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주자' 혼자만 알고...
어찌 '주자' 혼자만 알고...
- [윤휴 -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이덕일, <다산초당>, 2011~2021.
"세상의 많은 이치를 어찌 주자(朱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
- 백호 윤휴, <숙종실록 3년>
조선 숙종 시기 당파를 갈아치우는 '환국(換局)' 중 첫 사건이었던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희생된 남인(南人) 유학자 중 윤휴와 허적이 있다. 17세기 조선 중후기 '주자(주희)'의 유교경전 해석을 절대화하던 우암 송시열(1607~1689) 같은 '서인' 당파에 의해 죽임을 당한 '청남(淸南)'의 영수 백호(白湖) 윤휴(尹鑴:1617~1680)가 [역경]이나 [중용] 등 유교경전들을 '주자'와 다르게 해석하고 집주한 본인을 비판한 교조적 서인 '성리학자'들에게 항상 위와 같이 말했다고 <숙종실록>은 전하고 있단다.
청나라로부터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인조의 둘째아들 봉림대군은 북벌을 꿈꾸던 임금 효종인데, 서인(西人)의 당수 송시열과 '북벌(北伐)'을 논한 1659년 '기해독대(己亥獨對)' 후 한달 반만에 효종은 의문스럽게 급서한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의 북인(北人) 정권을 숙청한 서인들은 청나라로부터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인조와 효종을 앞세워 '북벌'을 당론으로 부르짖었지만 이는 오로지 '국내정치'용 선동에 불과했다. 즉, '황제의 나라'로 모시던 명나라에 복수하고자 청나라를 쳐야 하는데 조선 내부 결속을 다져야 하므로 항상 준비 중이며 실제 북벌을 논하면 그 대의는 동의하되 항상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서인의 '북벌'은 그냥 '당론'이었고 송시열을 비롯한 그 어떤 서인 정치가도 실제 '북벌'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왜란과 호란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던 조선 중후기 신분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서인들이 내세운 것은 유교의 '예법(禮法)'을 강화하여 계급지배의 질서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고, 실제 '북벌'을 위한 '내부결속' 방책으로서 다수 농민들의 경제적 안정을 위한 '대동법(大同法)'의 전국 확대도 지배계급의 이익 사수를 위해 기를 쓰고 반대한 자들 또한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정치가들이었다. 그들 '서인' 당파는 늘 말했단다. '북벌'이든 '대동법'이든 그 취지는 좋으나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조선의 지배계급을 혁파하지 않는 한 그 '시기'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었는데, 그들은 오히려 지배계급의 강화를 위해 유교의 '예학'을 더욱 강조하고 '성리학'을 교조화했다. 가히 지금 거대양당 정치가들의 '표본'으로서 손색이 없다.
물론, '대동법'의 확대를 위해 일생을 건 정치가 잠곡 김육(1580~1658) 또한 '서인'이었으나, 특산물로 내던 조세를 쌀로 대체함으로써 다수 농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려 했던 김육의 개혁정치에 반대한 송시열 등은 같은 '서인'임에도 각 '한당(김육)'과 '산당(송시열)'으로 분열된다. 조선 유교적 지배계급의 화신이었던 17세기 조선의 '송자' 송시열은 12세기 중국의 '주자(주희)'의 '성리학'을 교조화하면서 '서인'의 당수로서 '실질적 '북벌'을 추진하던 윤휴와 같은 '남인'을 숙청하고, 같은 당파에서도 '대동법'의 개혁정치에 반대하며 '산당'을 만들었으며, '주자'의 '성리학'에 관한 다양한 해석과 탕평정치를 주장한 젊은 '소론'에 반대하는 '노론'을 형성한다. 그렇게 조선의 '송자'가 된 우암 송시열의 일생을 종합하면 그 자체로 지배계급의 철저한 대변자이자 화신으로서 역시 '서인-산당-노론'의 계보는 이후 '친일-친미-친독점-친독재 거대양당'의 모습으로 현재까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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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는 '백성과 친한데 있으며(在親民)'라고 ([대학(大學)]을) 원래 [예기(禮記)]대로 환원... '주자학자(서인)'들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백성을 '교화의 대상(在新民)'으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윤휴는 ([대학]) 독서기에서 백성을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 이외의 천하(在親民)'라고 여겼다. 자신과 백성 사이에 계급적 차별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 관점으로 천하사해의 모든 백성을 한 가정처럼 여긴다는 '사해동포주의'의 발상이 '친민(親民)'에 담겨있었다. 주자학자들이 백성을 '교화의 대상'으로 떨어뜨려놓은 이유는 지배대상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윤휴는 그런 계급적 차별을 거부했다."
- [윤휴 -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2장. 주자를 거부하고 진리를 탐구하다>, 이덕일, 2021.
백호 윤휴는 17세기 조선 중후기의 '천재' 유학자였다. 그에게는 따로 스승이 없었다. 오래전 공자와 맹자, 자사와 주자 모두가 그의 스승이었고 윤휴는 독학으로 선학들의 글의 해석하고 주석했다. 일찍이 20대에 그 학문이 퍼져 열살 많은 송시열조차 그를 찾아 그의 학문을 칭송하며 교류하고자 했는데, 윤휴가 36세이고 송시열이 46세에 [중용]에 관한 '주자'와 다른 주석과 해석을 단 윤휴를 비판한 송시열과 오랜 정적이 되고 만다. 이후 '북벌'을 국내정치용으로만 이용하던 송시열의 서인은 청나라 오삼계의 '삼번의 난'이라는 대외정세에 맞춰 실질적 '북벌'을 추진하려던 윤휴의 남인 일당을 대거 숙청하고 강경파 청남이었던 윤휴는 물론 기회주의적 탁남 영수 허적까지도 모조리 죽여버리고 만다.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화' 때도 물론 조광조 등의 청렴한 개혁선비들이 사사되었으나 이후 당쟁 과정에서 꼭 그리까지 '성리학자' 선비유학자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서인 정철의 처단 여부를 두고 동인이 북인 강경파와 남인 온건파로 나뉘었고 숙종에 의해 미운털 박힌 송시열의 처단 여부를 두고 남인들이 강경파 '청남'과 온건파 '탁남'으로 나뉘기는 했지만, 이미 숙종의 '경신환국'에 이르면 반대파는 무조건 죽어야만 했다. 윤휴는 사약을 마시기 전 유서를 쓰기위한 필묵 요청도 거부되었는데,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는 송시열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던 '청남'의 영수인 윤휴의 눈에 송시열은 '유학자'로 보이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대 정계의 거물 송시열 따위 가벼이 여기며 '주자'와 어깨를 겨루던 도학자의 기개가 보인다.
그렇게 '천재' 유학자 윤휴는 서인들에 의해 죽어야만 했고 이후 조선 후기 '성리학'의 교조주의 세상에서 철저한 '금기어(禁忌語)'가 되었다. 삼봉 정도전, 대동계의 '반란자' 정여립은 물론 홍길동전의 허균까지 조선왕조 내내 '만고 역적들'이 있었으나, 백호 윤휴만큼 '금기(禁忌)'된 유학자는 없었다는 것이 재야 역사학자 이덕일의 관점이다. '만고의 역적'들 모두가 조선에서 신원되지 못한 이유는 체제를 개혁하고자 했던 그들의 '자유' 사상 때문이었다. 왕권을 견제하는 사대부 집단지도체제로 '민본주의'를 실현하려던 정도전, '자유 사상가' 정여립과 허균도 왕조의 '위험인물'이었으나 윤휴가 더 '위험'했던 이유는 그의 '신분철폐' 사상에 있었던 것이다.
백호 윤휴(1617~1680) / 우암 송시열(1607~1689)
20대에 독학으로 이름을 날렸고 본인의 이름도 '윤정(윤갱:尹鍞)'에서 '윤휴(尹鑴:큰 종)'로 스스로 개명했으며 60대까지 초야에 머무르며 '성리학'의 자유롭고 다양한 해석을 하고 주석을 달던 윤휴는 신분제 아래서 핍박받던 다수 민중의 삶도 내면에 체화했던 듯 하다. 합리적이지도 공정하지 못한 제도가 되어버린 과거시험도 거부하고 숙종의 여러 차례 관직 제수도 계속 거절하던 그가 60대에 이르러 대사헌으로서 출사를 결심한 이유는 실질적 '북벌'이었다. 말로만 '북벌'을 외치던 서인들에게 모든 권력을 주고서라도 북벌을 추진하려던 효종이 송시열과의 '기해독대' 북벌담판 후 얼마 안되어 의문사하고 현종이 즉위 후 14년이 된 1673년은 옛 명나라 말기 명장이자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을 자금성에서 한달만에 몰아내고 남명 복위정권도 정벌하며 청나라 개국의 절대공신이 된 대장군 오삼계가 '삼번의 난'을 이르켜 남쪽의 명나라와 북쪽의 청나라로 대치하던 시기였다. 명나라 망국의 신하 정성공과 정경 부자 또한 대만에서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으니 어린 나이에 제위를 계승한 청나라 강희제는 반란군에 둘러싸인 형국이었다. 윤휴는 이런 대외정세 분석을 토대로 강남의 오삼계, 대만의 정성공 부자와 연합하여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그 와중에 조선의 영토를 넓히자는 것이었다. 윤휴의 '북벌론'은 서인들의 말뿐인 '북벌' 당론과도 달랐다. 서인들의 '북벌'은 본인들이 유일하게 섬기던 '황제의 나라' 명나라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던 반면, 윤휴의 '북벌'은 중국의 혼란을 이용하여 조선의 입지를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고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북방으로 진출했던 정세 또한 5호16국의 혼란한 대외정세였다. 윤휴의 실질적 '북벌론'이 실제 정책으로 등장하자 말로만 '북벌'을 외치던 서인들의 허위적 실체가 드러났다. 이제 민중을 돌보는 것도, 국가를 위해 북벌을 추진하기도 거부하며 국내 지배계급의 이익만을 지키려던 서인들에게 윤휴와 그의 당파 일체는 사라져야만 하는 최대 정적이었다.
일찍이 윤휴는 [대학] 독서를 통해 '3강령(大學之道)'인 '재명명덕(在明明德)-재친민(在親民)-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대학(大學)], <경문 1-1>) 중 '친민'을 '신민(新民)'으로 바꿔부른 '정주학('정이/정호 형제와 '주자')의 전통을 부정하고 다시 '친민'으로 돌아갔다. 즉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신민'은 민중을 '교화와 지배의 대상'으로 본 반면, '자신 이외의 천하'로서 민중을 대하는 자세가 바로 '친민'의 본래 의미라는 주석인 것이다. 윤휴의 '성리학'에는 이미 '신분차별'의 예법은 없다. 그는 여성에게도 학문을 권장했으니 '남녀차별'도 없다. 전쟁을 맞아 국토와 민중을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고 다수 민중의 전란의 고통도 외면했던 조선왕조의 계급사회 위기를 신분제 강화의 '예법'에서 다시 찾으려던 서인들에게 그렇게 윤휴는 죽어야만 했다.
"윤휴가 출사한 이유는 흉중의 포부를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윤휴가 보기에 조선은... '소변통(小變通)'이 아니라 '혁명'에 가까운 '대변통(大變通)'이 필요한 나라였다. 주희의 경전해석만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상계도 변해야 하고, 말로만 북벌을 외치는 사대부들의 이중적 처신도 변해야 했다. 권리만 누리고 의무는 방기하는 사대부들의 계급 이기주의도 버려야 했다. 능력이 아니라 신분을 따지는 신분제도 바뀌어야 했다. 이렇게 국가기운을 일신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북벌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윤휴의 야심찬 계획은 매번 저지되고 있었다."
- [윤휴 -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6장. 말뿐인 북벌을 넘어 행동하는 북벌로>, 이덕일, 2021.
숙종 때 실질적 '북벌'을 위해 출사한 윤휴는 북벌을 위해 민중들의 경제적 안정을 꾀하는 제도를 제안한다. 기존의 신분제적 주민등록제인 '호패법'을 모든 사람이 차별없이 증명하는 '지패법'으로 바꾸고, 양반이나 농민이나 구분없이 묶는 '오가통법'으로 양인도 해당 단위의 대표가 될 수 있도록 하며, 양반은 제외하면서 농민에게 죽은자와 갓난아기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던 '호포법'을 개혁하면서 양반 사대부를 포함한 모두에게 징수를 하는 '구산법'까지 개혁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물론 이들의 눈치를 보며 정치적 '타협'이나 '조정'에만 힘쓰던 남인(탁남) 영수 허적의 반대로 누더기 개혁안으로 실시되면서 오히려 민중들의 반발을 사는 처지가 되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무과 시험의 기회를 주고자 했던 '만인과'로 무과 급제자가 늘었으나 '북벌' 의지가 없던 숙종과 서인, 탁남은 무과 급제자를 임용하지 않아 군대의 사기는 더 떨어지고 만다.
"일터에서 죽지 말자"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상식 조차 기업과 지배계급의 이익과 타협하여 누더기 걸레 정책으로 만들어버리는 지금의 거대 기득권 양당정치의 모습 그대로다. 중간에서 '현실'적으로 '조정'하고 '타협'한답시고 애를 쓰던 기회주의자 탁남 영의정 허적도 윤휴와 같이 '경신환국'의 제물이 될 줄 허적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지배계급 독점과 복수의 정치에는 '현실적 조정자'도 설 자리는 없다. 허적의 죽음은 개혁과 변화에서 '현실'보다 '원칙'이 더 중요한 이유를 역사적으로 증명한다.
어찌보면,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원칙'을 버린 '현실주의자'들일지도 모른다. '국민의힘'은 원래 그런 자들이라 쳐도 지금의 개혁을 가로막는 자들이 한때 '민주주의자'였던 민주당 '586'이듯이 말이다.
"윤휴는 졸지에 갑산으로 유배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실제로 북벌을 단행하려 하고, 양반에게 군포를 받으려고 하고, 백성들의 이중, 삼중의 군포를 탕감하려 했던 윤휴는 조선에서 목숨을 부지해서는 안되었다. 신분제를 흔들려고 했던 윤휴의 숨이 붙어 있어서는 안되었다... 이른바 '경신환국(1680년/숙종6년)'으로 정권은 다시 '서인'이 차지했다... 서인들은 '역모'로 몰릴 논리와 실제 행동까지 있었지만 남인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서인들은 '정치공작'을 자행했다."
- [윤휴 -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9장. 금기어가 되어버린 이름>, 이덕일, 2021.
애초 고려왕조에 대한 '반역'으로 개국한 조선은 왕조 내내 '반역'과 쿠데타가 끊이지 않았다. 태종이나 세조는 왕자 본인이 사대부 집단지도체제를 깨부순 초기 사례였고 중종반정은 연산군으로부터 버림받을 운명에 처한 훈구파 사대부들이, 인조반정은 명나라만을 임금으로 섬기던 교조적 '성리학자' 서인들이 주도한 쿠데타였다.
이후 효종과 현종은 아마도 당쟁의 희생양이 된 듯 하며 숙종은 왕의 주도로 당파를 갈아치우는 '환국'으로 남인과 서인의 정권교체를 보여준다. 서인들은 끊임없이 왕족 후보들을 줄세우며 '반정(反正)'을 기획했는데, 1680년 '경신환국'으로 윤휴를 포함한 남인들을 숙청할 때도 '역모'의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백호 윤휴가 '반역자'였다면 교조화된 '주자'의 '성리학'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과 주석을 토대로 신분제를 철폐하거나 완화하고자 함이었다. 이는 서인들로 대변되던 당대 양반 지배계급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으나 '현실' 관료정치의 '타협' 앞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 그의 누더기 '개혁안'은 이후 쓰잘데기 없는 왕조와 사대부 당파들 사이의 정쟁과 '환국' 과정에서 도루묵이 되었고, 대외적으로 오삼계의 죽음으로 '삼번의 난'을 진압한 청나라는 강대해졌으며, 민중수탈은 더욱 강화되면서 조선 후기 100년은 '삼정 문란'으로 촉발된 대대적 민중반란, 즉 다수 민중에 의한 진정한 '반역'의 시대를 필연적으로 예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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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윤휴의 조선 대개혁안이 '북벌'의 이데올로기를 위한 또 하나의 비현실적 이념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세상의 이치를 '주자' 못지 않게 잘 안다는 어찌보면 천재적 자만으로 '현실정치'를 무시한 처사가 그의 죽음을 초래했을 수도 있다. 송시열이 직접 주도하지는 않았으나 윤휴를 죽여야만 살 수 있었던 지배계급의 대변자 서인들로서는 신분제를 흔드는 세력은 그 누구든 제거해야 했을 것이다. 서인들의 세상에서 '금기어'가 된 그 이름 윤휴의 혐의가 당대 신분제 질서를 건드린 점이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그렇게 '주자'만을 알았던 '서인들의 세상' 조선은 당대 '금기어'가 된 유학자 백호 윤휴의 사후 100년 이상 더욱 더 푹 썩어가며 다수 민중들의 진정한 '반역'을 기다리게 된다.
역시, '계급투쟁'의 주체는 소수 지식인이 아니라 다수 민중이라는 진리를 조선역사 또한 생생히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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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휴 -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이덕일, <다산초당>, 2011~2021.
2.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석필>, 1997.
3. [사서(四書) - 이치를 담은 네 권의 책(대학/논어/맹자/중용)], 신창호 편역, <나무발전소>, 2018.
"131주년 세계 노동절을 기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