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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Feb 06. 2021

[로마제국 쇠망사](18세기) - 에드워드 기번

'공화국'의 탈을 쓴 '제국'의 '쇠망사'

'공화국'의 탈을 쓴 '제국'의 '쇠망사'
- [로마제국 쇠망사](1776~1788), 에드워드 기번 지음, 데로 손더스 편집, 황건 옮김, <까치>, 2010.
- [공화국의 몰락](2003), 톰 홀랜드, 김병화 옮김, <웅진닷컴>, 2004.





"일개 도시가 하나의 제국으로 팽창하게 된 경이는 철학자의 관심을 끌 만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로마가 쇠망한 것도 이 무절제한 팽창이 가져온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였다. 번영은 쇠망의 원리를 성숙시켰고, 정복의 확대에 의해서 파괴의 원인이 증가했으며, 그리고 시간이 지나 또는 우연히 인위적 기둥들이 허물어지게 되자 그 방대한 구조물은 자체의 무게에 짓눌려 무너졌다. 그 붕괴의 이야기는 간단명료하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제국이 왜 멸망했는가를 묻기보다는 오히려 그처럼 오랫동안 존속했다는 데 놀라게 되는 것이다...
로마의 통치권력은 (수도 이전으로) 이전되었다기 보다는 (동서로) 분할되었다."
- [로마제국 쇠망사], <15장>, 에드워드 기번, 1787.


'제국'의 몰락 또는 그 쇠망을 이야기할 때 보통 마지막 황제가 혐의를 쓴다. 그러나 북송은 사치군주 휘종 전에 신법 개혁을 하고자 했던 신종 때부터 쇠망의 기운이 있었고, 명나라는 숭정제가 목매달기 전에 만력제의 오랜 통치기간에 이미 기울어지고 있었으며, 한나라의 가장 강력했던 무제 시기에 제국의 내리막길은 시작되었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로마는 보통 서양 역사에서 '제국'의 대명사다. 한편으로 '공화국' 체제, 즉 '공화정'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사실, 로마 시대 '공화국'과 '제국'의 구분은 근현대사의 그것처럼 명확하지 않았다. 두 개념 모두 근대 이후에 확립된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고대시대 모든 로마 황제(Emperor)들의 명분상 임무는 '공화정을 지키는 것'이었다.



영국의 18세기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 1737~1794) 유럽대륙을 여행하던  이탈리아 로마의 카피톨리움 폐허를 보고 장대한 로마제국 역사의 집필을 구상했다. 1776년부터 1788년까지 지어진 전체 6권의 [로마제국 쇠망사] 탁월하고 재치있는 문장으로 영문학사에서도 높이 평가된단다. 인도 네루 수상이 감옥에서 열심히 탐독했고 영국 처칠 수상의 재치와 유머의 원천이기도 했다는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누가 봐도 진지하기만  역사에 관한 전혀 진지하지 않은 담이자 길고  수다에 가깝다. 예를 들어 무능한 군주 막센티우스를 두고 "오랫동안 군주가 자리를 비워 섭섭해했던 로마인들도 그의 재위 7 동안은 군주의 로마 거주를 개탄(7)"했으며, 기원후 325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론' 승리로 동방의 기독교 아리우스파를 몰아냈으나 이후 끊임없는 종교분쟁으로 정치적 고난을 겪는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우스의 모험은  장의 우스꽝스러운 일대기로 서술하면서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황제는  찬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는 가장 격렬한 정치권력의 행사에도 저항할  있는 기독교 교리의 힘을 경험한 최초의 기독교 황제였다(10)" 식의 풍자 일색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웃기는 서술이 이어지는 장은 <13> '유목민의 풍습' 등인데 편집본에서  장은 기번의 원문에서는 <26~29> 해당한다고 한다. 이러나 저러나 권력자의 탐욕이나 민중들의 '냄비정신'  인간군상은 기번에게 전지적 후대 역사가의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된다.
기원후 1세기 로마 '5현제(五賢帝)'부터 5세기 서로마 멸망 이후에도 1천년 이상의 동로마(비잔틴)제국의 역사를 만연체로 서술했다는 6권은 너무도 길기에 언론인 데로 손더스가 1952년에 발췌하고 요약한 판본으로도 일반인들은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충분히 읽어볼  있다. 손더스의 요약본은 원문을 그대로 발췌했으므로 기번의 문장을 생생하게 읽을  있다는데, 장황한 사설들은 과감히 생략하고 각주를 달았으며 부득이한 요약만 편집자 본인이 썼단다. 또한 기번 자신도 서술을 멈추고자 했던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 충실하게 발췌한  나머지 15세기 콘스탄티노플 멸망의 과정 1천년은 '원서 후반부 발췌(16)' 정리했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주요내용은 원서 전반부 98 '5현제' 시작인 트리야누스부터 476 서로마제국 멸망까지, '공화국' 몰락하고 '제국' 모습을 갖추자 마자 '쇠망' 씨앗을 배태하고 쇠퇴해가면서 결국 일부(서로마) 멸망한  4백년의 역사다.





"공화국은 야만스러울 정도로 '능력' 위주의 사회였다. 로마인이 생각하는 자유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들에게 역사는 노예가 될 신세에서 벗어나는, 영구적 경쟁의 동력을 기초로 하는 자유에로 나아가는 진화과정이었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런 위선이 공화국의 정체를 규정했다. 그것은 공화국 헌법의 부산물이 아니라 본질 그 자체였다."
- [공화국의 몰락], <1장. 모순적인 공화국>, 톰 홀랜드, 2003.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사실상 로마 '공화정'을 실질적으로 끝낸 카이사르의 양자 아우구스투스의 죽음 이후부터의 이야기다. 칼리굴라, 네로 등의 병적인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존엄자) 옥타비아누스와 다섯명의 현명한 황제(5현제) 사이의 기간으로서 굳이 '역사가' 입장에서 다룰 필요는 없을 것이다.
로마공화국의 몰락에 관해서 영국 역사가 톰 홀랜드(Tom Holland)는 2003년에 기원전 6세기 로마공화국의 시작부터 기원후 24년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의 죽음까지의 역사를 카이사르(Caesar)가 루비콘 강을 건넌 사건을 전후하여 서술한다. 원제목 [루비콘(Rubicon)]은 국역으로 [공화국의 몰락]이 되었다. 그만큼 기원전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강'은 공화국의 몰락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왔노라, 보았노라, 정복했노라!(Veni, vidi, vici!)"의 실력을 갖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어렸을 적 '주사위' 놀이를 좋아한 만큼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도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는 명언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고로 대중의 관심을 끌고 지지와 명성을 얻으려면 이 정도 '도박(주사위)'이나 유행어 쯤에는 능수능란해야 한다는 점은 고대와 현대를 막론한다.



로마는 늑대 젓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레무스 쌍둥이 형제가 기원전 753년에 건국 후 군사력으로 주변 지역을 점차로 복속시키면서 군주국이 되었으나, 기원전 509년 타르퀸이라는 독재자가 시빌(Sibyl)이라는 노파의 예언을 무시한 후 쫓겨나고 시민투표에 의한 '민주정'을 세웠으며 이후로도 이 '공화정'이 위기에 처하면 원로원이 보관해온 '시빌 예언서'를 들춰보며 시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공화국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아마도 아주 고대의 '시빌 예언서'는 독재에 항거한 민중폭동의 은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공화국'에서 원로원으로부터 선출된 임기 1년의 집정관은 2명이 서로 견제했고 호민관은 귀족이 아닌 시민이 뽑은 대표로서 서민정책을 펴는 귀족이었단다. 로마 창시자 로물루스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중심지 삼아 아벤티누스 지역의 동생 레무스를 살해하고 로마를 차지했다는데 위례(서울)를 기반 삼아 형제 비류를 죽이고는 미추홀(인천)을 먹은 백제 시조 온조 이야기와 닮았다. 로마는 승자 로물루스 지역 카피톨리누스가 귀족들의 대저택, 패자 레무스의 지역 아벤티누스 서민들의 '쪽방촌' 또는 '닭장촌'으로 나뉘기도 했는데 이 서민아파트 값 또한 엄청나게 비쌌으며 로마 전성기 인구가 고대 당시에 이미 100만명이 넘었다는 기번의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의 서울, 현대사회 대도시의 모습과 꼭 닮았다. 트로이 전쟁 후 피난온 아에네이아스(Aeneas) 후손인 율리우스 가문은 로마의 근본있는 귀족인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마도 이 집안 출신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빚내서 돈과 금품을 막 뿌려대고 남유럽 지역인 갈리아 원정 등의 군사적 성과를 통해 명성과 능력을 인정받은 카이사르는 1차 삼두정치 과정에서 당연히 당대 실력자들로부터 견제를 받았는데 경쟁자들을 치기 위해 카이사르가 던진 '주사위'가 바로 '루비콘 도강'이었다.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토 등을 제압한 카이사르는 이전 세대 술라가 역임한 '독재관' 10년 임기 시작 초반에 "부르투스, 너마저?(Et tu Brute?)" 한마디 남기고 살해되었다는데, 그만큼 '공화국'을 애정했던 카이사르의 동료 부르투스가 로마 광장에서 만세를 부를 때 이를 보는 로마 시민들의 시선은 차가웠단다.

[공화국의 몰락]은 카이사르 같은 독재관들이 초래한 것이 아니었다.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자유를 누리던 로마인들이 명예와 능력을 통해 성공하고 부를 독차지한 카이사르 같은 인물들을 숭배하고 스스로 문명과 풍요, 사치와 향락의 노예가 기꺼이 되고자 하면서 스스로 '공화국'의 기반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라쿠스 형제의 운명은 '공화국'의 근간에 대한 개혁을 행하려는 시도는 모두 '전제주의'로 해석될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급진적인 변화 프로그램은 제 아무리 이상적인 동기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서로 죽고 죽이는 경쟁으로 타락할 수 밖에 없다. 이 사실을 죽음으로 입증함으로써 그라쿠스 형제는 궁극적으로 자기들 목숨을 바친 바로 그 개혁을 좌절시켰다. 그들 이후의 호민관들은 목표를 더욱 신중하게 선택하게 되었다. 사회혁명은 영구히 유보되게 된다."
- [공화국의 몰락], <1장. 모순적인 공화국>, 톰 홀랜드.


기원전 130년대 토지를 민중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을 단행하려다가 차례로 살해당한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는 평민이 아니라 귀족이었다. 로마는 군사적 성과를 통해 출세한 자들의 '능력주의'가 숭배된 사회로 출신이 노예든 평민이든 '제국'의 팽창과정에서 전공을 세운 자는 부와 명예를 얻어 귀족이 되고 원로원 의원도, 집정관이나 호민관도 될 수 있었다. 물론, 이 '능력주의'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에 엄청난 금품과 뇌물을 뿌리고 경쟁적으로 대외팽창 전쟁을 일으켜야 했다. 역사적 경제토대가 노예체제냐 자본주의체제냐 차이만 있을 뿐, 지금은 허위에 불과한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현대 미국이나 지금의 우리 사회와 같다.
벼락성공을 위해 서로 밟고 밟히는 이 문명적 정글인 '능력주의' 사회에서 그나마 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었으니 '공화국'이 바로 그것이다. 공화국 한창 때인 기원전 2세기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의 명분도, 이들의 개혁을 저지한 귀족들의 반개혁 명분도 모두, '공화국 사수'였다. 그 어떤 실력자도 '황제'나 '독재관' 또는 '아우구스투스(존엄자)'가 될 수 있었지만 전제적 '독재군주'가 될 수 없었다. '독재관' 술라도, '황제(Kaiser)'의 어원이 된 카이사르(Caesar)도, '존엄자' 옥타비아누스도 스스로를 '전제군주'로 부르지 않았다. 다만,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군사력보다는 관용적 정치력으로 원로원으로부터 '존엄자(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을 부여받으며 '원수정(元首政)'이라는 로마 제정(帝政)의 정치적 틀을 만들었다. 이후 동로마가 멸망하는 15세기까지 '로마공화국'이라는 이데올로기는 허울 뿐인 원로원과 끝까지 명목상 함께 했으나 이 귀족들은 실질적으로 '로마제국' 황제들의 신하들에 불과했다.
톰 홀랜드의 [공화국의 몰락]은 기원후 24년 아우구스투스의 죽음으로 끝맺는데 그의 죽음은 바로 '공화국'의 정치적 몰락이었다.
로마 시대 진정한 반란이자 혁명은 노예경제체제를 흔드는데는 실패했지만, 기원전 73~71년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 뿐이었다.





"역사가는 이런(형이상학적/종교적) 고매한 고찰이 옳으냐 그르냐를 주제넘게 논하지 않고, 다만 경험에 의해서 입증할 수 있는 관찰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격변(365년경)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격정에 따른 재앙을 더욱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진이나 해일, 태풍이나 화산폭발로 인한 재난은 일반적인 전쟁의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발렌스 황제의 치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로마제국의 몰락 과정에는 개인의 행복과 안전이 직접적으로 침해받았으며, 당대의 기술도 노동의 성과들도 모두 스키타이와 게르마니아의 야만인들에 의해서 난폭하게 손상되었다. 훈족(흉노족)의 침입으로 서로마의 여러 지방으로 쫓겨간 고트족은 40년도 못되는 기간에 도나우 지역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그들의 군사적 승리로 자기들보다 훨씬 더 야만적인 수많은 부족들의 이동과 침입의 길을 열게 되었다."
- [로마제국 쇠망사], <13장>, 에드워드 기번.


스스로를 시종 '역사가'로 칭하고 혹은 '철학자'로도 암시하는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의 역사를 '경험에 의해 입증할 수 있는 관찰'에 의해 장황하지만 재치있게 풀어낸다. '5현제' 이후 제국의 팽창과 함께 기원후 3세기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를 동서로 분할하면서 '전제군주정(專制君主政)'을 확립했다. 이미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와 그리스 반도는 물론 서아시아와 유럽, 북아프리카에 속주를 둔 '로마제국'은 허울 뿐인 '공화정'이나 배우(actor)처럼 연극적 웅변이나 해대는 기만적인 '원수정'으로 지배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해졌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결국 제국을 분할한다. 밀라노 중심의 서로마와 니코메디아 중심의 동로마는 2명의 '황제(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리고, 나머지 갈리아와 아프리카는 2명의 '부황제(카이사르)'가 다스리는 방식이다.
기번이 본 '쇠망'의 키워드인 '분할'은 사실 그 어떤 '세계제국'으로도 운영할 수 없는 로마의 '팽창주의'의 다른 말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기번의 말은 정정되어야 한다. '로마는 분할로 쇠망한 것이 아니라 팽창으로 망한 것'이라고.


https://brunch.co.kr/@beatrice1007/222


기원후 4세기에는 전세계 기후변화가 있었던 듯 하다. 북쪽의 게르만, 고트족이 먹을 것을 찾아 급격히 이동했고 아시아에서도 흉노,선비, 갈, 저, 강족의 이른바 '다섯오랑캐'가 중원을 차지하려고 엎치락뒤치락하는 '5호16국'의 시대와 겹친다. 다신교 로마사회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기원후 313년 '밀라노 칙령'의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330년)한 후 발렌티아누스와 그의 사촌동생 발렌스 시기 로마제국은 아시아의 페르시아적(또는 중국) 영향으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제국'으로 변모해 갔고 주요한 속주의 군사력과 나아가 정치권력까지 이 밀려드는 서고트족 군왕 알라리크에게 맡김으로써 '제국'의 '쇠망'을 가속화한다. 화려한 '태평성대' 전성기에 이미 '쇠망'과 '몰락'의 씨앗은 충분히 자라고 있었다. T.S.엘리엇이 "4월은 잔인한 달"이라 말한 것처럼 만발의 시기에 이미 죽어갈 운명을 배태하여 슬픈 역사의 '변증법(辨證法)'이 바로 에드워드 기번과 톰 홀랜드의 역사관이다.


"'자유를 너무 많이 누리다 보면 끝내는 노예 신세가 된다'는 것이 키케로의 비통한 판단이었다. 그의 세대, 자유 공화국의 마지막 세대가 그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지 않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노예제의 귀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운 세대, 새로운 시대가 밝혀내야 할 사실이었다."
- [공화국의 몰락], <11장. 공화국의 죽음>, 톰 홀랜드.


로마시민은 '공화국의 자유'를 5백년 간 누리면서 '능력주의'와 부를 숭배했고 이를 실현한 벼락출세자들을 찬양했다. 로마의 쪽방 서민아파트 값을 천정부지로 올리면서 권력의 주변에서 서성대며 떡고물을 받아먹고 무리한 팽창을 통해 스스로도 감당못할 '제국'을 건설했으나 결국 로마제국의 긴 역사는 그 자체로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가 되었다.
노예경제체제에서 '제국주의'적 팽창의 원인은 노예노동력 확보를 통한 생산력 발전과 부의 축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국의 쇠망사'는 그 자체로 노예제 사회의 역사단계적 모순을 반영한다.
그렇게 모든 역사적 문명체제는 그 전성기와 함께 이미 다음 체제로의 이행을 준비한다.
물론, 현재 자본주의체제 또한 이 역사의 흐름에서 예외일 수 없다.

로마공화국의 사상가이자 웅변가로 그 연극적 요소로써 당연히 정치가이기도 했던 키케로가 [공화국]에서 말했다는 '노예'는 체제적 노예가 아닌 사상적 노예였다. 로마공화국 시민의 '자유'가 확장하면서 본인들 스스로도 감당못할 체제를 만들고 이에 굴종하는 '노예'적 삶은 당대 로마인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었다. 진정한 '평등주의'를 지향한 스파르타쿠스 노예반란은 물론 그라쿠스 형제의 호민관개혁 조차도 이 '자유시민'들에 의해 '공화국'의 이름으로 좌절되고 말았으며, 결국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시대를 맞아 변화시켰다. 로마제국의 팽창과 이로 인했을 기후변화의 시대를 맞아 아시아에서 밀려온 유목민족과 북쪽의 야만인들의 새로운 세대가 만든 역사적 변화와 혁명의 토대에는 노예경제체제의 변화라는 거대한 저변의 흐름이 있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음과 동시에,
하루아침에 망하지도 않았다.

***

1. [로마제국 쇠망사](1776~1788), 에드워드 기번 지음, 데로 손더스 편집, 황건 옮김, <까치>, 2010.
2. [공화국의 몰락](2003), 톰 홀랜드, 김병화 옮김, <웅진닷컴>, 2004.

3. [청소년을 위한 로마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원저, 배은숙 지음, <두리미디어>,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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