
(2003년 6월)


주)


1) 고전경제학의 맥을 잇는 주류경제학(主流經濟學)과 다르게 인류의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하나의 과학으로서 경제학에서 또다른 주류를 형성하는 정치경제학에서는 노동을 통해 최종적으로 발현된 가치를 ‘이윤(利潤,profit)’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뭉뚱그려 표현하지 않는다. 상품생산의 요소를 불변자본으로서의 생산수단, 가변자본으로서의 노동력으로 분화하여 더 많은 가치는 노동(력)에 의하여, 나아가 절대적으로는 초과노동을 통하고 상대적으로는 자본의 투하 혹은 재투자를 통한 기술혁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가변자본으로서의 노동(력)이 생산해내는 가치를 ‘잉여가치(剩餘價値,surplus value)’라 엄밀히 규정하고 있다. 즉, 상품생산과정에서 노동이 결합됨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만들어내는 증가된 가치, 또는 ‘최초의 가치를 넘는 초과분’(아래책)을 ‘잉여가치’라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산업활동에서의 이득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이윤’이라는 개념에는 생산과정 및 생산요소들의 기능에 대한 언급이 없다. 여기에서 간과하면 안될 것은 불변자본으로서의 생산수단에 투하되는 자본재투자와 축적의 과정도 인간이 한 가지 상품으로만 살아갈 수 없는 한은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기본적인 노동을 매개해야 하기 때문에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노동이라는 것이다.
“…노동과정은 노동력 가치의 단순한 등가물이 재생산되어 노동대상에 첨가되는 점을 넘어 계속된다. 노동력 가치의 등가물을 재생산하는 데는 6시간만으로 충분하지만, 노동과정은 이 6시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12시간 계속된다. 따라서 노동력의 활동은 그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초과가치를 생산한다. 이 잉여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와 그 생산물의 형성에 소비된 요소들(즉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차이다.”
(K. Marx, [자본론], 1867, <제3절 제8장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같은책.)
2) 노동의 양태가 각 경제체제에 따라 다르게 현상한다는 것에 대한 설명은 논의가 진전되는 과정과 함께 후에 다시 언급이 될 것이지만 해석의 차이에 따른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기본적인 내용만 우선 짚고 넘어가자. 즉, 인간의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라는 발전단계로 구분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고대사회에서는 사회계급의 차이에 따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유가 가능한 경제체제였기에 노동 자체도 다른 사람에 의해 전유(專有)되는 노예노동의 형태로, 중세사회에서는 농업의 발전과 함께 노동 자체가 전유되지는 않았지만 봉건지주들에 의한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이라는 명목하에 잉여가치의 가혹한 수탈을 기초로 한 봉건적 농노의 형태로,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중세에 그나마 가지고 있던 노동자의 생산수단에 대한 약간의 소유 자체도 완전히 박탈당한 채 가진 것이라고는 신체 하나로 시장을 통해 교환가치를 지니는 하나의 상품으로 전환된 노동력을 임금이라는 대가와 맞바꿀 수밖에 없는 임금노동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임금노동의 형태는 현대사회에서도 본질적으로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
3)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이사열전(李斯列典)>에 의하면, 이사(李斯)는 원래 초(楚)나라 사람으로서, 젊은 시절 지방의 말단관리로 있었을 적에 변소에서 더러운 찌꺼기를 먹던 쥐는 사람을 보고 놀라 급히 도망가는 반면, 커다란 곳간의 쥐는 좋은 쌀을 먹으며 사람이 와도 별로 놀라지 않는 광경을 우연히 목격하고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깨우침을 얻게 된다. 그는 곧바로 순자(荀子)를 찾아가 제왕의 법도를 익히고 약소국인 조국을 등지고 강대국 진(秦)나라로 가서 여불위의 식객을 거쳐 법가사상의 기반을 더욱 굳건히 하면서 진시황 정권의 재상으로서 중국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는데 일익을 담당한다.
4) 사회와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론에 기초하여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관계를 규명한 다음 문구를 참조해볼 만 하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 즉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력들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에 들어선다. 이러한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그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그러한 실재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과정 일반을 조건짓는다.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들은 그 발전의 특정단계에서, 지금까지 그것들이 그 내부에서 운동해 왔던 기존의 생산관계들 혹은 이 생산관계들의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관계들과의 모순에 빠진다. 이러한 관계들은 이러한 생산력들의 발전형태들로부터 그것들의 족쇄로 변전한다.’
(K.Marx,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 1859)
5) K.Marx, F.Engels, [독일이데올로기], <제1편 1-3 ‘생산과 교류, 노동분업과 소유형태> 참조.
6) ) ‘구매를 위한 판매’만을 상정하는 단순상품생산은 재화 자체의 사용가치 취득 및 그 재화를 통한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서 기능하는데, 자본주의 생산체계에서 최종적 형태로서 화폐로 현상하는 자본은 끊임없는 투하 혹은 재투자를 통해 자기가치증식 운동을 지속한다. 사회적 계급으로 표현되는 ‘자본가’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이 운동에 있어 이른바 ‘인격화된 자본’이다.
‘…가치의 증식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자본의) 운동의 내부에서만 실현되므로,,, 자본의 운동에는 한계가 없다… 이 운동의 의식적 담당자로서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 된다. 그의 일신(또는 보다 정확히 말해서 그의 주머니)은 화폐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이러한 유통의 객관적 내용(가치의 증식)이 그의 주관적 목적이 되고 추상적 부를 점점 더 많이 취득하는 것이 그의 행동의 유일한 추상적 동기로 되는 한에 있어서만, 그는 자본가로서-즉 의지와 의식이 부여된 인격화된 자본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K. Marx, [자본론], <제2편 제4장, 자본의 일반공식>)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하나의 ‘대규모 집단’인 계급으로서 자본가는 단지 돈이 많은 사람, 화폐를 많이 소유한 사람들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7)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는 전술했듯 산업사회에서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와는 전혀 상관없는 계급의 표현으로서 산업의 발전과 함께 농촌에서 쫓겨난 농민, 사회적 부를 분배받지 못한 채, 사회적 부에 대한 일체의 소유와는 전혀 상관없이 도시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빈민들을 이론적으로 지칭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어원은 라틴어의 Proletarii에서 나온 것으로서 로마의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인구조사때 국가에 대한 존재가치가 오직 자손들(Proles)을 기르는 임무 외에는 없는 사람들에게 붙여졌다. 즉, 부나 지위, 특별한 능력 면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했다.’(J. London, [강철군화(Iron Heel)]의 각주에서 인용)
8) ‘상품은 사용가치(사용대상)임과 동시에 가치인 것이다. 상품은, 자기의 가치가 자기의 현물형태와는 구별되는 하나의 독특한 표현형태, 즉 교환가치를 가지게 될 때, 그 이중성을 드러낸다. 상품은 고립적으로 고찰될 때에는 교환가치라는 형태를 취하는 일이 없고, 그와 종류가 다른 한 상품에 대한 기치관계 또는 교환관계에서만 이 형태를 취한다.’
(K. Marx, [자본론], <제1절 제1장>)
사용가치는 모든 물질이 그 자체로 지니고 있는 가치,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고립된 가치로서의 본질을 의미하며 교환가치는 이 재화들이 시장을 통해 교환을 매개로 하는 상호관계를 이루게 될 때 측정되는 현상형태를 의미한다. 외부로 보이는 겉모습만이 아닌 물질의 본모습을 추적하는 철학적 사고방식에서 보면 상품만이 아닌 세상의 모든 물질은 현상과 본질이라는 이중적 모순에 기반한다. 물론 양자간에 어느 것이 우위에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9) ‘경제학이 ‘노동의 가치’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사실상 (노동자라는 인물 속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노동력의 가치’이다… 노예노동에서는 소유관계가 노예의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을 은폐하는데, 임금노동에서는 화폐관계가 임금노동자의 무상노동(부불노동)을 은폐한다… 화폐는 그 지불수단으로서의 기능에서는 제공된 물건의 가치 또는 가격을, 따라서 이 경우에는 제공된 노동의 가치 또는 가격을 추후에 실현시킨다. 마지막으로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제공하는 ‘사용가치’는 실제로는 그의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력의 기능, 즉 재봉노동, 제화노동, 방적노동 등등과 같은 일정한 형태의 유용노동이다. 바로 이 노동이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를 창조하는 일반적 요소라는 것, 그리하여 이 속성에 의하여 노동은 다른 모든 상품과 구별된다는 것은 일상적인 의식으로서는 인식할 수가 없다.(K.Marx, [자본론], <제6절 임금 제19장 노동력 가치의 임금으로의 전환>)
10) 본 글에서 ‘계급’을 다루었다고 해서 노동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굳이 ‘계급적’으로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하며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은 지칭하는 말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궁극적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발전시키는 한 주체로서의 정당한 사회적 지위만 인정될 수 있다면 노동하는 대다수 사람들을 어떠한 단어로 표현하든 무방할 것이다. 그에 대한 일례로 이탈리아 출신 정치학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의 규정으로서 ‘대중 노동자(mass worker)’와 같은 개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1968년까지 시기의 노동자에 대한 규정이다. 자본주의와 독점의 발전에 따라 세계는 초국적 자본의 지배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나 ‘대중 노동자’는 여전히 현대자본주의 초기의 포드주의적 대량 생산체계 속에 종속되어 탈숙련화되어 있으며 케인즈주의적인 개입주의 국가에 의해 지배되는 상태에 있다고 한다. 초국적 자본으로 대변되는 현재의 ‘제국’의 시대에서 그 변화와 대항의 주체로서 안토니오 네그리는 ‘대중(Multitude)’을 설정하고 있는데 이는 현대사회에 의해 일방적으로 구조화되고 획일화되는 수동적인 ‘대중(Mass)’과는 달리 다양한 공통성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주체적인 욕망과 주장들을 결집해 나가는 무리를 지칭한다는 것이다.(A.Negri, M.Hardt, [제국(Empire)], 2000, 윤수종 譯, 이학사, 2001. 참조) 이 다양한 ‘공통성’중 하나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노동’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그러므로 현대사회의 한 축을 형성하는 거대한 무리로서 ‘대중 노동자’를 설정함에 무리가 따르지만은 않을 것이다.


*** [자본론] 관련 저서 소개


1. [자본론] 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 [자본론]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원어 그대로 번역하면 [자본]이다.
[자본론]권은 ‘상품’에서부터 시작하여 ‘화폐’로 전환되고 다시 ‘상품’으로 재전환하는 다분히 도식적이지만 가장 단순한 과정을 분석하면서 생산적 ‘노동’이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만 이 가치가 전부 ‘지불’되지 않은 채 ‘부불노동’의 형태로 자본에 의해 착취된다는 결론을 내리며 ‘자본의 인격화된 형태’로서 자본가는 이 잉여가치를 확대하기 위해 노동시간을 늘리는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과정’에서 기술발전과 자본투자를 통해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자본의 축적’은 결국 ‘노동을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선학들인 아담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등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의 개념인 ‘가치’ 개념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구분하고, ‘노동’ 개념을 ‘노동’과 ‘노동력’으로 구분하는 ‘문제의식 변경’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 분석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유산을 남기고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에서 ‘자본의 생산과정’을 분석하면서 자본이 노동에 대한 착취를 통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본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면서 축적되는 단계를 분석했다면, 마르크스 사후 그의 초고들을 가지고 엥겔스가 편찬한 [자본론] 2권은 ‘자본의 유통과정’을 분석하면서 자본이 운동하는 방식을 추적하는데 이러한 자본의 유통은 “잉여가치가 생산된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잉여가치가 자본화된 것, 즉 자본이 축적된 것을 표현”함으로써 자본유통과 회전의 결과는 “최초의 자본가치와 그것의 운동을 통해 축적된 자본의 가치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한편에서는 화폐로 실현된 잉여가치의 일부가 유통으로부터 끌려 나와 퇴장화폐로서 적립된다면, 동시에 잉여가치의 다른 부분은 끊임없이 생산자본으로 전환된다”고 하며 ‘확대재생산’의 형태로서 자본의 축적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원과정인 ‘단순재생산’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즉, 잉여가치는 ‘자본의 유통과 회전과정’이 아니라 이미 ‘자본의 생산과정’에서 생산됨을 증명하고 있다.
[자본론] 3권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과정’을 분석하면서 자본의 생산과정에서 노동을 원천으로 하여 발생한 잉여가치가 전 자본주의적 총생산과정에서 이윤으로 전환하는 과정과 지대와 이자 등으로 배분되는 과정을 그리면서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평균이윤율이 저하되는 경향’이 있음을 주장한다. “자본구성의 이러한 점진적 변화가 어떤 개별 생산분야의 특징이 아니라 거의 모든 생산분야 또는 적어도 결정적인 생산분야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따라서 그 변화가 그 사회의 총자본의 평균적 유기적 구성을 변화시킨다고 가정한다면, 가변자본에 대비한 불변자본의 이러한 점차적 증가는-잉여가치율 또는 자본의 노동착취도가 불변이라고 가정한다면- 필연적으로 일반적 이윤율의 점차적인 저하를 초래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레닌은 1915년 [철학노트]의 <변증법의 문제에 대하여>라는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맨먼저 부르주아(상품) 사회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평범하고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대량적이고 가장 일상적이며 헤아릴 수 없이 목격되는 단계, 즉 상품교환을 분석하고 있다. 그 분석은 이 가장 단순한 현상 속에서(부르주아 사회의 이 ‘세포’ 속에서-개별로서의) 현대사회의 모든 모순(혹은 모든 모순의 맹아)을 폭로한다. 계속되는 서술은 이 모순의 발전(성장은 물론 운동도)과 그 개별 부분들의 총합(Σ) 속에서 이 사회의 발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방식은 또한 변증법 일반의 서술(내지 탐구)의 방법임에 틀림없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평범하고 가장 대량적인 것 등등으로부터 시작하면,… 이미 이 속에는 (헤겔이 천재적으로 지적하였듯이) ‘개별은 보편이다’라는 변증법이 존재한다… 이리하여 대립물(개별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에 대립한다)은 동일적이다. 변증법은 다름아닌 (헤겔과) 마르크스의 인식론이다.”
 
2. [자본론공부], 김수행 지음,  <돌베개>, 2014.
: 우리나라 최초로 칼 마르크스 [자본론]을 번역하여 출간한 김수행 교수가 세월호 정국에서 새롭게 출간한 [자본론] 해설서. 김수행은 <서문>에서 “이 책은 방대한 [자본론] 1~3권의 내용을 단순히 요약한 것이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를 어떻게 비판했고 어떻게 찬양했는가를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미래 사회의 태아를 자본주의가 잉태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에 주목할 것을 강조합니다.”라고 적고 있다. ‘자본의 생산과정’을 분석한 [자본론]권에 대한 해설, ‘자본의 유통과정’을 분석한 [자본론]권에 대한 해설,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과정’을 분석한 [자본론]권에 대한 해설을 하고 있으며, 특히 [자본론]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평균이윤율 저하 경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자본론]1권 ‘자본의 생산과정’에서 자본의 축적 과정이 실업자를 점점 더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 마르크스는 3권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과정’에서는 자본의 축적 과정이 이윤율을 저하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전자가 자본주의의 발달이 노동자계급에게 주는 영향을 집약한 것이라면, 후자는 자본가계급에게 미치는 영향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업자의 증가 경향과 이윤율의 저하 경향은 모두 자본가들이 상대적 잉여가치를 증가시키기 위해 기계화자동화로봇화를 도모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즐겨 사용하는 ‘경향’이라는 용어는 ‘법칙’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경향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상반되는 경향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자본의 축적 과정에서 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기계화가 진행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런데 이 기계화는, 한편에서는 면방적 기계가 물레를 돌리는 노동자들을 축출하여 실업자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면방적업을 크게 확장시킬 뿐 아니라 면방직업과 의류업을 활성화시켜 수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경향도 낳는다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기계화는 한편에서는 실업자를 만들어 내는 경향을 가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취업자를 증가시키는 경향을 가지는데, 마르크스는 이 두 경향 그 자체를 각각의 법칙으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기계화는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함으로써 실업자를 증가시키는 ‘경향’ 또는 ‘법칙’을 가지며, 기계화는 투하자본의 규모를 증가시켜 실업자를 감소시키는 ‘경향’ 또는 ‘법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계화가 실업자를 증가시킬 것인가, 아니면 감소시킬 것인가는 이론 차원에서는 판명할 수가 없고, 현실에서 판명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윤율의 저하 경향’도 ‘이윤율의 상승 경향’과 나란히 각각의 법칙으로 제출된 것이고, 현실적으로 이윤율이 저하한다고 예측한 법칙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자본을 넘어선 자본], 이진경 지음, <그린비>, 2004.
: 1980년대 남한사회 ‘사회구성체’ 논쟁을 촉발한 [사회구성체와 사회과학방법론]의 저자인 이진경이 1990년대 들어 고전적 인식론에서 ‘탈주’하여 ‘근대성 탈피’를 화두로 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영역과 미셸 푸코, 질 들뢰즈 등의 유목주의(노마디즘)적 철학의 우회로를 통해 다시 마르크스에게로 돌아오면서 발간한 책. 자본주의 '이후'가 아닌, 현재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그 '외부'를 사유하고, 미래의 '공산주의'가 아닌, 현재의 '꼬뮤니즘'을 그리고 있다. 고전으로서의 [자본론]을 공부하고자 할 때 해설서로서 참고할 만한 책이다.
 
4. [자본론을 읽는다],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진엽 옮김, <두레>, 1991.
: 칼 마르크스 사후 [자본]권과 권을 편찬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84년 [자본론] 2권 <서문>에서 “선학들이 해답을 본 곳에서 그(마르크스)는 문제만을 보았다.”고 하였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그의 제자 에티엔 발리바르와 함께 [자본론을 읽는다](1965년)라는 연구작업을 통해 “마르크스의 이론적 혁명은 그 답의 변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변경’에 있다는 것, 따라서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의 혁명은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의 지형으로부터 과학의 지형으로 옮긴 ‘제요소의 변경’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라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정치경제학’ 텍스트가 아닌 ‘철학적’ 텍스트로 다시 독해하고 있다. 알튀세르는 “[자본론]에 대한 철학적 독해는 우리의 연구대상 그 자체인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 적용해야만 가능할 뿐이다. 이 원환이 인식론적으로만 가능한 이유는 마르크스주의 저작 속에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실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정확한 의미에서 생산한다는 문제이다. 생산한다는 말의 의미는… 실제로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 실존하고 있는 것을 (목적에 적합한 대상의 형태를 이미 존재하는 원료에 부여하기 위해) 변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생산은 생산작업에 원환이라는 필연적인 형태를 준다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지식의 생산’이다”라고 하면서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다루는 ‘인식의 대상’을 ‘실재적 대상’과 ‘지식의 대상’으로 구별하는데 [자본론]에서 탐구하는 영국은 실제 자본주의 선진국으로서의 영국의 정치경제체제가 아니라 “추상적으로 분석되어지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알튀세르는 구조주의 철학자답게 “정치경제학의 진실된 ‘주체’는… 생산관계들, 그리고 정치적 및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들”이라는 전제 하에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논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제 양식의 ‘이상적 평균’은 “현실에 대한 (이론적) 개념을 의미”하며 “마르크스의 이론적 대상은 영국이 아니라 그 ‘핵심적 형태’와 그 ‘핵심적 형태’의 결정에 있어서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며 자본주의 생산양식 연구에 있어 완전히 ‘순수’할 수는 없으나 하나의 ‘모델적 사례’로 다루어지는 영국과 관련하여 “영국 자본주의의 불순성은… 생산양식들의 이론과 관련한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한 생산양식으로부터 다른 하나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이론과 관련된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이론은, 모든 각각의 생산양식이 이전의 한 생산양식의 존재형태들로부터만 구성되기 때문에 하나의 일정한 생산양식의 구성과정에 대한 이론인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즉,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당시, 특히 자본주의 ‘선진국’으로서의 영국의 자본주의 현실 체제를 분석한 것이 아니라 영국이라는 ‘이상적 평균모델’을 통해 ‘상품’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개별적인 형태로부터 시작하여 ‘자본주의 총생산’의 가장 복잡하고 보편적인 ‘생산양식의 구성과정’을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5. [철학노트],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지음,  홍영두 옮김, <논장>, 1989.
: 1914년 제국주의 세계전쟁과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배신 국면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출구를 찾기 위해 레닌은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저술할 때 그러했듯 망명지의 도서관에서 틀어박혀 헤겔로 되돌아간다. 이전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주제도 ‘철학’이었지만 이는 경험주의, 상대주의인 오스트리아 마흐주의식의 ‘경험비판론’에 대한 다분히 논쟁적 의도로 저술되었고, [철학노트]에서는 헤겔의 [논리학] 적요를 시작으로 ‘존재론’, ‘본질론’, ‘개념론’ 등 철학의 ‘기본개념’부터, 즉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다. 레닌은 ‘헤겔 속의 유물론’을 재발견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 헤라클레이토스 등 철학의 ‘대선배’들의 사상 등도 두루 재학습하고 있다. [철학노트]는 헤겔의 [논리학]은 물론, [철학사 강의], [역사철학 강의] 등에 대한 적요 등을 포함하면서 관념론 철학의 완성체로서의 헤겔을 철저히 분석하고 정리한 대량의 노트라 할 수 있다. 그람시의 [옥중수고]와 같이, 발간목적이 아닌 마르크스주의, 과학적 사회주의의 재정립이라는 확고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진행한 방대한 학습노트, 수고록을 나중에 엮은 것이다. 철학학습을 시작하는 레닌의 ‘금언’은 다음과 같다.
“헤겔의 논리학 전체를 철저하게 연구하지 않고 또 이해하지 않고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특히 제1장(상품)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반세기를 경과하였지만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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