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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Apr 11. 2020

[단편 습작](1999) - 송용원

[제 4의 점령(占領)] - 1999. 8.

[제 4의 점령(占領)] - 1999. 8.
 




"사람은 누구이든지  1,  2 점령 범위 내에서는 자유인 상태에 있다.  말하자면 앞으로 걸을 수도 있고 또한 옆으로도 누울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  3 점령은 용이히 자유로운 상태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 땅에서 조금이라도 높이 뛰어오르려 해도 결국 지구의 인력에 저지되어 얼마   없다. 그러나 당세기에 있어 비행기의 발명은 결국 인류를  3 점령에서 비교적 완전히 탈출시키고 말았다. (……)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그칠 바를 몰랐다.  4 점령에다 자유해방을 구하여 결국 예술을 낳아놓고 말았다."
- 林和, <근대문예잡감>,《매일신보》, 1926. 5. 23.
 

 1 점령은 ()이다.  공간 아닌 공간에서는  어떤 것도 옴짝달싹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자유롭다. '자유'라는 실체적 개념조차도 허락될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2 점령은 ()이다.  공간 비슷한 공간에서는   가지의 방향밖에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자유롭다. 나아갈 곳이 정해진  '자유'라는 말조차도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3 점령은 ()이다. 공간으로서의 그야말로  공간은 나아갈 바가 자유롭게도 많은 현실이다. 그러나 자유롭지 못하다. 현실이란 '자유'라는 어휘 자체도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 없음에 자유롭고 정해진 '자유'이기에 자유로우며 자유롭기에 자유롭지 않은  투성이다, 온통.
그러나 아직 하나가  남아있다.
 4 점령은……



1.

땀 한 방울이 관자놀이를 거쳐 그의 뺨 위로 흘러내린다. 그리하여 그의 메마른 얼굴 오른쪽 측면에는 기어이 한 줄기의 물골이 생기고 만다. 4월 말의 봄날 아침은 싱그럽고 화사한데 끈적한 땀으로 얼굴에 줄을 긋고 있는 사람은 그 혼자인 듯 하다. 언제나 그랬던 건 아니었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데 나만 항상 이래 온 건 아니었던가……. 또 다시 시작되는 잡념. 이번 학기에 복학을 하자마자부터 계속 들었던 생각들이긴 했지만 그는 바쁘게 걷고있는 와중에도 한참동안 눈을 한 번 감았다 뜬다. 왜 또 이러나 싶다. 끔찍한 일을 당하고 경찰서를 몇 번 들락거리다 보니 안 그래도 심란한 마음에 잡생각만 더 늘어가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땀 한 방울이지만 그를 짜증나고 답답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큰 숨을 한 번 내쉬어 보고는 오른손으로 땀이 흘러내린 얼굴을 훔친다.


'또 늦었군.'
지각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건만 이번 학기 들어서 그는 그 수업만도 벌써 세 번째 지각을 기록하고 있었다. 오전에 들은 다른 수업에는 솔직히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수요일과 금요일 아침시간에 걸려있는 그 수업에만큼은 남다른 관심을 두어 왔다. 그렇다고 그 수업이 그의 전공인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유익한 강의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어찌보면 지루하기 그지없었으며 더군다나 근래에 벌어진 안 좋은 사건과도 관련된 수업이었다. 그런데도 좀더 특별한 관심이 가는 건 그 스스로도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물론 수업이라는 것만 두고 따진다면, 강의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는 그로서는 정말 생소함 그 자체였다. 군에 가기 전 6학기 동안 지각이라는 것도, 결석이라는 것도 수시로 했고, 제대 후에 바로 복학을 한 이번 학기에도 다른 오전수업에 몇 번 늦기는 했지만 그 어떤 수업도 그에게 이런 느낌을 안겨준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지난 수년간 학교 수업이라는 건 그에게는 별수롭지 않은 '시간 때우기'에 다름 아니었다. 군에 가기 전에 그는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던 제도권 내의 교육들에 조소를 보내었고 과외로 이루어지는 학습, 활동 따위에 그 나름의 가치를 두며 강의실 밖을, 학교 밖을 돌아다니기 일쑤였다. 그에게 있어 학교 수업이란 단지 대학 졸업장을 얻기 위해 형식상 채워넣어야 하는 빈 칸에 불과한 것이었다. 제대 후 학교로 돌아와 다시 시작한 4학년 1학기에도 그는 지각을 일삼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복학한 학기에도 이전처럼 다른 것에 나름의 가치를 두고 그것에 달겨붙는 건 아니었다. 아닌 말로 학교에서 그가 하는 일이란 짜여진 시간표에 맞춰 수업 듣고 도서관에 가서 인문학 관련 서고를 서성거리거나 가끔 동기, 선·후배들과 식당에서 밥먹는 일, 저녁 늦게 술자리에 앉아 있는 일 정도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못된 버릇 남주기 아까웠는지 그는 4학년 1학기에도 이유없이 지각을 일삼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복학하면서 지녀온 막연한 공허함에다가 두 주전에 겪은 괴이한 일이 얼키고 설킨 복잡한 심경에도 불구하고, 여타 수업과는 달리 그 수업에 유별난 관심을 갖게 되는 자신이 이상스럽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4월 일 수요일 '한국 근·현대 문학사' 휴강.
수업 시작시간이 약 10여분 정도 지난 후 그가 강의실에 도착했을 때, 많은 학생들이 그곳 주위에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강의실 문은 앞뒤로 활짝 열려있었고 그 수업을 듣는 국문과 3, 4학년 학생들은 강의실 의자에 앉거나 몰려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간의 왠지 모를 불안한 짐작으로 그는 잼처 휴강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강의실 칠판에 적힌 '휴강'이라는 흰 글씨를 부러 확인하고자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자 언제고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듯한 알 수 없는 느낌이 그를 압도해 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L형을 찾고 있었다. L형은 아직 오지 않은 듯 했다. 그래서 그는 되는대로 안면이 있어 보이는 학생 하나를 잡아 물어보았다.
"이번엔 왜 또 휴강이랍니까?"
"또 죽었대요."
순간, 그는 뭔가 불길한 것이 자신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가고 있음을 강렬하게 느끼면서도 일부러 태연한 척 물었다.
"또요? 이번엔 누굽니까?"
"글쎄요. 몇 분전에 국문과 조교가 들어와서는 어젯밤에 국문과 3학년 K가 죽었다고 하더니 오늘은 수업이 없을 거고 조금 있다가 관할 경찰서에서 조사차 나올 거니까 자리 지키고 있으라고 하면서 나가던데요…… 나 참 무서워서 학교 다니겠나……. 난데 없이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학생은 그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혼잣말인지 모르게 한 번 내뱉고는 옆에 있던 학생들과 다시 어울려 수군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정말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평소에는 딱히 그렇다 할 수 없었으나 막상 그 일이 닥치고 난 후에의 돌아봄, 언제고 이런 일이 또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안 좋은 예감의 뒤늦은 확인……. 일이 어떻게 해서, 또 왜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는 그저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정신없이 강의실 주위에 모여있던 학생들을 제치며 L형을 찾기 시작했다. 마치도 당시 그가 해야 할 일이 오직 그것밖에 없을 것처럼.
'이번엔 K인가……. 정말 이런 일이, 그것도 내 주변에서 어떻게 연이어 일어날 수 있는건가.'
언제 왔는지 L형은 언제나처럼 강의실 맨 오른쪽 벽면 제일 앞자리에서 신산스런 표정을 하고는 앉아 있었다.
 


2.
 
"형, 어쩌면 좋죠?"
아무말 없이 둘이 담배만 축내던 중 답답증을 느낀 그가 먼저 이야길 꺼냈다. 눈부시도록 화사함을 자아내는 봄날 오전, 강의동 뒤편의 벤치들 주변에는 봄햇살을 쬐려는 듯 적지않은 학생들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고, L형은 그저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담배만 빨아대고 있었다.
"혀엉, 말좀 해봐요오!"
"무슨 말을 하란 말이야."
가뜩이나 심사가 귀살스러운 마당에 그가 자꾸 대책없는 채근만 해대고 있으니 L형도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이번엔 K래, K."
"그게 어쨌다는 거냐고."
"얼마 전엔 P가 죽었고, 이번엔 K잖아. 생각해 봐요. P나 K나 다 우리 조였잖아."
"……."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 저번에 P가 죽었을 때도 다른 사람들보다 몇 번이나 더 경찰조사를 받아야 했잖아요. 단지 같은 발표조였다는 이유로 따로 경찰서까지 들락거리면서."
"야, 걔하고 친했던 몇몇 친구들, 그리고 담당교수, 조교들도 다 그랬어. 넌 그저 경찰서 드나드는 그것만 걱정되니?"
"아니, 솔직히 이전엔 가두시위 나갔을 때 한두 번 달려갔다가 훈방 먹고 나온 적은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이런 일에 연유돼서 들락거린다는 게 왠지……, 꼭 걔네들 죽음이 우리랑 크게 관련된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말이지."
실상 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당장 답답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생각만이 그를 꼼짝 못하게 깔고앉아 있는 듯 했다. 형사들이 오늘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간단하고 형식적인 조사만 끝내고 갔지만, 며칠 있다가 분명 그와 L형도 저번에 P의 사건때처럼 경찰서에서 따로 조사를 받아야 하는 터였다. 그러나 K와 관련하여 이번에 받아야 할 조사는 저번에 P가 죽었을 때하고는 다를 게 확실했다. K와 P, L형과 그는 모두 같은 발표조였으니까. 그랬기 때문에 그는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너무 생각없이 입을 놀렸음에 막바로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은 P와 K에게 그는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를 L형은 가증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듯 했다. 하기야 같은 과 후배들의 죽음을 연이어 겪은 L형 앞에서 그가 체신머리없이 굴어서는 안 되는 것이긴 했다.
 

3.

K는 그 수업이 있기 전날인 화요일 새벽,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적한 골목에서 비명횡사했다고 했다. 1차 사체부검 결과 K의 몸에서 약간의 구타 흔적이 확인되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죽은 것 같지는 않은 듯 했다. 그보다는 둔기에 의한 듯한 후두부의 결정적인 타격과 심장마비 증상의 복합적인 작용이 직접적 사인인 것으로 일단 결론지어졌다. 시체의 위를 검사한 결과 K는 술을 많이 마신 것으로 판명이 났는데 심장마비 증상은 그것에 기인한 것 같다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그와 L형은 따로 참고인 조사를 받고 다음의 협조를 약속하며 관할 경찰서를 나온 후 담당 교수를 찾아가 조사결과와 K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오는 길이었다. P의 죽음과의 관련성에 대한 의혹에서였는지 담당형사와 마찬가지로 교수도 죽은 학생들과 함께 지낸 시간들에 대해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수업진도상 아직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같이 발표준비를 하고 그들 나름대로는 보고문 초안까지 작성한 터라 같이 모이는 기회가 다른 학생들보다 많을 수도 있었고, 그러므로 관련성을 논한다면 그와 L형도 '용의자' 리스트에 오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년을 얼마 안 남긴 이 노교수는 몇 마디 물어보다가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나가보라는 손짓을 하고는 회전의자에 앉은 채 그들로부터 등을 돌려 버렸다.
"형, 정말 우리랑은 아무 관련 없는 거겠지?"
교수실을 나온 후, 문과대학 건물 옆길을 따라 내려오는 내내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던 L형이 약속이 있다며 먼저 가려고 할 즈음에 그가 말했다. L형은 벌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는 그를 돌아보았고, 담배나 하나 피우자며 문과대 건물 옆 그늘에 있는 벤치로 먼저 내려갔다.
"그렇지. 형? 형도 그렇게 생각하지? 봐, 죽은 애들한테는 되게 미안하지만 말이야, K는 술을 많이 마신 날 새벽에 사고를 당했고, P는 도서관 옆 공터에서 후문 계단 쪽으로 떨어진 건데, 우연한 사고일 수는 있어도 우리와는 직접적인 관련을 찾을 수가 없는 거 아냐?"
"그건 말 그대로 정말 우연한 사고라고 전제했을 때의 얘기지. K같은 경우, 조사결과를 더 봐야 하겠지만 일단 타살이라고 결론난 게 거의 확실하잖니. 만약에 P까지도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살인을 당한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지는 거야."
"고의적인 살인? 형 정말 걔들이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아직 어린 학생들이 살면서 무슨 원한을 그리도 오지게 지고 살았다고 살인은 살인이야. 그것도 고의적인. 아냐, 말도 안돼. 다른 곳도 아닌 학교에서……. 에이, 그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야. 아닌 말로 흔치는 않지만 술 많이 마셨을 때 생판 모르는 사람과 시비가 생겨서 싸우다 그리 되었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아주 우연한 사고라고 장담할 수만은 없잖니. 나도 그렇지 않길 바라지만 만약 이 사건이 일종의 연쇄살인의 성격을 띠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 발표조와 어떻게든 관련된다고 한다면……, 글쎄…… 다음은 너나 나 차례가 아닐까?"
"뭐라고? 형……, 아니 형, 형 지금 제정신이야?"
"농담이다, 임마. 푸하."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렇지. 무슨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아이고 가슴 떨려. 어떻게 그런 농담을 해요……."
K의 죽음 이후 L형과 함께 있는 동안 처음으로 가진 농담이었지만 그는 가슴이 사뭇 떨려왔다. 이건 뭐 서스펜스나 호러를 다룬 영화나 소설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사는 현실인데, 그것도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설마하니 그럴 리야 있겠느냐며 픽션과 현실이 엄연히 다름을 강하게 확신해보긴 했지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관통하는 순간 그는 뭔가 섬찟한 기운이 골수를 타고 온몸으로 흘러내리는 듯 했다.
"신경쓰지 말자. 이건 정말 우연한 사고일 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너나 나나 걔들한테 잘못한 건 없잖아. 우리만 결백하면 돼. 알았지? 자……, 안 내려갈래?"
"…… 급하면 먼저 가요."
사실은 혼자 남아있을 용기가 그에게는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아까의 그 섬뜩한 기분에 그 자리를 일어날 만한 힘이 더 없었던 듯 했다. L형은 그러면 그러라는 말을 하고는 태연한 듯한 뒷모습을 보이며 혼자서 에움길을 돌아 내려갔고, 그냥 멍하게 벤치에 주저앉아 있던 그는 간절한 담배 생각에 셔츠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L형.
L형은 '89학번이다. 그럼에도 '93학번인 그가 군에도 갔다 오고 복학을 해 4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학부생으로 남아 있었던 것인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90년 봄 3당 합당 당시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살이를 했고 거기에서 폐병을 얻어 나왔으며 그로 인해 군복무도 면제되었지만 몇 번에 걸친 거듭되는 휴학으로 인해 학부생활을 자그만치 11년째 하고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는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10년 내에는 졸업을 할 수 있었지 않느냐는 생각을 내심 하기도 했지만, 공연하게 지난 얘기 꺼내면 괜히 서먹해지기만 할 것 같고 해서 내색을 하지 않았었다. 여하튼 국문과에서 L형은 아직까지도 전설과 같은 선배의 입지를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사실의 진위와는 상관없이 '90년 봄 연행 당시 홀로 쇠파이프를 든 채 수많은 백골단을 상대로 대치를 하고 있었다는 L형의 이야기는 그 자체 신화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L형은 이런 저런 이야기들에는 무관하다는 듯 너무도 조용하게 학교만 다니고 있는 터였다.
그가 처음으로 L형을 만난 건 복학을 한 이번 학기에 들어서 '한국 근·현대 문학사'라는 국문학과 3, 4학년 전공수업에 들어간 후였다. 영문과인 그가 굳이 국문과의 전공을 들을 필요가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타과 학생이 국문과의 전공으로 분류된 그 수업을 들으면 안 된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졸업을 하려면 일정한 만큼의 일반교양 학점을 채워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가 그 수업을 듣기로 한 다른 한편의 이유는 그가 나름대로 문학이라는 것에 적을 두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대학 1학년때부터 3학년때까지 그는 문학이라는 것에 거의 무관심한 채 철학이나 역사 같은 것들을 중심으로 학습하며 활동을 했지만, 철학이라는 것은 그가 생각하기에는 이른바 '세계관'으로서의 위상, 나아가 현실변혁의 '사상적 무기' 정도로서만 유효했다. 그러나 이제 나름대로의 '치열한 학습과 실천' 후에 그에게 남겨진 건 그 자신의 삶에 있어서 붙잡고 늘어져야 할 구체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군생활 내내 고민해본 결과 그가 내린 결론이 바로 글쓰기였고 문학이었다. 어쨌건 그의 전공도 문학 아니었던가.
그랬던 그에게 화려한 운동의 경력과 '전설'을 지닌 L형이 예사롭지만은 않게 보였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처음부터 L형의 이와 같은 면모를 알고 만났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K를 통해 L형과 P를 만났는데, K는 그가 군에 가기 전부터 알고 있던 국문과 '94학번 후배였으며 서로 복학을 한 후에 다시 만난 터였다. 처음 '한국 근·현대 문학사' 수업 출석을 부를 때 영문과 학생은 그 혼자 뿐이었다는 사실에서부터 짐작은 했지만 이제는 학교에 아는 사람이 이렇게도 없다는 사실에 혼자 참담함에 괴로워 할 만큼 그에게는 아는 사람이 정말로 없었다. 게다가 그 수업은 그룹발표가 주를 이루는 수업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며 발표조에 끼어들어야 하는 것까지도 걱정 아닌 걱정이었다. 이전부터 뭐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그가 그러고 있을 때 혜성과도 같이 나타난 것이 K였다.
― 형, 같이 발표할 사람 있어요?
― 아니, 없거든. 너 나랑 같이 좀 하자.
그렇게 K는 자기와 같이 발표조를 꾸리기로 한 같은 과 후배 P와 대선배 L형을 그에게 소개시켜 주게 된 것이었다. P는 4학년인 '96학번 여자후배였고 놀라우리만치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말이 별로 없었으며 첫인상부터 샐쭉했다. 말이 없는 면에서는 K가 약간은 과장스러운 품으로 소개를 거창하게 해준 L형도 마찬가지였는데, L형은 가냘픈 몸매에 허여멀건 얼굴로 인해 '여성스럽다'는 인상을 풍겼으며 또한 나름의 '연륜'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 왠지 모르게 '권태'라는 단어를 떠올리게끔 하는 면이 있었다. 초면인 그로서는 상당히 어색한 처지였지만 그래도 잘 아는 K가 있었던지라 발표 주제를 막바로 물색하기 시작했다.
― 저……, 저는 웬만하면 카프문학 쪽으로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는지 그는 호들갑을 떨며 대뜸 제안을 하고 나섰다.
― 형, 여전하군요.
― 뭐, 그냥.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부분이야. P는 어때요? 괜찮겠어요? L형은요? 물론 찬성이겠지요?
P는 그저 난감하다는 듯 눈치만 살피고 있었고 L형은 뭔가 심각하다는 표정을 예의 권태로운 표정 위에 덮어씌우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K가 거들었다.
― 그래요, 그럼. 안 그래도 요즘 애들은 뭐 이런 데 별 관심도 없을 테니까 이래저래 밀릴 걱정도 없을 게고, 그냥 그렇게 정하죠. 그렇다면……, 좀더 세부적인 항목을 정해야 할건데. 어디 보자…….
아무리 초면인 사람들간의 만남이었다손 치더라도 좌중에 흐르는 지나칠 정도의 어색함을 역시 느꼈던지 K도 마찬가지로 호들갑을 떨며 교재를 넘겨 대었다.
― 그렇다면, '카프의 볼셰비키화 제창 이후의 전개양상'으로 하지.
L형이 불쑥 말했던 건 그가 K에게 '얌마, 목차를 먼저 봐야지'하며 역시 호들갑스레 면박을 줄 때였다.
그는 역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레닌주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로서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다고 내심 자부하는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레닌의 저서는 다른 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읽었노라 자신하고 있었으며 또한 아직까지 그의 책꽂이에는 레닌의 저서가 단행본으로만 여섯 권이 꽂혀 있는 터였다. 카프의 볼셰비키화를 논함에 있어서 이론적으로 레닌주의의 직·간접적 영향을 결락시킬 수는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발표준비를 하는데 있어 그가 레닌주의의 이론적 배경에 대해 조사하면 될 것이라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주제는 L형의 명령과도 같은 한 마디로 단박에 정해져 버렸고 그들은 틈틈이 조사를 하고 발표조 모임을 갖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던 중에 P가 일요일 밤 늦은 시각에 학교 도서관 삼층 공터에서 추락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4.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근래 우리 과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근데 그게 우연찮게도 본인이 맡고 있는 3, 4학년 학생들에게 닥친 사고였습니다."
K의 사고소식을 전해들은 그 주 금요일까지 수업에 들어오지 못한 담당교수가 그 다음주 수요일에야 강의실에 들어왔다. 한 눈에 보기에도 며칠새 더욱 연로해진 모습이었으며 말투도 평소와는 다르게 꽤나 정중했다.
"에,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국문과 교수 회의와 총장님과의 회의를 거친 바 잇따른 불상사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생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말자는 과측의 입장을 알려드립니다. 여러분들도 죽은 학우들의 명복을 빌어주는 한편, 수업은 수업대로 학과생활은 학과생활대로 이전처럼 충실히 해주길 바랍니다. 자, 휴강을 많이 했기 때문에 진도에 차질이 많이 빚어졌지요. 이미 발표준비를 마친 학생들에게는 미안하게 됐지만 교수가 직접 강의를 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서 수업을 진행하려 합니다."
그는 강의실의 맨 뒷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허탈하다는 생각이 잦아들었다. 그래도 그간 준비를 했는데 발표를 못하게 되니 아쉽다는 생각이었을까. 그가 P, 그리고 특히 알고 지내던 K의 죽음을 앞에 두고 내내 안타까워하지는 못할 망정 그런 어줍잖은 생각을 하는 자신이 참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언뜻 그의 눈에 L형의 모습이 들어왔다. K에게 한없이 미안하다며 속으로 연이어 되뇌이던 그로서는 이 수업이 시작한 이래로 항상 그래왔듯 맨 오른쪽 열 제일 앞자리에 언제나처럼 앉아있는 L형이 순간 야속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L형의 표정 또한 언제나처럼 권태롭게 보였다. 죽음마저도 권태로운 것일까, 저 형에게는……. '제 4의 점령'을 꿈꾸는 L형은 진정 그럴 수 있는가.


'제 4의 점령'.
언젠가의 발표조 모임에서 L형이 해준 이야기였다. 그들은 각자가 맡은 부분, 즉 그는 그가 내심 바랬던 대로 레닌주의의 이론적 배경에 대한 준비를, P는 카프 볼셰비키화 과정에서의 조직과 출판의 문제를, K는 볼셰비키화 이후 대두되었던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론에 대한 조사와 준비를 나름대로 하고 나서 각자의 초고들을 가지고 모였을 때였으니까, 얼추 세 번째 모임쯤 되었을 때였다. 바야흐로 그들 그룹의 총책임역을 맡고 보고문의 초고 아웃라인과 서론, 결론을 맡은 L형이 비로소 각자의 원고를 접수하고 종합하는 단계였다. L형이 말했다.
― 다들 알겠지만, 1931년에 이르러 카프는 중앙위원회 중심의 허술한 조직체계로부터 서기국 중심의 보다 견고한 체계로 나아가지.
항상 필요한 말 외에는, 즉 보고문 초안의 아웃라인은 어떠해야 할 것이라든지 누구는 무얼 맡아서 하면 될 거라든지 하는 말들 외에는 거의 입을 열지 않던 L형으로서는 그가 만난 이후로 가장 많은 이야길 했던 것으로 그는 기억한다. 더군다나 그날 L형의 말투는 참으로 이상하기 그지없었는데, 마치 남의 이야기가 적힌 책을 다른 사람에게 읽어주는 듯한 태도였다.
― 이는 표면적으로 보면 단순한 조직체계상의 변화라 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조직 볼셰비키화 과정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에 있어 볼셰비키화 과정이란 레닌의 조직이론 상으로 볼 때는 지하운동적, 불법적, 비합법적 투쟁을 이르기 때문이지. 특히나 식민지 상태에서 이중의 해방투쟁 단계, 즉 하나는 제국주의자들로부터의 민족적 해방이었고 또 하나는 아직 저발전 단계에 불과했지만 일제에 의해 그 자체로 이식(移植)된 자본주의적 토대로 인해 보다 절실해진 국내 지배계급으로부터의 해방이었지. 아무튼 그런 식민지적 단계를 거쳐야 했던 조선에서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훨씬 가중된 압제 속에서 더더욱 레닌의 비합법적 조직이론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투쟁방식은 레닌의 조직이론에 기초했던 만큼, 당(黨)없인 불가능한 것이었음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는 L형이 이토록 긴 언설을 쏟아내는 이유는 아마도 P를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간의 만남과 모임, 그리고 토론을 통해서 그는 '운동의 경력'면에서 존경할 만한 L형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상적 내용을 아는 대로 드러내 보이려고 노력을 했고 L형은 그런 그의 '이론'적 지식의 측면을 어느 정도는 인정해주는 듯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했던 것이 진정 무엇이었을까, 하는 회의에 잠기기도 했다. L형에 비하면 어린 후배에 불과한 그 자신도 L형과 같은 길을 가려 노력했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었을까. 그리고 단지 그것 뿐만이 아니라 이 어린 후배가 아직까지도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나 [철학노트] 같은 저서를 '위편삼절(韋編三絶)'하듯이 읽으면서, 그리고 틈틈이 인용하면서 그 나름의 이론적 신념과 그에 따른 학습도 끊임없이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그것이었을까.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졸업을 앞두고 어떤 식으로든 학교를 떠날 준비를 점차로 해야 하는 이 마당에 결국 그 어설픈 지식의 편린들만을 가소롭게도 남발하는 그 정도 얕은 수위의 이론적 천박함만을 드러냄에 그치고 마는가, 정녕 그 자신은 그러고 싶어하는 것인가……. 그건 아니라고, 정말 이런 걸 목적하고 살아온 건 아니었다고 그는 때마다 세차게 부인하고 싶었다. 괜한 자괴감에 혼자 사색에 잠겨있던 그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P를 흘깃 보았다. 하지만 P는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L형의 '강의'는 계속되었다.
― 결국 카프의 볼셰비키화는 조선공산당의 재건이라는 역사적 필연성이 낳은 부산물에 불과해. 서기국 중심, 기술부조직의 재편 등은 바로 이 당의 외곽단체로서 혁명투쟁을 수행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카프의 그런 움직임은 계획의 단계에서 멈추고 만다. 또한 너희들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이는 소위 ML당 사건, 즉 조선공산당 재건의 움직임이 일제에 의해 저지된 것과 관련하여 당연히 결과된 것이지.
P가 약속이 있다면서 일어난 건 그때였다. L형의 지루한 '강의' 내내 한눈을 팔고 있던 그녀는 결국 자신의 초고를 L형에게 건네주고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도서관 앞길을 내려가 버렸다. 그의 눈에도 야속하게 비칠 정도로 뒤도 한 번 안 돌아보고 가던 P의 뒷모습.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게 그가 본 P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L형은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듯 했지만 이내 하던 말을 이었다.
―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얘기했던 건 표면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진,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역사해석일 뿐이다. 고고한 척 하는 역사학자나 문학사가들은 그 이상 나아갈 수가 없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들을 뛰어넘는 역사인식이 필요하다. 즉 우리는 카프 볼셰비키화의 좌절 과정에서 당시 카프 서기장이었던 임인식(林仁植)이라는 인물, 즉 시인이자 비평가인 임화(林和)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카프의 볼셰비키화는 동경에서 이북만의 지도 아래 '무산자'파에 가담했다가 귀국한 임화의 선물이었다. 물론 만약 임화가 아니었더라면 카프의 볼셰비키화가 제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라는 것이 없으니까. 중요한 건 사실(事實)이다. 임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그가 카프의 볼셰비키화를 주도했다는 사실만이 우리에게 놓여 있는 것이다. 카프의 볼셰비키화도 바로 그 임화를 중심으로 해석을 해야 하고 평가를 해야 한다.
궤변이었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는 그랬다. 어떻게 역사에 내재해 있는 필연적인 과정들을 한 인물에 천착한 채 무시해버릴 수 있는 것인가. 무슨 위인전기라도 쓰려는 심사가 아니라면 모르지만. 임화 아닌 다른 개인이었더라도 이미 1927년의 1차 방향전환으로 인해 목적의식적 계급성을 표명하며 사회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변혁의 필요성을 천명한 카프는 조선공산당의 재건이라는 역사적 필연에 의해 당시의 정세에 맞춰 비합법 투쟁을 조직함으로써 당을 통한 혁명투쟁에 결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임화가 주도한 것이 분명 사실은 사실이었지만, 역사를 가정하지 말라는 금언(禁言)은 그런 사실의 부정과 관련지어 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만약에 조선공산당이나 조선노동당 같은 것들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반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식으로 가정을 내린다면 우리는 위의 명제를 그 사람 앞에 들이밀 수 있을 것이었다. 인류의 미래상으로서 공산주의 혁명이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던 그 시기에 근본적 사회변혁 움직임으로서의 공산당은 필연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볼셰비키화'로 정리되는 1931년 카프의 제 2차 방향전환을 주도한 인물이 임화였든 이북만이었든 아니면 김남천이었든 그런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유효할 뿐이지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는 측면에서는 하등 중요한 문제일 수 없다는 것이 L형에 대한 그의 반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간간이 졸고 있던 K와 함께 L형의 주장에 잠자코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역사적 진실이고 뭐고 떠나서 본다면 L형의 이야기는 나름대로 흥미가 있다는 생각때문이었다.
― 임화는 시인이었다. 너희들도 이번 조사과정을 통해 이 정도 사실은 알고 있을 줄로 안다. 그가 18세였던 1926년에 쓴 시들을 보면 그의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확연히 볼 수 있지. 물론 그의 시에 관한 시평들과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당시 그의 시가 낭만적인 걸 넘어서 퇴페적이고 다다이즘적이며 미래파적인 요소들을 많이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표면적인 것일 뿐, 중요한 것은 시인으로서 임화의 본질적 사상 자체이다. 예술로서의 시를 통해 끊임없이 진실을 갈망하는 시인으로서의 삶……. 그의 이러한 시적 면모는 이후 '30년대에 나타난 희대의 모더니스트 이상이나 김기림보다 훨씬 앞선 것이었으며, 결국에는 임화의 '시적(詩的)' 인생 전부를 아우르는 일종의 거대한 골자라 할 수 있다.
― 형, 말씀 중에 대단히 미안한데요, 임화도 그 나름의 사상적 발전과 함께 자신의 시작(詩作) 태도를 변모시켜왔지 않았던가요. 일테면, [우리 옵바와 화로]와 같은 단편서사시나 전쟁 중에 쓴 혁명시 같은 것들은 낭송이나 노래를 통해 대중을 선동하는 기능을 하지 않았던가요.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식으로 버티던 그가 기어이 참지 못하고 L형의 말에 끼어 들었다.
― 그건 범주가 다른 문제이다. 네가 말한 부분은 이미 쓰여진 시가 어떤 방식으로 이용이 되느냐 하는 순전한 유용성의 문제이고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그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의 임화에 대한 문제인 것이니까. 아무튼 이렇게 본다면, 문제는 시인으로서의 임화는 '제 4의 점령'을 향한 그 자신의 욕망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 '제 4의 점령'이요?
― 그래, '제 4의 점령'. 지금 말로 하자면 4차원의 무한한 세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제 4의 점령'은 시인 임화가 1926년에 [매일신보]에 실었던 논문인 <근대문예잡감>에서 일찍이 표명한 자신의 슬로건이다. 즉, "인간의 욕망은…… 제 4의 점령에다 자유해방을 구하여 결국 예술을 낳아놓고 말았다"는 명제로서 알 수 있듯 임화 자신도 빈 곳을 채우기 위한 스스로의 욕망을 '제 4의 점령'이라 할 수 있는 예술의 영역, 즉 시인 임화에 있어서는 시(詩)의 영역에서 찾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렇다. 그는 영원한 시인이고자 했고 또한 그렇게 불멸의 시인이었다. 그의 초창기적 세계관이었던 다다이즘, 미래파도 그랬고 심지어는 카프도 그랬다. 그리고 영화배우로서의 삶도 그랬고 동경유학도 그랬으며 볼셰비키화도 그것의 일환이었다. 더 나아가 남로당 활동도, 미제의 고용간첩이라는 죄목으로 북조선의 공화국에 의해 그의 삶이 결단났던 1953년의 숙청도 결국엔 '제 4의 점령'을 향한 그의 욕망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마지막의 '제 4의 점령'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음으로써 끝날 줄 모르던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었다.
무슨 연유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깨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쯤은 졸고 있던 K뿐만이 아니라 한참을 심취해서 떠들던 L형을 무언가로부터 깨워야 한다는 생각. 그는 내처 L형과 K를 몰 듯이 데리고 학교를 빠져나왔고, 그들과 함께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L형의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제 4의 점령'……
옆에 앉은 학생이 어깨를 툭툭 치는 바람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흐릿한 시야를 뚫고 이런 상황에 잠이 오냐는 둥 그게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느냐는 둥 하는 교수의 목소리가 건너오는 듯 했다. 진공과도 같은 시간을 한참이나 지나와서야 그는 자신이 잠을 잤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중에 L형의 그것도 섞여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민망함에 뒤통수를 긁적거리던 그가 이윽고 오른쪽 열 맨 앞자리에 눈을 두었을 때 L형은 그에게 어이없다는 웃음을 한 번 지어 보였고 이내 예의 권태로운 눈빛으로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 언제까지나 그들의 죽음을 슬퍼할 수만은 없을 것이리라. 그래도 산 사람은 결국 제 할 일 하며 살아야 할 것이리라. 하지만 이 순간에 항상처럼 똑같이 그 자리에 앉아서 저런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하는 건가, 또한 그럴 수 있는 걸까……. 만일, 만일에 형이 말한 것처럼 이 사건이 모종의 연쇄살인에 얽혀있는 것이라면, 나아가 우리 발표모임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더라도 저 형은 언제나처럼 저렇게 앉아 있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는 이내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불경한 생각을 한 자신을 애써 질책했다.
'그래, 죽은 아이들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우린 우리대로 사는 거야, 뭐. 어쩌면 쓰잘 데 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정작 과 후배들을 잃어 마음이 더 안 좋을지도 모르는 L형을 이런 식으로 보고 있는 내가 오히려 애들을 더 욕되게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는 골수를 타고 흐르는 예의 서늘한 기운에까지 의식의 빗장을 지를 수는 없었다.
 

5.

'한국 근·현대 문학사' 중간고사는 건너뛰었다. 진도도 많이 떨어졌을 뿐더러 학생 둘이 죽은 마당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험을 치른다는 것도 허망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국문과 3, 4학년 전공수업은 다들 그런 듯 했다. 같은 과지만 자신들이 P나 K와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있다면 아마 그들로서는 아닌 말로 '땡'을 잡은 셈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국문과 전공수업을 하나 듣고 있으면서 P나 K와 모종의 관계를 맺었지만 정작 국문과 학생은 아닌 그로서는 사정이 달랐다. 매정한 말일지도 모르나 어쨌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인 그는 중간고사를 봐야 했으니까.
L형이 느닷없이 그에게 다가와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한 건 그가 시험준비를 하느라 도서관을 출입하던 그 주 금요일 '한국 근·현대 문학사' 수업이 끝난 직후였다. 다음주에도 시험이 있긴 했지만 주말을 눈앞에 둔 금요일이었던지라 마음이 여유롭기도 했음에도 괜스레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지난 주 이후로 L형과는 이전만큼 가깝게 지내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발표조 모임을 더 이상 가질 필요도 없었거니와 그로서는 무의식적으로 발표조와 관계된 모든 것을 잊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L형과의 본의 아닌 거리감은 바로 거기에서 기인했던 것이었다. 그랬기에 수업이 끝난 후 가방을 챙기던 그에게 L형이 다가와서 '오늘 저녁에 시간 있니'라고 물었을 때 저도 모르게 느닷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 이젠 훌훌 털어버리고 L형이랑 이 얘기 저 얘기도 하면서 술이나 마셔보자.'
이렇게 생각하니 그는 정말 기분이 편안해지는 듯 했다.
약속장소인 도서관 뒤편 뜰로 갔을 때 L형과의 약속시간은 이미 20여분 가량 늦어 있었다. 그러나 그곳 어디에도 L형은 없었다. 장소가 틀렸나 싶었지만 요 근래 아무리 머릿속이 복잡했기로서니 그 정도를 혼동할 자신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는 학교 밖으로 이어지는 담장에 기대어 L형을 기다리며 담뱃불을 붙였다. 담배 한 대를 미처 다 피우지도 못 했을 즈음 그는 도서관 뒤편 계단을 내려오는 L형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이게 뭡니까. 선배가 돼 가지고 약속도 안 지키고."
자신도 늦었으면서 그는 L형에게 핀잔을 주기부터 했다.
"아니야. 난 정각에 왔어. 근데 니가 늦은거지. 그래서 나가 가지고 요것 좀 사오느라고."
그는 그제서야 L형의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투를 인식했다. L형이 살짝 들고는 흔들거리는 것. 보나마나 소주였다.
"저녁 시간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학교 도서관 공터에서 술을 마신다고요?"
"왜 안 된다는 법 있냐?"
"하긴, 잔디에서 마시나 여기에서 마시나 학교 안에서 마시는 데 별반 차이는 없겠지요. 뭐. 어디 한 번 먹어봅시다."
그렇게 그냥 그와 L형은 사람의 발길이 뜸한 도서관 뒤 공터 한 자리에 앉아 권커니 작커니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 두 병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야, 우리 발표 맡았던 주제 말이야. 아직 진도 안나갔지?"
"에이, 형 술맛 떨어지게 또 무슨 발표 얘기를 꺼내요?"
"왜, 날도 어두워지는데 오싹하고 재밌잖아."
"그래도 아직은 그런 얘기를 재미로 꺼낼 시기가 아니잖아요."
"그런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그는 내심 재미를 빙자한 그런 방식으로라도 그 건을 극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자 자기 자신도 해저문 도서관 뒤켠 어두운 곳에서 나누는 은밀한 재미를 갈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그건 왜요? 형."
"……."
"아직 진도 나가지 않은 건 확실한데, 왜요?"
"응, 다시 준비해서 발표하는 건 어떠냐고."
그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게 '스릴'이라는 것을 느끼는 듯 했고 장난스레 동조까지 하고 나섰다.
"그럼……, 형하고 나하고 둘이?"
"아니……, 나 혼자."
"……?"
순식간이었다. L형은 예상치 못한 날쌘 동작으로 그를 덮친 후 목을 세차게 조르기 시작했다.
"나 혼자야……, 나 혼자. 너는 발표를 하고 싶어도 못하지. 왠지 알아?"
대답과도 같이 이어지는 그의 질식음. 바로 옆의 빈 소주병이 구르는 소리가 아주 먼발치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너는…… 오늘 죽을 거니까."
단순히 술기운에 치는 장난짓거리가 아님을 찰나적으로도 알 수 있는 완강한 힘과 분위기. 가녀린 L형의 몸 어디에서 이런 힘이 솟아나는 걸까. 그는 소리를 질러야 한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니가 왜 죽어야 하는지 알아?"
그러나 그건 정말 생각뿐이었다. 그 순간에 그가 낼 수 있는 소리란 기껏 다 죽어가는 신음뿐이었다.
"두 가지가 있어. 알고 싶지? 그래, 알려줄게."
벌써부터 그는 눈앞이 노래짐을 느끼고 있었다. P를 도서관 3층 뜰에서 밀어 떨어뜨린 것도, 술취한 K를 때려죽인 것도 너였구나, 가까이에 있던 바로 너였구나…….
"한 가지는 너같은 놈은 카프의 볼셰비키화를 논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야. 천재시인 임화를 몰라보고 또 우습게 보는 놈이 무슨 카프를 논하고 볼셰비키화를 논하겠니? 안 그래? 너같은 놈들이 바로 천재시인 임화를 죽인거야."
여태껏 L형은 그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가. 적어도 그가 기억하기에 그는 L형의 관점에 대해서 그 자신의 반론을 밖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점점 가까이 들이대는 L형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고 음산하게 들려왔으며 그만큼 더 증오로 불타오르는 듯 했다.
"두 번째 이유는 뭔지 알아? 너도 내가 천재시인 임화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는 거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뿌얘진 두 눈을 크게 뜨려 애를 쓰며 속으로 반문하고 있었다. L형이 시인 임화라고? 그는 그런 생각을 추호도 한 적이 없었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금 L형이 하고 있는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 것인가. 광인(狂人). 그렇다. L형은 미친 것이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정신이 아님이 분명했다.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 L형이 '제 4의 점령'이 어쩌고 했던 그날 무언가로부터 L형을 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 반추해 보면 그가 알게 모르게 L형으로부터 그런 광기를 읽었던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건 지금의 이 미친 수작을 차빼고 포빼고 졸까지 다 빼주면서 인정은 해준다고 치자. 그렇다면 '너도……'라는 말은 뭔가.  
"어떻게 알았니? 너도 그 자식처럼 되고 싶어 그랬니?"
'그 자식', K였다. K는 L형의 광기를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이 미친 녀석의 희생물이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P는……?
"P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면 말해줄게. 그년은 다행히도 내가 천재시인 임화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어. 그렇지만 죽어야만 했지. 그년은 역사에 무지했어. 천재시인 임화가 누구인지도 몰랐지. 임화 자신이 친히 알려주려고 했음에도 아예 관심조차 갖으려 하질 않았으니 마땅히 죽어줘야 했단 말이야. 그래도 K나 니놈 같은 경우는 그런 년보단 나으니깐 지금 죽더라도 너무 억울해 할 건 없어. 하지만……, 니놈들도 다 똑같은 놈들이야. 지구의 인력 정도도 벗어나지 못하는 삼차원에서 허우적대는 니놈들도……."
그는 더 이상 신음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다. 이대로 죽고 마는가, 기껏해야 '제 3의 점령'에서만 살아가고자 하는 나는 이렇게 죽어야 하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흐릿한 정신 속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제 3의 점령', '제 4의 점령'…….
"진정한 '제 4의 점령'을 보지 못하는 니깟 것들은 다 죽어 없어지고 마침내……, 나 천재시인 임화만이 영원히 사는 거야."
그때 문득 그의 몸이 지구의 중력과는 상관없이 공중에 붕 떠오르는 듯 했고 그러한 그만의 진공 속에서 호루라기 소리 같은 걸 얼핏 들은 듯도 했지만, 그는 그 무한한 진공 속에 온몸을 내맡긴 채 그냥 그렇게 영원히 잠들어 버리고만 싶었다. 존재도, 그렇다고 비존재도 아닐 '제 4의 점령' 속에서…….
 


6.

어느덧 가을이 오려는지 한여름의 태양은 무섭도록 강렬했던 제 빛을 아주 조금씩 가리기 시작하는 듯 했다. 그러면서 학교는 2학기에 접어들었고 그는 자신의 마지막 학기 시간표를 국문과 전공수업으로 도배를 했다.


지난 5월 초, 도서관 뒤 공터에서 정신을 잃은 후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이틀 동안이나 깊은 잠을 잤으며 태어나 처음으로 병실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위 사람들에 의하면 그가 도서관 경비 아저씨에 의해 발견되었을 당시 술이 많이 취한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고 하는데 이상한 건 그 자리에는 그 혼자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욱 괴이한 일은 그가 응급실로 실려갔을 당시의 담당의사를 나중에 만나 알아본 사실에 있었는데, 그 밤에 그의 목은 누군가에 의해 졸려진 흔적조차 없었다는 것이었다. 마치 꿈을 꾸었던 듯 그로서는 도무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그 밤에 미친 듯이 목을 조르며 그의 생명을 위협하던 L형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며칠을 쉰 후, 그는 학교로 갔다. 의외로 정신은 맑아왔으며 발걸음이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자신이 일부러 그러려고 노력했기 때문이기도 했었지만, 어쨌든 당장 그에게 중요한 것은 L형의 행방이었다.
그러나 그 학기 내내 '한국 근·현대 문학사' 수업시간에도, 국문학과 학생회실에도, 과사무실에도, 학교 그 어디에서도 L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꿈이었던가. 하지만 K나 P의 모습도 볼 수가 없었던 걸 보면 그냥 그렇게 꿈을 꾼 건 아닌 듯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K나 P에 대해서, 그리고 L형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그들은 분명 없었는데도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평소와 전혀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또한 그들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은 알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거니와 실제로도 더 이상의 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그 학기를 마치고 말았다.
그런데 2학기에 들어서 그는 지금 국문과 수업을 다시 듣고 있다. 어찌보면 그로서는 생각할수록 끔찍한 기억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개강을 맞아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그는 꼭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시간표를 새로 짜기 시작했다.


마지막 학기를 다니면서 그는 문뜩 L형을 생각한다. 지난 5월초의 어느 날 밤 그와 함께 도서관 뒤 공터에서 소주를 마셨던 L형, 학교를 11년이나 다녔던 L형은 그날 그 술자리를 마지막으로 그의 곁을, 무척이나 지겨웠을지도 모르는 학교를 영영 떠나버렸다. L형은 정말 그와 함께 수업을 듣고 학교를 다녔던 것일까. 스스로를 제정신이라고 확신해 마지않는 그로서는 그 사실에 대해 하등의 의심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밤 그의 목을 졸라오던 L형은 진정으로 미친 사람이었던가.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그 사실에는 확신을 할 수 없다. 지난 학기에 그와 함께 있던 동안 평소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와 같이 경찰서에 가서 참고인 조사를 받을 때도 그토록 멀쩡하게 행동을 하던 L형이 아니었던가. 경찰서에서 그는 혹시나 뭐가 잘못되어 자신이 누명을 쓰면 어쩌나 하는 유치한 생각에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이나 뛰었더랬는데 옆에 있던 L형은 담당형사가 묻는 모든 질문에 앞뒤가 맞는 대답을 곧잘 했었다.


연기력.
순간 그의 머릿속을 관통하는 단어는 바로 그것이었다. 다다이스트, 영화배우, 마르크스주의자, 전향자로서의 문인보국회 이사, 남로당의 전술적 통일전선체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 기획부 차장, 그리고 결국에 '미제의 고용간첩'까지도 될 수 있었던 임화의 연기력. 또한 1934년의 제 2차 카프 검거사건 때 백철의 기록대로 연행과정에서 당시에는 불치병이었던 결핵을 빌미로 '기이하게 졸도를 하는 조화'를 부릴 수 있는 연기력까지……. 저명한 비평가인 김윤식 교수가 임화에 대한 연구저서에서 말한 임화의 뛰어난 연기력은 바로 그런 것이었던가. 임화와 L형과의 알 수 없는 관계. 굳이 둘 사이를 연관시켜 본다면 지난 5월초의 그 밤에 갑작스레 드러냈던 L형의 광적인 태도와 지극히 정상으로 보이던 평소의 태도도 다름 아닌 그 연기력과 같은 것에서 기인한다고도 볼 수는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천재시인 임화는 그가 죽은 지 약 50년이 지난 후인 이 시대에 부활한 것인가…….
1953년에 임화가 사형당하고 난 후 그의 두 번째 부인 이현욱(소설가 池河蓮)은 임화의 시체조차 찾지 못 했다고 전해지는데, 어쩌면 그때 임화는 죽지 않았을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살아 '제 4의 점령'을 찾아 헤매고 있었는지도……. 아니라면 최소한, 영영 없을지도 모를 '제 4의 점령'을 찾아 떠도는 '시인' 임화의 영(靈)이 구천을 헤매다 L형의 몸 속으로 들어가 합일이 되었던 것이었는지도.
반대로, 그가 지닌 상식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가장 현실적인 추측이라 할 수 있는 측면으로서, 만약 L형이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다면, 미치지 않아 보였던 평소의 L형도 시인 임화처럼 '제 4의 점령'을 향한 가없는 욕망에 목말라 있었던 청년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L형의 길었던 학교생활과 그 속에서의 운동까지도 그런 욕망의 치환된 모습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L형의 지난하고도 지루한 삶이 스스로를 임화와 동일화시킨 채 '제 4의 점령'이라는 헛것을 꿈꾸도록 더더욱 부추겨 결국 L형을 광인으로 만든 것이었던가.
아니면, 정말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그와 같이 있었던 그 마지막 밤에 L형 스스로 정체를 밝힌 대로 L형은 진정 '제 4의 점령'이라는 완전한 자유를 끈질기게 추구하던 천재시인 임화 자신이었던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건데 그로서는 도통 모를 일이다.


(199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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