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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Mar 19. 2021

[무신과 문신](2000) - 에드워드 슐츠

- '이중 권력'에 대하여

'이중 권력'에 대하여

- [무신과 문신](2000), 에드워드 슐츠, 김범 옮김, <글항아리>, 2014.





"최씨 정권의 치명적 결함은 문신과 유교를 육성했지만 자신의 체제를 위한 새로운 이념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문신의 지도력은 점차 구조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확립했고 무신의 이상을 무시했다. 그들의 유교적 신념-정통성은 국왕에게 있다는 생각을 포함해-은 지속적인 최씨 지배에 관련된 반감이 거스를 수 없이 급속해지는 현상에 반영되었다. 몽골의 존재 여부와는 상관 없이, 최씨 정권과 무신 정권은 고려의 문치적 전통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 [무신과 문신], <9장. 최씨 정권의 난제>, 에드워드 슐츠, 2000.



고려 개국 후 과거시험을 통해 출사한 '문신(文臣)'이 왕조의 지배관료였다. 우리가 '장군'으로 알고 있는 윤관이나 강감찬은 모두 '문신'이었다. 여진이나 거란과 전투를 치른 건 '무신(武臣)'인 군인들이었으나 이 전쟁을 지휘한 것은 '문신'이었다.

고려 지배층 또한 '문반'과 '무반'의 '양반'이었으나 '문치시대'를 연 고려에서 '무신'은 상대적으로 차별받았다. 고려의 과거시험도 문신관료를 선발하는 '문과(명경/제술과)'와 승려를 뽑는 '승과', 기술직 '잡과'는 있었으나 '무과'는 출세의 길로 인정받지 못했다. 고려는 초기부터 '문신'과 '무신'의 대립과 갈등을 줄곧 뿌리고 있었다. 그나마 무과에서조차 차별받던 서경(평양)에서 일어난 묘청의 난을 진압한 것도 [삼국사기]를 쓴 '문신' 김부식이었다. 12세기에 고려의 '문신'은 완전히 승리했다.



한국사를 전공한 하와이대학 에드워드 슐츠(Edward J. Schultz) 교수는 1970년대에 한국에서 공부하던 중, 당시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을 보고 본인의 전공인 한국 중세사에서 '무신정권'을 연구하기로 한다.

한국사에서 고려시대(918~1392)는 삼국시대와 조선을 잇는 시기로 학문적 대상 외에는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못 받았으나 조선말까지 1천 년간 '문치시대'의 짧지 않은 전통을 지녔다. 1170년부터 1세기 동안 존속한 '무신정권'은 일종의 '변칙'으로 여겨졌다. 역사적 의미는 없이 살인과 학살로 이어진 야만의 시대로 인식되던 중 1980년대 김당택 교수 등의 연구로 본격화되었고 미국의 한국사학자인 슐츠는 [무신과 문신(Generals and Scholars)]이라는 연구서를 냈다.


고려 의종은 집권 초반에 문반을 견제하기 위해 '견룡군'이라는 왕실 친위대를 각별히 대했으나 환관내시가 득세하면서 견룡군 또한 홀대를 받는다. 1170년 '무신의 난'은 그 동안 누적된 문무 차별에 대한 반란이었으나 이를 이끈 정중부는 오래된 무신집안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다. 한참이 지난 후 조선왕조 전주 이씨의 오랜 방계조상이 된 이의방이나 출신이 낮은 이고는 같은 견룡군의 상장군이었던 정중부를 앞세워야 뿌리깊은 문치주의 속에서 반대파 문신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무신의 난 직후 무차별적 문신숙청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문신권력에 붙어 무신들을 박해한 문신들은 제거되었으나 중서문하성과 추밀원(이하 재추)으로 대표되는 문신관료기구를 제끼고 권력의 최고 합의기구가 된 중방에는 다수 문신도 참여했다. 이후 경주의 노비 출신이었던 이의민은 철저하게 사리사욕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다가 무신집안 출신 최충헌 장군에게 암살되지만 무신의 난은 권력운용에는 미흡했어도 문신과 무신이 동등하게 정권에 참여한 중요한 계기를 만든다.

무신집안 출신이었고 음서를 통해 문신으로 첫 관료생활을 시작한 장군 최충헌이 60년간 '최씨 정권'을 세웠을 때는 엄밀히 따지면 '무신정권'은 아니었다.


정중부와 경대승, 최충헌 등은 문신과 무신의 균형을 통해 고려를 지배하려 했고, 이의방과 이고, 이의민 등은 무신의 우세와 무력을 통한 지배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 귀족정치의 배경에서 한미한 가문은 문신들의 지지를 얻기 힘들었던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의종을 결국 시해한 이의민은 오로지 무예 실력으로 출세한 자였고 국가의 '공공성' 자체를 모른 채 국가를 사익 추구의 도구로만 여겼다. 대기업 사장님 출신 대통령 이명박과 같다. 야차와 같은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과 최충수 형제는 거사 직후 바로 고려왕에게 보고하며 고려의 합법성과 정통성에 의지하고 심지어 무신 최충헌 장군은 고려를 개혁할 '봉사10조'까지 제출한다. 고려태조 왕건의 '훈요10조'를 상기시킴은 물론 신라 문신 최치원과 고려 문신 최승로를 따랐다. 물론, 고려의 토지개혁과 불교개혁 등의 심오한 내용을 망라했던 최충헌의 '봉사10조' 또한 사문서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최충헌 정권은 문신을 우대했고 유학과 문학을 장려했으며 과거시험을 통한 문신관료 배출을 확대했다.

고려 최고의 천재라는 [동국이상국집]과 [동명왕편]의 이규보도 최씨 정권이 키운 문신이었으며, '단군'을 시조로 기록한 일연 국사의 [삼국유사]가 지어진 때도 바로 이 시기였다.





"보수적 인물인 최충헌은 문반 지배층을 행정에 복귀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유교 이념을 후원해 왕정을 계속 인정하겠다는 생각을 확인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합의제 기구에 계속 의존하고 사회적 해방을 제한해 사회질서를 동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최충헌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공적/사적 기구를 모두 활용하는 혁신적인 '이중 조직'을 발전시켰다. 최씨 정권이 고려를 통치한 기간에 전통에서 벗어난 사례는 여럿 있었다. 무신 집정에게 충성하는 사병은 곧 관군을 대체해 권력을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세력이 되었다. 최충헌과 그의 가족은 이런 새 질서를 지배했다. 최씨 집정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물들은 문객(門客)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비슷한 충성관계가 그 밖의 군사와 지도자 사이에서도 발전했다."

- [무신과 문신], <머리말>, 에드워드 슐츠.



최충헌이 세운 60년 '최씨 정권'의 몰락은 그 자체의 모순으로 잠재해 있었다. 기본적으로 스스로 왕이 될 수 없었던 중국과의 대외정세를 배경으로 '왕권'의 '공적기구'를 인정하면서 '최씨'의 '사적기구'를 병립시킨 '이중적 행정(슐츠, 같은책)'과 그로 인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괴리가 근본 문제였다.


'무신정변'의 혼란을 진압한 최충헌은 문/무반의 균형을 통해 비교적 안정적 국정운영을 한 것으로 슐츠 교수는 평가하고 있다. 최충헌 본인은 허수아비 왕들을 갈아치우면서 '교정도감'과 '도방', '정방', '야별초' 등의 사적 기구를 통해 권력을 이어갔고 그의 아들 최우 또한 아버지가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집정을 했다. 최항과 최의 등 최우의 후계자들에 이르러 최씨 정권은 본격적으로 무너지는데, 공적으로는 토지개혁을 하고 사적으로는 진주와 전라지역의 곡창지대, 강화도 등의 대토지 소유 확대한 '이중성', 이의민 같은 천민노비 출신의 사회진출을 억압하고 만적의 난 등 노비반란을 잔인하게 탄압한 반면 본인에게 충성하는 천민은 승진시키는 '이중성', 불교종파 교종을 억압하면서 선종을 지원했지만 불교의 부정부패를 키운 '이중성' 등이 더욱 역동적으로 기능한다. 최씨가 무너진 후 무신정변 마지막 집정 김준은 노비 출신이었다.

결국, 최씨 정권이 앞에 내세우기는 했으나 그들의 '사적 권력'으로 억압되고 무력화된 '공적 권력', 즉 고려왕조는 몽골에 복속되면서 다시는 '공적 권력'이 되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한편,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면서까지 25년 간 몽골에게 저항했는데, 이 역시 '항몽투쟁'이라기 보다는 '사적 권력'을 지키려는 '생존투쟁'에 가깝다.'공적 권력'인 고려왕조는 한반도 지배를 위해 존속시킬 필요가 있었지만 '사적 권력' 최씨 집안은 멸족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삼별초 항쟁 또한 그시작은 '사적 권력'에 대한 충성이었을 수도 있다. 당시 몽골의 '제국'적 실력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정미7적', '을사5적' 따위 등 우리 근대사의 친일 지배계급 보다 낫다고 볼 수는 있겠다.


'안정된' 권력자였던 최충헌과 최우가 왕이 되기를 포기한 이유를 슐츠는 중국과의 대외정세로 본다. 한반도의 왕조교체는 당시 중국에 강력한 통일정권이 있을 때는 불가능했다는 것인데, 고려 개국 시 중국은 5대10국이었고, 조선은 원-명 교체기였기에 가능했다. 아마도 금나라가 강대하지 않았다면 고려와 조선 사이에 '최씨 왕국'이 잠시 존재했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최충헌과 최우에게는 불교 선종 외에 지배이념이 약했다. 고려의 개국이념이 후삼국 혼란기에 불교를 기반한 풍수지리설이었다면 조선의 개국이념은 당시에는 진보적이었던 성리학적 '민본사상'이었다.

최충헌의 선종은 정치이념이 될 수 없었고, 그들의 유학사상은 결국 최고집정자 1인이 사라지면 함께 흩어지면서 결국 고려왕조의 '공적 권력'을 찾아갈 수 밖에 없는 문신의 지배사상이었다.



오래전 '왕조시대'에서 '공공성(公共性)'을 담보하는 유일하고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군주제'였다. 근대에 들어서야 '공화제'가 정치개념으로 정립되고 왕을 단두대에 세우지만, 우리 역사만 해도 20세기에 들어서야 '왕이 없는 세상'을 알게 되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현대의 군주'로 대중적 (진보)정치정당을 호명했지만 지금의 '군주'는 단연 대다수 '민중'이다. 이 다수가 지도하는 '공화국'이야말로 '공공성'을 실현하는 최고의 정치권력이다. 공익이 아닌 사익에 기반한 '포퓰리즘'을 경계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공공성'이다.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의 배경에도 최충헌 시대처럼 '이중 권력'이 있었으나, 세상을 바꾼 것은 노쇠하거나 쇠약해진 소수의 '국가'가 아니라 '공공성'을 담보한 다수 대중의 소비에트였다.

무신정변기 '이중 권력' 중 '최씨 정권'은 '공공성'과 거리가 매우 먼 '사익추구집단'에 불과했으며, 이의민과의 차이는 개인이 다 해 먹느냐 집안이 다 해 먹으냐는 규모의 차이였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19


예나 지금이나, '공공성'을 둘러싼 국가권력과 시민사회 간 '이중 권력'의 투쟁이 되어야 사회가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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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과 문신(Generals and Scholars : Military Rule in Medieval Korea)](2000), Edward J. Schultz, 김범 옮김, <글항아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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