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통해 보는 고사성어(故事成語) -1
‘법삼장(法三章)’, 그 개혁(改革)의 정신으로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통해 보는 고사성어(故事成語)
: ‘항우본기(項羽本記)’, ‘고조본기(高祖本記)’를 통해 본 초한전쟁(楚漢戰爭) - 1
어느 사회에든, ‘법(法)’이 있다. 어떤 이에게 이 ‘법’은 외부의 어떠한 개입이나 간섭으로부터 독립되어 ‘가치중립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기준을 설정하고 제약하는 규범인 반면, 어떤 이는 지배-피지배계급의 국가권력 관계와 결부시켜 이 ‘법’을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배계급의 의지의 표현’이라 규정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 사회,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이 있다. 어떤 이에게 이 ‘법’은 남북의 체제대립 하에서 국가의 ‘안보(安保)’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치인 반면, 어떤 이에게 이 ‘법’은 사회적 부와 권력을 독점한 세력들이 허위적인 ‘국가안보’가 아닌 실질적인 자신들의 오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존치(存置)시키려는 낡은 지배기제로 작용할 뿐이다. 우리 사회 민주화 과정에서 기득권 세력들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들을 탄압하여 수많은 ‘빨갱이’들을 양산하는데 주요한 무기가 되었던 이 국가보안법의 존폐(存廢)를 두고 벌어지는 쟁투(爭鬪)의 전선(戰線)은 이 ‘법’에 대한 시각의 다름에 따라 합치될 수 없는 커다란 차이를 두고 그어진다.
기원전 206년, 진(秦)나라 말기 억압적인 중앙권력에 반기를 든 중국 최초의 농민봉기 지도자 진승(陣勝)과 오광(吳廣)이 반란(反亂)을 일으킨 지 3년이 지난 해이자, 진시황(秦始皇)을 이은 2세황제 호해(胡亥)가 환관 조고(趙高)에게 죽임을 당한 이듬해인 그 해, 이후 한(漢)나라를 세워 중국을 다시금 통일하여 한고조(漢高祖)로 추존(推尊)되는 유방(劉邦;劉季)은 패상(覇上)이라는 지역에서 진왕(秦王) 자영(子嬰)의 항복을 받고 함곡관을 넘어 진나라 수도 함양(咸陽)에 입성하게 된다. 진왕 자영은 2세황제 호해를 시해하고 자신을 황제로 세우려 하던 진나라 간신 조고를 제거하고 스스로 진왕이 된 자로서 그 해 얼마 후 진나라 최후의 맹장 장함(章함)과의 고전(苦戰)으로 유방보다 조금 늦게 함양에 도착한 유방의 숙적(宿敵), 항우(項羽;項籍)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나서 항우는 함양을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고 항복한 진나라 사람들을 도륙한 후에 초회왕(楚懷王)을 의제(義帝)로 내세우고 공(功)이 있는 장수들을 각 지역의 제후로 봉한 후(논공행상;論功行賞),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어 자신의 고향인 팽성(彭城)으로 돌아간다. 함양에 남아 천하통일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는 항우측 책사(策士) 범증(范增)의 헌책을 무시한 항우의 이와 같은 처사는 이후 돌이킬 수 없는 후회로 남는데, ‘성공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밤에 비단옷을 입고 가는 것과 같다’고 하는 금의야행(錦衣夜行), ‘성공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금의환향(錦衣還鄕) 등의 고사는 여기서 유래한다고 한다.
어쨌든, 한고조 유방의 함양 점령은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진시황에 의해 통일된 후 십여년 동안 진나라 법가체제(法家體制)의 폭정(暴政)에 시달린 당시 민중(民衆)들이 진승과 오광의 봉기를 기폭제로 하여 난을 일으킨 후 처음으로 진나라 수도를 함락한 사건이었다. 한 해 전, 장초(張楚)의 왕을 칭하던 진승이 죽음으로써 초(楚)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항우의 숙부 항량(項梁)이 옹립한 초회왕이 부활한 초나라의 장수로서 수많은 군현을 함락시키며 활약하던 항우와 유방 등의 장수에게 진나라 수도 함양에 먼저 들어가는 자에게는 관중왕(關中王)의 작위를 내리겠다고 약속하였고 항우와 유방, 두 장수의 경쟁에서 보다 쉬운 길을 택한 유방측은 순전히 운이 좋은 덕에 항우보다 먼저 관중에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패(沛)현의 시골 저잣거리에서 삼십대 후반까지 건달노릇을 하던 한고조 유방은 옛 초나라의 뿌리깊은 무장(武將) 집안의 유일한 자손인 서초패왕 항우와 달리 금욕이나 강철 같은 규율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항우보다 먼저 함양에 이르러 진왕의 자발적인 항복까지 받아낸 그는 자신이 마치 천하를 다 얻은 듯한 착각에 빠져 진시황 시절부터 갖추어진 수도 함양의 재물과 아방궁(阿房宮)과 같은 호화로운 궁전 등의 온갖 사치함에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안주하려 한다. 이에 유방의 오른팔 격인 장사(壯士) 번쾌(樊噲)가 그를 설득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나 유방측 최고의 책사(策士) 장량(張良)의 충언(忠言)을 듣고 다시 패상(覇上)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여기서 장량의 유명한 고사 ‘양약고어구 충언역어이(良藥苦於口 忠言易於耳)’가 유래한다. 즉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옳은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결국 도움이 된다는 의미이다. 또한 유방은 함양의 재물과 유산, 행정서류들을 고스란히 봉인하고 패상으로 돌아가며 기존 진나라의 엄격한 법제도는 모두 폐지하고 간략한 법제도만 포고하는데, ‘법삼장(法三章)’, 혹은 ‘약법삼장(約法三章)’은 이를 두고 이른다.
法三章 (法:법 법 / 三:석 삼 / 章:문장 장)
세 장의 법.
민중들의 생활을 어우르는 올바른 통치를 위해서는 복잡하고 엄격하기만 한 법보다는 단순한 법이 더 긴요하다는 의미이다. 이는 유방이 관중을 지나 진나라 수도 함양을 점령한 후 기존의 법을 폐지하고 사람을 죽인 자, 사람을 상해한 자, 도둑질을 한 자 등의 처벌에 관하여 단순히 세 가지 법만을 공표하여 민심(民心)을 사로잡은 고사로부터 유래한다.
이와 같이 엄격한 법제도 아래서 억압받던 민중들을 해방시킨 유방은 관중의 부로(父老)들로부터 ‘패상의 진인 유방(覇上之眞人 劉邦)’이라 불리게 되는데, 이들 앞에서 행한 그의 연설을 들어보자,
“여러분은 오랫동안 가혹한 억압에 시달려 왔습니다. 국정을 비판했다가는 일족이 몰살당해야 했고, 길에서 쑥덕거리기만 해도 잡혀가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거리에서 참수를 당할 정도였습니다. 제후들은 약속했습니다. 관중에 먼저 들어간 자가 왕이 되기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관중의 왕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왕의 자격으로 나는 여러분과 약속합니다.
우선 법은 세 가지만 정합니다(법삼장;法三章). 즉 사람을 죽인 자, 사람을 상해한 자, 도둑질을 한 자는 그 죄에 따라 처벌한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 진나라가 정한 모든 잔인하고 복잡한 법령들은 모두 즉시 폐지합니다. 앞으로는 모두 편안하게 지내시기를 당부합니다.
우리가 관중에 들어온 목적은 오직 여러분을 위하여 학정(虐政)을 없애자는 데에 있으며, 결코 난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또한 우리 군사가 다시 패상으로 철수한 것은 여기서 제후들의 도착을 기다려 그들과 정식으로 협의를 하기 위한 것일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안 항우가 거록(鉅鹿)에서 진나라 최후의 맹장 장함의 항복을 받고 거세게 함양으로 쳐들어 온 후, 언급했듯이 진왕을 비롯한 진나라 사람들을 살육하고 함양의 모든 유산들을 모조리 파괴함으로써 민중들을 위한 정치는 파탄이 나지만, 민심을 바로 읽은 유방이 내건 ‘법삼장’의 개혁(改革)정신은 이후 천하패권(天下覇權)을 둔 쟁패(爭覇)에서 항우에 대항할 때마다 민중들이 유방의 깃발 아래 모이게 되는 확실한 기반이 되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물론, 세 가지 법, 첫째,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둘째, 남을 다치게 한 자는 그 죄에 따라 처벌하며, 셋째 남의 물건을 훔친 자 또한 그에 따라 처벌한다, 는 ‘법삼장(法三章)’은 온갖 엄격한 법령에 시달리던 진나라 치하의 민중들을 해방시켜 진제국 체제 이전의 평화롭던 시절로 돌아간다는 뜻이었기는 하나 또 다른 제국(帝國)을 건설하여 민중들을 지배하려 했던 한고조 유방의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선언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오랜 전쟁과 폭정으로 억눌리기만 하던 사회구성의 기반인 대다수 민중들에게 ‘법’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보기 좋은 한 일례가 되기도 한다.
‘법(法)’은 사회 구성원들의 갈등을 조정하여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게끔 행동규범을 설정하는 것을 주된 존재이유로 한다. 나름의 역사적 필요에 의해 탄생한 국가권력(國家權力)이 시대가 흐르면서 사회구성원들의 위에 군림하면서 독립된 정치적 생명체가 된 현대사회에서, 국가권력의 유지를 위한 ‘법’ 또한 갈수록 사회구성원들로부터 소외(疎外)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권력투쟁의 정점에는 언제나 ‘법’을 중심으로 하는 헤게모니 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법’이 지니는 중요한 존재가치를 정확히 증명해 준다, 그런 만큼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국가권력의 기반이 되는 거대한 토대가 그 국가의 구성원이고 그들의 생활이듯이, ‘법’이 사회구성원들의 정치사회적 생활 자체를 억압하거나 구속하는 기능을 하고, 해당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과 다른 다양한 생각들이 공개적으로 경쟁하여 보다 나은 대안들을 창출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결국에는 사회의 발전에 질곡(桎梏)으로 작용하는데 그 존재목적을 두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반세기 이상 냉전체제를 통해 사회적 부와 권력을 독점해 온 소수 기득권 세력들의 안위만을 위해 존재했던 낡을 대로 낡은 ‘국가보안법’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름 아닌 바로 이 지점에 있다.
(2004년 12월)
- [사기 본기], 사마천,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