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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Feb 28. 2021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2020) - 백승종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문장(文章)'의 시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문장(文章)'의 시대
-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 백승종, <김영사>, 2020.





"조광조 등을 각지로 귀양 보낸 다음에도 한동안 조정이 소란하였다. 무명의 청년들이 사람을 모아 임금 주변을 정화하겠다며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그들은 일이 발각되어 목숨을 잃는 것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앞다퉈 봉기를 꿈꾸었다. 그만큼 조광조와 그 동료들의 인기가 높았다. 반면 남곤은 다 이겨놓고도 진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 '1부. 시대의 문장 - 성리학 전성기의 문장가', 백승종.


조선은 '문장'의 나라였다.
우리의 문자 한글이 창제된 것이 고작 15세기였는데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고려말 성리학이 도입된 후 한반도의 유학자들은 한문으로 지은 글이 중국인들조차 우러러 볼 정도로 수려한 문장을 구사했다고 한다. 물론, 아직 우리 문자인 한글로 지어진 문장 이야기가 아니었으므로 중국인들을 능가할 정도의 주자학적 교조주의가 팽배했다는 것일 수도 있겠다. 조선의 '이단아' 허균의 최초 한글소설 [홍길동전]은 16세기 말 민중봉기의 기운을 받고서야 등장했다.


역사학자 백승종 선생은 고려말 대학자 목은 이색, 그의 제자 포은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의 문장으로부터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와 쇠퇴기, 실학의 시대를 거쳐 근대화 개항기의 '문장가'들을 찾아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2020)으로 엮었다. '민본'의 건국이념을 내건 성리학 도덕정치의 조선, 그 '시대의 문장'을 한편으로, '문장의 시대'를 이끈 명문장가들을 한편으로 하여 이 시대에도 변함없는 '문장(文章)'의 의미를 조명한다.
난 개인적으로 '빈곤의 철학, 철학의 빈곤' 식의 댓구를 이루는 작명을 좋아하는데, 일단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이라는 제목이 와닿는다. '시대'와 '문장'의 두 단어로 네 가지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는 작법이다.

고려말 관리로서는 실무능력이 떨어지나 시대의 대학자였던 이색과 개혁가 정몽주, 혁명가 정도전의 운명은 엇갈렸다. 결국 썩은 고려왕조를 '민본'의 이름으로 뒤집어 엎은 정도전 또한 새왕조의 칼날에 명을 다했고 납작 엎드린 이색은 제 명을 다 누렸다. 성리학적 신념으로 일생 타협하지 않은 정도전의 정치는 그의 실각과 함께 사라진 듯 했지만 조선은 그의 '문장'까지 버리지는 않았다. 사찬 형식이었지만 [조선경국전]은 '법치국가' 조선의 헌법과 같은 [경국대전]의 골자가 되었으며, 왕권을 견제하는 사대부 집단지도체제의 운영원리는 그의 [경제문감]이 뿌리였다. 조선왕조 불구대천의 역적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은 벼슬길이 막히지 않았던 그의 후손들이 편찬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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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을 통해 '문장가'가 지도하는 성리학적 시대는 세종이 본격적으로 문을 열었다. 세종 또한 '역적' 정도전과 그의 문장을 "없는 것만 못하다"며 싫어했으나, 그가 건설하고자 했던 '민본주의' 이념은 지향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할 명문장가들을 양성했다. 정도전의 '혁명동지'였던 대문장가 권근의 후손인 권채, 백승종 선생이 '조선 제일 문장가'로 꼽는 박팽년 등은 일종의 안식휴가를 받고 경학과 문장을 연마하여 시대의 문장가로 활약할 수 있었다. 이후 세종은 어린 손자 단종이 자신의 아들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할 때 끝까지 저항한 박팽년, 성삼문 등의 '충신'을 양성했으니 그 뜻은 어느 정도 이뤘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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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건국한 기득권 정도전의 후예들인 훈구파에 밀려 지방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정몽주의 후예 사림파들은 조선 중기 정계 진출을 하는데, 연산군 등의 폭군의 출현은 왕조 자체의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훈구파 지배체제의 한계이기도 했다. '덕치'와 그에 걸맞는 문장만을 인정한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은 그가 꿈에서 본 중국 초한전쟁 시대 초왕 의제(義帝)의 죽음을 담담히 묘사한 글임에도 유자광 등 훈구파는 개인적 복수와 정치적 시기로 해당 글을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는 반역의 문장으로 둔갑시켜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선비가 화를 당한 사건 '사화(士禍)'는 이렇게 '문장'의 해석에서 시작하였다. 과연 '문장의 나라' 조선답다. 이후 중종에 의해 개혁의 기수로 발탁된 조광조 또한 오로지 '도학정치'만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다며 군주를 견제하려 했기에 결국 세 번째 사화인 '기묘사화'의 제물이 되는데, 이 때는 이미 전국적으로 형성된 '사림파' 세력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였다. 성균관을 포함한 전국의 젊은 사림유생들은 목숨을 걸고 투쟁에 나섰고, 아마도 그 정치투쟁의 중심 또한 '문장'이었을 것이다. 오래전 사림파 김종직을 탄핵하고 '무오사화'를 일으킨 주동자였던 훈구파 유자광을 비판한 명문장 [유자광전]을 지은 남곤은 원래 조광조와 같은 사림파였으나 '기묘사화' 때는 훈구파가 되어 조광조를 처단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청년사림파의 암살 위협을 피해 변장을 하고 처소를 옮겨다닐 정도였단다.
젊은 시절 조광조와 뜻이 맞았을 남곤은 [유자광전]을 통해 '명문장'은 인정받았으나 시대에 굴복한 '문장가'로 후세가 평가한다.
그리하여 '문장의 시대'에는 수려하거나 화려한 '문장' 자체가 아니라, '시대의 문장'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남곤은 그의 일생으로 보여준다.





"피어린 상소문에 얽힌 사연을 더듬어가며, 나는 문장가로서 난세를 해쳐나간다는 것이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역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차라리 붓을 꺾을 수는 없었을까. 한 가닥 양심 때문에 문장가는 뜻을 굽히지 못한 채 고난을 자초하였던가."
-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 '2부. 문장의 시대 - 송곳처럼 날카롭고 추상처럼 매서운 문장가', 백승종.


네 번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문장'으로 무장한 다수 사림파는 굳은 '개혁' 의지로 선조 시대 이후 정권을 장악하고 본격적인 '당파투쟁'을 이어간다. 이후 실학자나 근대화론자들 또한 '문장'을 통한 시대 개혁을 꿈꾸었는데, 이들의 정신적 뿌리는 단연 강직한 선비들의 '피어린 상소문'이다.

광해군 때의 명문장가 권필은 외척을 비판하는 시를 지어 왕가의 노여움을 샀으나 붓을 꺾기보다는 차라리 맞아죽었다. 마지막 사화인 '을사사화'가 일어나기 전 명종 시기 조광조의 제자 백인걸은 모두가 눈치보느라 몸을 사리는 '대윤'과 '소윤' 따위의 정파싸움에 휘둘리지 말고 임금이 공명정대한 '덕치'를 해야한다는 상소 '문장'을 올린 후 왕의 부름을 받고는 모친과 처에게 "지금 들어가면 반드시 의금부에 하옥되어 유배를 떠나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나 놀라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실록). 조식은 역시 명종 시기 외척을 비판하는 격렬한 상소문으로 권력과 대치했는데 "유비의 삼고초려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후한을 다시 세우지 못했다"며 명종의 벼슬길을 거절하고 초야에 숨었다. '덕치'가 불가한 세상에서 선비는 '문장' 뒤에 숨을 수 밖에 없었나 보다. 달리보면, 그나마 '문장'이라도 있던 '시대'라 다행이었던가.





"허위정보(가짜뉴스) 캠페인은 '진짜뉴스'를 '가짜뉴스'라고 매도하고 신뢰할 만한 정보를 공격한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넌더리를 내며 '어떤 소스도 믿을 수 없어. 뉴스는 믿을 게 못 돼'라고 외치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 [가짜뉴스의 고고학], '1장. 가짜뉴스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최은창.


로마의 카이사르 사후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경쟁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세력을 악티움 해전에서 물리치기 전, '가짜뉴스'를 통한 여론전에서 먼저 승리했다. "술꾼에 호색한에게 로마를 맡길 수 없다"며 이집트에 주둔한 안토니우스를 비방하여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먼저 얻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한 안토니우스였기에 '허위정보'는 아니었으나 정적에 대한 비방이 주를 이룬 짧은 찌라시 '가짜뉴스' 소문의 전파였다. 중세의 이단처형과 마녀사냥까지 온갖 '가짜뉴스'는 '문자'의 배포 형식이 아니었다. 인쇄술 혁명과 종교개혁을 통해 '문자'를 통한 '여론전'이 본격화되었으나 우리 조선과 마찬가지로 문맹률이 높았던 그 시대의 '문자'는 소수 지식인들의 영역이었고 다수 민중은 아마 소문으로 듣고 옮겼을 것이다. 이후 20세기 독일 나치는 라디오를 전국민들에게 싼 값으로 배포하면서 '가짜뉴스'를 세뇌시켰다. 괴벨스의 신조는 "거짓말도 계속 들으면 사실이 된다"였다. 싸구려 타블로이드 신문으로 돈을 벌던 20세기 초 미국의 언론계는 유명작가 에드거 앨런 포조차도 '가짜뉴스'를 일부러 쓰던 시기를 거쳤다. 쿠바나 베트남에서 기사를 '사실'적으로 쓰기도 전에 미국의 의회나 신문사 편집실에서 '전쟁기사'를 먼저 쓰기도 했단다. 그들의 통킹만 사건 조작으로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이 시작되었고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포함한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했다. 해외는 70% 정도가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데 우리나라는 80% 정도가 주요 포털사이트를 통해 뉴스를 접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태극기부대 유투브, 정치권의 댓글부대 등 '가짜뉴스'는 각지에서 벌어지는 당장의 진흙탕 싸움에서 승기의 명분을 잡기 위함이었겠으나 이것들을 '고고학(archeology)'적으로 재구성하다보면, "세상 믿을 놈 없다", "너나 나나 다 사기꾼"이라는 허위의식의 판 구성이 목표였다고 소셜미디어, 지적재산권 전문가 최은창은 [가짜뉴스의 고고학](2020)에서 말한다.
위 책은 '가짜뉴스'와 '허위정보'가 증폭되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수단이 되는 '디지털 플랫폼'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도록 만들자는 것이 결론인데, "개방적 인터넷 자체는 민주주의를 붕괴시키지도, 허위와 진실을 구분하는 개인들의 능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는 것이 그 주요 전제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가짜뉴스' 제조기 트럼프를 주요 사례로 들며, 다수대중은 본인이 믿고싶은 내용을 담은 뉴스를 통해 신념을 굳히는 '확증편향' 또는 '동기화된 추론' 등을 통해 '가짜뉴스'를 읽고 전파하는 과정에서 실제 정치적 영향력은 볼 수 없었고, 결국 이 '허위정보'나 '가짜뉴스'를 증폭시키는 언론의 역할이 컸으며 지금 시대의 거대 '언론'이자 '출판사'는 '디지털 플랫폼'이므로 이들의 제대로 된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나 또한 동의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공부한 지적재산권 전문가인 저자에게 이런 거대 '디지털 플랫폼'의 '사회화'까지는 상상이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더욱 발전시킨 철도와 전기 등의 기간산업의 소유가 '사회화'되어야 하는 것처럼 '디지털 플랫폼' 또한 이 산업을 만들고 이용하며 발전시키는 다수에 의해 '사회화'된 민주주의 틀 안에서 그 역할이 토론되고 조정되며 통제되어야 한다. 지금은 다수 모든 민중들이 '문자'를 해독하고, '문장'을 지어내며, 스마트폰을 신체 일부로 활용하는 세상이다. 현대의 '스마트' 민중들에게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



문명은 문자와 함께 시작되었으니 다수가 문맹이었던 근대 이전에도 모든 것은 '문장'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후세에 남은 역사적 사실들 또한 '문장'에 의해서 가능했다.
성리학 이념국가 조선이 '문장'을 중시했다지만 결국 다수 대중의 독해력으로 '문장'은 어느 시대든 주요한 소양이 될 수 밖에 없다. 권력을 지키고자 한 자들에게는 왜곡의 대상이 될 수도, 새세상을 꿈꾸는 자들에게는 투쟁의 무기가 될 수도 있었으며, 앞으로도 인류 문명사에서는 그렇게 될 것이다. 그 방식이 텍스트든 그림이든, 동영상이든 움짤이든 다양하겠지만, 결국 가장 단순하게 남아 전달되는 형식이 '문장'이 되리라는 믿음은 버릴 수가 없다. '문자'가 없는 '문명'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백승종 선생은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 말미에서 '가짜뉴스'가 SNS에서 판을 치는 시대에도 '불량한 문장'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통찰과 지혜가 빛나는 영롱한 문장들이 장차 세상의 흐름을 더욱 정의롭고 평화롭게 바꿀 것"이라고 믿으며 책을 마무리한다.
지금의 '스마트 시대'는 더 많은 사람들을 '명문장가'로 만들 것이고, 그 평범한 다수 '명문장'들이 증폭되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이다.


"시대의 조류야 언제든 변하기 마련이다. 그에 발맞춰 형식도 바뀌겠지만 그래도 좋은 문장이 아주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어질고 아름다운 문장에 깃든 위대한 힘, 영혼을 뒤흔드는 그 힘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머나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을 이끄는 한 줄기 빛이다."
-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 '마치며. 오늘날 우리에게 문장이란 무엇인가', 백승종.

***

1.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 백승종, <김영사>, 2020.
2. [가짜뉴스의 고고학], 최은창, <동아시아>, 2020.
3. [삼봉집(三峯集) - 2], 정도전, 정병철 편저, <KSI한국학술정보>, 2009.
4.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석필>,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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