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역사, '문명'의 역사
'도시'의 역사, '문명'의 역사
- [도시로 보는 유럽사], 백승종, <사우>, 2020.
-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교과서에 실린 공식적 종교개혁 이전에 보헤미아 사람 '얀 후스(Jan Hus)'가 있었으니, 그는 16세기에 일어난 모든 변화의 선구자였다. 후스가 활동한 시기는 15세기다... '후스파 운동'이라 불리는 이 흐름에는 한세기 뒤의 '루터파'가 친숙함을 느꼈을 '온건파'도 있었고, 급진적인 '타보르파'도 있었다. 후자('타보르파')는 모든 재화를 공유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려 한 '기독교 공산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 후스 시대와 루터 시대의 중요한 차이 하나는 인쇄기의 발전과 읽고 쓰는 능력의 증대였다."
- [유럽민중사], <2. 다른 종교개혁>, 윌리엄 펠츠, 2016.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은 흔히 마틴 루터(Martin Luther)로 대표된다. '면죄부'를 통해 세속적 부를 축적하던 부패한 교황청을 비판한 <95개조 반박문>의 파괴력은 성경의 인쇄와 대중화를 토대로 한다. 그런데 루터는 종교개혁을 넘어선 '사회개혁'은 부정했고 오히려 탄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대의 모순은 정치경제체제의 문제였지 결코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종교개혁'만으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없었다.
우리에게 14세기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있기는 하지만, 15세기 유럽의 구텐베르크 인쇄술 혁명은 16세기에 이르러 대중화되고 문자의 보급에 기여했으며 다수 민중들이 두루마리가 아닌 '책(코덱스)', 주로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자유의 도시' 체코 프라하 광장에 동상으로 서 있는 신학자 얀 후스(Jan Hus)는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한세기 앞선 15세기에 이미 타락한 '종교'를 너머 불평등한 '사회' 체제를 변혁하고자 했다. 그 결과 후스는 파문과 화형을 당하고 그의 정신을 이은 '후스파 운동'은 성경의 대중화라는 문명을 만나지 못한 채 기존 체제로부터 처절하게 말살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한세기 전 후스나 동시대 토머스 뮌처(Thomas Muntzer) 등에 비하면 '개혁성'으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을 넘어서 '사회변혁'을 외쳤던 '혁명가'들을 기득권과 결탁하여 짓밟은 '보수반동성'으로 연명했다.
현 체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구반동 세력과 거대양당 과두지배 동맹을 맺고 사회체제 변혁을 요구하는 소수 다양한 진보정치세력을 말살하는 지금 우리의 '민주당'과 같다.
역사학자 백승종 교수는 아테네와 로마, 스톡홀름과 콘스탄티노플, 프라하, 런던과 파리, 빈과 베를린 등 유럽의 유명 '도시'들을 답사한 기록을 토대로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유럽사'를 조망한다. [도시로 보는 유럽사](2020)를 통해 그 도시들에 직접 가보지는 못했어도 유럽 '문명'의 역사를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테네로부터 고대 도시국가의 발현을 보고 로마에서 도시 공화제를 벗어난 제국의 향기를 느끼며 바이킹의 후예들이 건설한 북유럽 복지국가의 힘을 발견한다. 보헤미안적 자유의 도시 프라하에서는 거대 제국들과 기득권에 맞선 '저항과 혁신'의 역사를 본다. 위에서 만난 얀 후스 뿐 아니라 천문학의 대가 튀코 브라헤(Tyge Brahe)와 그의 제자로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용한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는 얀 후스의 저항정신의 산실로서 16~17세기 당시 신앙의 자유가 존중되던 프라하였기에 가능했다.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하자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기독교도였던 그들은 이슬람의 지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천 년 동안 고이 간직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을 이탈리아에 전해주었다. 이로부터 새로운 문화운동인 르네상스가 일어나게 되었다. 유럽에 새 시대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 [도시로 보는 유럽사], <콘스탄티노플>, 백승종, 2020.
로마 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고 서로마가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무너진 후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중심으로 비잔틴 제국이 1천년 이상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독일 지질학자 리히트호펜이 명명한 '실크로드'를 잇는 '중간지대' 도시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철옹성'으로 불리던 콘스탄티노플은 15세기 중엽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초대형 대포를 앞세워 점령했고 기독교적 명칭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식 '이스탄불'로 명명되었으며 소피아 대성당은 모스크가 되었다. 동서양을 매개하던 학자와 지식인, 예술인들이 이슬람 술탄의 지배를 벗어나 오래전 몰락한 서로마 지역으로 몰려와 '르네상스'를 선도했다는 이야기와 오스만 투르크가 향신료 중개료를 인상하는 바람에 포르투갈 모험가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로 가는 항해로를 개척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 각 사실들의 인과관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무솔리니가 발호하던 시절, 그에게 끝까지 저항한 한 사람의 위대한 정치사상가가 있었다. 옥중에서 사망한 안토니오 그람시였다...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 '진지전(war of position)'... 마치 진지를 구축하여 전투를 벌이듯, 지식인들이 운동의 거점을 만들어서 대중의 세계관을 차츰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기득권층의 '헤게모니'를 대중이 장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되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보았던 것인데, 수긍할 만하지 않은가."
- [도시로 보는 유럽사], <로마>, 백승종, 2020.
고대 로마 제국의 발원지, 근대 '르네상스'의 지역이자, 현대 '파시즘'의 발상지 로마를 그곳 출신 천재작가 움베르트 에코는 '역사의 실험실'이라 불렀단다. 파시스트 무솔리니와 그에 끝까지 저항한 그람시, 로마 시조 로물루스-레무스의 '형제살육'의 역사와 '공화정'의 탈을 쓴 '로마 제국'의 역사는 유럽연합의 시대인 현재까지도 역동적인 유럽사를 관통한다. 케사르와 마키아벨리의 후예인 로마인들은 '제국'과 '군주제'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도 스스로가 '공화정'을 만들고 유지해 온 '자유 도시민'임을 잊지 않았다. 인류 최초로 '제국'이라는 체제를 만든 길가메시 키루스적이고 페르시안적 이슬람 지배로부터 '르네상스인들'이 탈주한 이유가 이 '자유 도시민'의 습성 때문 아니었을까.
"'30년 중국을 이해하려면 선전(深圳)을 보고 1,000년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베이징(北京)을 보고 3,000년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시안(西安)을 보라'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 중국의 굴기를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개혁개방 성과를 대변하는 선전 뿐 아니라 찬란한 역사를 구가했던 심장부를 아울러 살펴봐야 한다. 베이징과 시안 그리고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항저우(杭州), 난징(南京) 등 중국의 역대 도읍지는 중국 역사의 심장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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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중심으로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중국처럼 땅덩어리가 크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의 역사라면 더더욱 그렇다. 도읍지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공간으로 중국을 읽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도읍지에는 '중심'으로서 구심력이 작동하기 마련이다."
-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여는 글>, 이유진, 2018.
중국전문 연구자 이유진은 시안(서안), 뤄양(낙양), 카이펑(개봉), 항저우(항주), 난징(남경), 베이징(북경)의 '여섯 도읍지 이야기'로 중국사를 조망한 책,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2018)에서 '문명'의 중심지였던 각 왕조의 수도를 돌아보는 것을 '공간'을 통해 시간적 역사를 읽는 하나의 방식으로 채택한다.
시안(서안)은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아시아측 관문이었고 인류문명의 주요 발상지인 중앙아시아와 고대로부터 활발히 교류하던 통로였다. 전국시대를 끝내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진나라를 포함하여 시안은 서주와 전한, 남북조시대 서위와 북주를 이어 수,당을 거치며 고대의 화려한 교류문화를 꽃피웠다.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中)'이라 칭한 '중국(中國)'은 기원전 3천년경 주나라 2대 성왕의 명에 따라 주공이 뤄양(낙양)에 도읍을 정하며 "천하의 중심으로 사방에서 공물을 바치는 거리가 같다([사기], <주본기>)"고 한 것에서 유래한다. 뤄양이 있는 허난성은 지금까지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다. 뤄양은 동주, 후한, 삼국시대 조위, 남북조 북위, 5대10국 후량과 후당 등 시안에서 일단 망조가 든 제국이 부흥을 도모하기 위해 다시 개국할 때 선택한 중국인들의 '고향'과도 같다.
고대에서 근세로 접어드는 과정이었던 5대10국의 난립시대에 카이펑(개봉)이 새 도읍지로 떠오르는데, 후진, 후한, 후주 등을 거쳐 터를 닦은 카이펑은 북송 시대에 세계적 무역도시로 발전한다. 콘스탄티노플 인구가 50만이던 10~11세기에 북송 카이펑의 인구는 150만 명이었단다. 당시 우리 고려의 개경도 약 40만의 인구였다는데 동아시아 일대의 번영을 추측해볼 수 있다. 카이펑은 지난 문명 위에 다른 문명이 계속 쌓인 결과 북송의 유적은 현재 카이펑 지하 10미터 아래 묻혀 있단다.
항저우(항주)는 거란과 여진, 몽골에 의해 아래로 쫓겨난 한족(漢族)의 남송이 오래전 춘추전국시대 남방 '오랑캐' 도시를 악비로 대표되는 중원 재탈환의 기지로 삼았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원나라 말기 농민반란군 세력들을 석권하고 '오왕'이 된 난징(남경)은 넓은 중원 통치를 위한 '남쪽 수도'로서 삼국시대 오, 5호16국시대 동진과 남북조시대 남조의 중심이었다. 물자가 풍부한 '강남'으로 불리며 사치와 향락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 중화민국의 수도가 된다.
베이징(북경)은 '남경'에 대비되는 '북쪽 수도'로서 몽골의 원나라로부터 명나라 영락제 이후와 청나라를 거치며 중국 근현대 왕조의 명멸을 지켜본 도시로서 지금까지 중국인들의 '도읍지'다.
'도시'를 중심으로 한 역사관은 '문명'의 역사관의 다른 이름이다.
소규모로 흩어져 살던 인류가 정착을 하고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회운영 체제를 갖추게 되고 경계를 둘러친 '도시'.
서양의 '도시(burg)'는 하나의 도시국가로서 '성안의 자유민(부르주아)'의 기원이 된 공간이었고, 아테네와 초기 로마와 같이 고대노예제 사회였음에도 '자유시민' 사상을 퍼뜨려 왔다. 한편, 동양의 '도시'는 '천자'를 참칭하는 권력자들이 점령하여 제국의 수도로 삼는 도읍지였고 우리를 비롯한 동양의 민중들은 오랜 기간 강도나 폭력배와 같은 '천자'의 노예들이었다. 물론 이 '천자'들은 왕조체제의 내부 모순이 불거지면서 반복된 혁명에 의해 타도되었고, '새로운 세상'이 아닌 다른 '천자'로 대체되어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의 기반은 사회 체제 변혁을 요구하던 대규모 민중반란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민중반란군의 최종 목표는 제국의 '수도'였고 그들이 파괴해야 했던 것은 낡은 체제라는 '문명'이었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문명'이란 '기술'의 전수로 본다. 제국이 멸망하고 다른 권력자가 들어서 사상과 종교나 철학이 바뀌고 체제가 바뀔지언정 여전히 '낫'이라는 기구는 들에서 곡식을 베고 있다는 얘기다.
'문명'이 집중된 '도시'는 역사 속에서 스스로의 '문명'을 파괴하지만 다수 인류가 면면이 이어온 '문명'을 지속적으로 보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도시'의 역사는, 그 자체로 '문명'의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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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시로 보는 유럽사], 백승종, <사우>, 2020.
2.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3. [유럽민중사 - 보통사람들이 만든 600년의 거대한 변화](2016), 윌리엄 펠츠,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18.
4. [로마제국 쇠망사](18세기), 에드워드 기번, 황건옮김, <까치>,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