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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Dec 12. 2020

[발해고(渤海考)](1784) - 유득공

'발해고(渤海考)'를 읽다.

'발해고(渤海考)'를 읽다.
- [정본(正本) 발해고(渤海考)], 유득공, 김종복 옮김, <책과함께>, 2018.





"그러나 고려 500년간에 문인 학사들이 전혀 수습하지 않아 300년간 유명한 나라의 역사로 하여금 차가운 굴뚝과 잡초더미로 변하고 회오리바람에 사라져 그 자취가 있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이 그 죄의 하나이다. 발해는 고구려의 유족인데도 동족의 나라가 성쇠흥망한 역사를 대하여 전혀 애석해 하는 사상도 없고 수습하려고 주의하지도 않았으니, 하물며 동족을 위하여 위기를 도와주는 의로운 행동조차 가졌겠는가. 이것이 그 죄의 하나이다. 발해의 강토는 고구려의 판도이므로 5천리 산하가 바로 우리 조상의 소유이니, 발해사에 의거하면 서쪽으로 거란에게 책망하여 돌려받고 북쪽으로 여진에게 책망하여 돌려받아 우리 강토를 잃지 않고 동양 세계에 일대 강국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거늘, 바로 고려의 문인 학사들이 이를 타인의 강토로 등한시하여 5경 15부의 빛나는 판도로 하여금 이역에 빠지게 하고 동남쪽 한 모퉁이로 축소되어 약소한 나라를 스스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그 죄의 하나이다."
- [황성신문], '<발해고>를 읽다', 1910.4.28. 논설.


1910년 '경술국치'의 해 4월 28일, [황성신문]의 '논설' 제목은 '<발해고>를 읽다'였다. 그 해 8월에는 이완용 등의 '을사5적' 매판관료들이 '한일합방 의정서'를 무단 날인했고 기어이 조선의 국권은 사라졌다. [황성신문]은 이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된 후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던 우리 일간지였다. 1910년 4월 위 논설 <[발해고]를 읽다>의 필자로 추정되는 일제강점기 민족사학자 박은식 선생은 경술년 그 해 임박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을 예상했으리라. 나라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건, 지금 '조선'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발해를 우리 역사로 포괄하지 못한 '고려 문인 학사들'로부터였다는 듯, "이역에 빠진" 발해를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나도 박은식 선생의 역사관에 심히 동조하기는 하나 국권침탈의 원인 중 주요인은 시대착오적 '대한제국'의 '왕권강화'로 본다. 전세계적 격동의 시기에 '제국'의 군사력도 없으면서 '이씨 왕조'만 지키려다 망한 것인데, 조선 후기 '개혁군주' 평가를 받는 정조도 이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조 대의 세계사는 인류 근대화의 시초인 프랑스 '대혁명'의 시기였다. 조선의 살 길을 나는, 이씨 '왕'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믿는다.

'개혁군주' 정조는 서얼 출신 지식인들을 대거 기용하는 '개혁'을 하긴 했다. 이들이 바로 '실학자'이자 '북학파'인 박지원의 제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인데 선대의 세종대왕 시기 '혁신'의 중심인 '집현전'을 모델로 한 정조의 '규장각'에서 수많은 서적과 사료들을 섭렵한 유득공(자는 혜보, 혜풍)이 1784년에 지은 역사서가 [발해고(渤海考)]다.
결과적으로 유득공 자신이 '초판 서문'에서 밝혔듯, [발해고]는 참고사료의 부실함으로 인해 '세가-전-지' 등으로 발전하지 못한 미완의 역사 보고서(考)일 뿐, 비록 형식은 따랐으나 '기전체 정사기록'으로 마무리 짓지 못한 기록이며 그러므로 저자 본인은 "감히 역사가로 자처할 수 없다"고 하였다.



( [발해고], <군고> )



"...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차지하며 발해라 하였으니 이들이 '남북국'이다.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잘못된 일이다.
... 고려가 마침내 약소국이 되고 만 것은 발해의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탄식을 금할 수가 없구나!
... ([발해고]를) '세가, 전, 지'라 하지 않고 '고(考)'라고 한 것은 아직 역사서를 완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 또한 감히 역사가로 자처할 수 없다고 하겠다."
- [발해고], <초판 서문>, 유득공, 1784.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들은 조선왕조 내내 이어진 [동국통감]식 역사관에 반기를 들었다. 조선 역사관의 주류는 중국 사료들에 기반한 중화주의 역사관에 따라 '기자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 등 한반도 일대에 국한된 '신라' 중심인 고려 김부식 [삼국사기]의 전통이었다. 박지원을 필두로 실학자들은 한반도 이북의 '요동'에 눈길을 돌렸고 1784년에 우리 역사의 집대성인 [삼한총서]를 기획하는데 '통일신라'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하기 위해 [발해국기]를 싣는다. 이 [발해국기]가 바로 유득공의 [발해고] '초판'으로 추정된다.

1784년 [발해고] '초판'은 저자가 <서문>에서 아쉬워 하듯, 고려가 발해의 10여만 유민들을 수용하면서 그들의 역사기록 등을 적극 수집하고 기록하지 않은 탓에 발해의 역사에 관한 사료가 없어 "문헌이 흩어져 없어진 지 몇백 년 뒤에 비록 편찬하고자 하지만 할 수가 없었다(<서문>)".

대조영이 세운 발해국은 '주자감'이라는 국립교육기관도 있었고 '서경 압록부'를 통해 당나라, '남경 남해부'를 거쳐 신라, '동경 용원부'를 거점으로 하여 동해바다로 직접 일본과 외교를 했으며, 지배민족 고구려 유민 중심인 '중경'을 기준으로 '숙신(조선/여진)'을 관할하는 '상경', '예맥(조선/고구려)'의 '동경', '옥저'의 '남경', '고구려'의 '서경'을 비롯하여 '부여', '읍루', '말갈(솔빈/불녈/철리/월희)' 등의 요동 일대 여러 부족들을 '5경 15부 62주'로 분할통치했던 말 그대로 요동의 '제국'이었다. 그야말로 고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요동 제국'의 역사라 할 만 하다.



( [발해고], <오경도> )



[발해고]는 고구려 무장 대걸걸중상(진국공)과 그 아들인 대조영(고왕)이 요동지역 일대 민족을 아우르며 발해를 건국한 이야기부터 중국의 산둥지방인 등주까지 공략한 대무예(무왕)와 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시호 기록 없음) 이후 발해 부흥을 도모한 대조영의 7대손 대연림('흥료왕') 등을 비롯한 그 왕족들의 기록인 <군고>, 신하들의 기록인 <신고>와 발해의 강역에 관한 기록인 <지리고>, 관직 기록 <직관고>, 국서 일부를 모은 <예문고>와 발해 멸망 이후 유민들이 웅집한 '정안국'에 관한 짧은 기록인 <정안국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서(記)'가 끝내 되지 못한 '역사보고서(考)'였으나, 유득공은 이후 오류가 많은 [발해고] '초판'을 세 차례 수정했는데, 중국이나 일본측 사료 참고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요동 일대를 답사한 후 특히 '5경 15부 62주'의 발해 강역에 관한 <지리고>를 대폭 수정했다. '초판'이 926년 발해를 멸한 거란 요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요사] <지리지>와 [신당서] <발해전>의 기록을 그대로 전재했다면, 이후 약 10여 년간 작업했을 '수정판'은 저자의 답사 등을 통한 지속된 노력으로 중국측 사료들의 오류들을 대폭 정정하고 있다.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한 후 고조선 유민들이 이주한 지역에서 본인들의 지명을 계속 사용했듯, 요나라가 발해를 멸한 후 발해 유민들을 대거 요동 일대로 이주시켰는데 역시 이주한 지역에서도 '동경 용원부', '상경 용천부', '중경 현덕부', '남경 남해부', '서경 압록부' 등의 '5경 15부' 지명을 그대로 사용했고 그로 인해 발해 멸망 전후 지역에 관한 [요사]의 비정이 틀렸음을 수정하고 있다.

1784년 [발해고] '초판' 이후 1793년까지 세 차례의 '수정판'은 1791년 이덕무 등의 [소화총서] 기획에 수록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화총서] 기획 역시 박지원의 1784년 [삼한총서] 기획의 뜻을 이어받아 한반도와 요동의 서기 7~10세기를 '남북국사'로 정리하려던 것이었다. 그렇게 [발해고]는 [소화총서]에 수록됨으로써 비록 '역사서'는 아니지만 우리 역사에 '남북국' 시대를 최초로 도입한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다.

[발해고]가 수정되던 기간은 동시대 유럽의 프랑스 '대혁명'기(1789~1793)였다. 정치적으로 왕조를 타도하지 못한 '개혁군주' 시대였으나 역사적으로는 수백년 이어진 '삼국사-신라' 중심사관에 균열을 내고 '남북국' 시대를 연 우리 역사기록의 '혁명'이라 할 만하다.


***

- [정본(正本) 발해고(渤海考)], 유득공, 김종복 옮김, <책과함께>,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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