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잔혹한 교훈, '동화(童話)'
아름답고 잔혹한 교훈, '동화(童話)'
- 한스 안데르센, [눈의 여왕], 1845.
"오르간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성가대의 어린 아이들 목소리가 어찌나 황홀할 만치 달콤하면서도 구슬프게 어울리던지! 밝은 태양빛이 창문으로 스며들어와 카렌이 앉아 있는 자리를 따스하게 비춰주었다. 온몸으로 햇빛을 받은 카렌의 영혼이 햇살을 타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날아올랐다. 그곳에는 책망의 눈초리도, '빨간 구두'에 대한 말 한마디도 없었다."
- [빨간 구두](1837), 한스 안데르센, 정정호 외 옮김, <생각의나무>, 2007.
대부분의 결론이 비슷하다.
'빨간 구두'를 신고 방정맞게 춤만 추던 소녀(1837년)도, 현실의 왕자를 사랑하여 동족을 배신한 인어공주(1837년)도, 성냥이 안 팔려 추위에 떨던 소녀(1845년)도, 심지어 본인이 '미운 오리새끼'인 줄 알고 살았던 슬픈 백조(1843년)조차도, 하늘로 날아오르는 결말이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150여 편의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짓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 1805~1875)의 이야기들 말이다.
내 어릴 적에 열심히 읽었던 기억은 별로 없다. 주로 TV를 통해 어른들이 틀어주던 방송국 만화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고, 아마도 어릴적 <세계동화전집>에는 한 권짜리 안데르센 단편선으로 '인어공주', '성냥팔이소녀', '미운오리새끼' 등이 함께 담긴 책을 짧게 훑었을까. 주로 슬프지만 교훈적인 아름다운 이야기, '동화(童話)'의 전형이자 고전이었다.
그렇던 '동화'가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스무살이 넘어 '현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라 일축하고 현실을 열심히 살겠지만, 어린 시절 기억이 이후의 삶을 지배하는 한편 살아온 현실이 다분히 부조리하다 생각하던 나는 어른들이 훈계한답시고 지어낸 '동화'라는 게 다 '사기'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잔혹한 '현실'을 은폐한 채 착하게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된다는 '교훈'은 거짓말이었다.
한참 지나 나도 부모가 되었고, 어린 자녀들에게 '고전동화'를 많이 읽어주고 나도 같이 새롭게 읽었다. 이십대에 내가 생각하던 '동화'는 오래전 방송국 만화영화처럼 이 체제를 '지배'하는 '어른'들이 아름답게 각색한 거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19세기 덴마크의 동화작가 한스 안데르센의 '아이들을 위한 동화'는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성냥을 파는 소녀는 가난해서 구걸까지 해야했던 그의 어머니 이야기였고, 인어공주는 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음에도 그것을 이루지 못한 현실의 우리들이었으며, [눈의 여왕]은 구두 수선공 아버지가 일찍 죽고나자 안데르센의 인생 자체가 추운 겨울과 같았던 순간을 표현한 것이었단다. 초창기 작품인 [빨간 구두]에서 안데르센은 '빨간 구두'의 마법을 끊지 못하는 주인공 소녀 카렌의 두 발목까지 자르고 만다. 그만큼 현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잔혹하기 그지 없다. 결말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승천하면 뭐할 것인가. 안데르센 '동화' 속 주인공들의 현실은 '잔혹동화'의 원형이다.
"겔다의 뜨거운 눈물이 카이의 가슴에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카이의 가슴에 박혀 있던 거울 조각이 스르르 녹았어요... 정신을 차린 카이는 겔다를 알아보고 눈물을 흘렸어요. 그러자 카이의 눈에 있던 거울 조각도 녹아버렸어요...
'겔다의 착한 마음씨에는 눈의 마법도 듣지 않는구나. 잘 가라, 카이, 겔다.'
눈의 여왕은 오로라 저 편으로 쓸쓸하게 사라졌습니다."
- [눈의 여왕](1845), 안데르센, <교원애니메이션세계명작동화>, 2006.
안데르센의 작품활동 10년차였던 1845년 작 [눈의 여왕]은 작가의 고향인 북구의 혹독한 겨울에 어울리기도 하고 주인공인 겔다와 카이가 아닌 '눈의 여왕'이 승천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다소 남다른 결말이다.
악마의 거울이 승천하다가 산산히 깨지면서 현세의 인간들의 가슴과 눈에 거울 조각을 뿌리고 인간들이 그 영향으로 현실을 잔혹하게 만드는데, 장미를 함께 키우던 순수한 소년 카이는 그 거울 파편이 가슴과 눈에 박힌 채 저 북쪽의 '눈의 여왕'에게 끌려가나 역시 순수함 그 자체인 겔다의 희생과 사랑으로 카이를 구함은 물론 '눈의 여왕'을 승천까지 시킨다는 이야기다. 최근까지 우리집 셋째를 비롯한 전세계 영유아들을 열광케 한 [겨울왕국]의 모티브가 바로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이다. 현대의 겔다인 안나는 사랑의 눈물로 혹독한 겨울을 끝장내고, '눈의 여왕' 엘사는 승천하는 대신 현세의 '왕국'을 하느님의 왕국으로 통치한다.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역시 잔혹한 현실은 은폐하거나 각색한다. 우연치도 않게 [겨울왕국]이 첫 개봉했던 2014년은 독재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박근혜 정권 시기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노동개악을 밀어붙이던 우리나라의 '겨울왕국'이었다. '겨울'은 언젠가 끝난다지만 그 시기의 한겨울은 잔혹했고 혹독하게 추웠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했던 안데르센 동화는 그의 초기작에 드는 [빨간 구두]였다. 욕망에 너무 매달리거나 중독되지 말라는 '교훈'을 담은 '동화'지만 결코 아름답거나 순수하게 각색하지 않고 갈 때까지 이야기를 밀어붙이다가 불쌍한 소녀의 발모가지를 잘라버리는 그 '잔혹함'의 극치는 오히려 피튀기는 현실을 '사실주의'적으로 담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눈의 여왕] 또한 북구의 극한 추위를 배경으로 '동화'로서의 아름답고 순수한 결말 뿐만 아니라 혹독하고 잔혹하기까지 한 현실을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
나에게 '동화(童話)'는,
현실에 기반한 아름답지만 잔혹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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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눈의 여왕(The Snow Queen)],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1845.
2. [빨간 구두(The Red Shoes)](1837), 안데르센, 정정호 외 옮김, <생각의나무>,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