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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Sep 02. 2022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 - 황윤

내가 찾은 견훤(甄萱)은.

내가 찾은 견훤(甄萱)은.

-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 황윤, <책읽는고양이>, 2022.





"892년, 나라에 도둑 무리가 벌떼처럼 일어나고 백성들은 정처없이 흩어지자, 이때를 기회로 삼아 '견훤(甄萱)'은 자신을 따르는 동료를 모아 서남 해안에서 당당히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러자 불과 한 달 만에 5,000명의 무리가 그에게 모여든다. 견훤은 무주(武州), 즉 현재의 광주를 함락시키고... 앞으로 백제 영역을 완전히 장악하여 백제 왕에 오르겠다는 야심을 보이고 있을 때, 견훤의 나이 불과 스물다섯이었다."

-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 <후백제 왕이 된 견훤>, 황윤, 2022.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삼봉 정도전을 꼽는다. 우리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 전체 역사를 통틀어 성리학의 [대학]이 말한 '3강령 8조목'을 '혁명'을 통해 현실화시킨 인물로 나는 생각한다. 물론 유방의 한나라를 전한과 후한으로 나눈 '신'나라의 왕망도 유교 이상국가를 지향하다 단명했다지만 당시의 유학은 후대의 성리학만큼 정교한 이론이었다고 볼 수 없다. 주희 이래 성리학은 전 우주를 통찰하려는 세계관이었고, 그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여 새왕조를 개창한 유일한 인물이 내 생각에는 정도전이었다. 술에 취한 정도전은 말했단다.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쓴 것이라고. 이성계의 주먹이 없었더라면 정도전의 머리가 없었듯, 정도전의 머리가 없었다면 이성계의 주먹은 고려의 주먹으로 썩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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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빈어로서 그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혹은 이르기를, (궁예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때 옥상에서 하얀 빛깔이 마치 긴 무지개처럼 하늘 위로 뻗치니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중오일(단오)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齒)가 있으며, 또 불꽃이 이상하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므로 기르지 마십시오.' 하여 왕은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그 집에 가서 죽이라고 하였다. 사자가 강보 속에서 들어내어 다락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가 몰래 받다가 잘못 손으로 찔러서 한쪽 눈을 멀게 하였다.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수고하며 양육하였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자 유희를 그치지 않으니 그 유모가 말하기를, '네가 태어나서 나라의 버림을 받았으나 나는 차마 못하여 몰래 기르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너의 미친 행동이 이러하니 반드시 남이 알게 될 것이며, 너와 나는 함께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하느냐.' 하였다. 궁예는 울며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나는 떠나서 어머니의 근심을 없게 하겠습니다.' 하며 세달사로 갔는데 지금의 흥교사가 이곳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불렀다."

- [삼국사기], <열전 권10 - 궁예전>, 김부식, 1145.



그 다음으로 주목하는 인물을 톺아보라면 그 수많은 영웅들 중 후고구려의 궁예를 뽑겠다. 어린 시절의 궁핍을 딛고 본인의 이념과 실천으로 일가를 이룬 입지전적 인물의 전형이라고 나는 본다. 사료에는 신라왕족이라 적고 있으나 아버지가 무슨왕인지도 정확하지 않고 이를 뒷받침할 근거도 [삼국사기] <열전 10권> 말고는 빈약하다. 정도전 또한 서얼의 한계로 사회적 승진의 한계를 안고 있었으나 고려말 난세에 급진적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로 출사했고, 궁예는 이보다 5백년 전 '선종'이라는 세달사 탁발승에서 난세에 무장호족이 된다. 내가 중국사에서 서민황제인 한고조 유방과 궁예처럼 탁발승에 거의 극빈민에 가깝던 거지황제 명태조 주원장에 주목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난세의 시대적 배경도 있었지만 절대적으로 본인의 실력만으로 천하를 호령했던 자들이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결과의 성패를 떠나서 말이다. 물론 출신이 비슷하더라도 당말 난세의 배신의 아이콘이자 양아치황제였던 후량의 주전충 같은 자는 얘기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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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역사학자이자 '나 혼자 여행' 시리즈의 작가 황윤 선생이 2022년 3월에 낸 여행기는 [나 혼자 전주 여행]이다. 전주 하니 일단 조선왕조를 개창하여 정도전을 비롯한 고려말 급진적 성리학자를 처단한 후 왕가를 확고히 한 이씨 본향의 이야기만 나올 줄 알았건만, 생각치 못했던 '견훤(甄萱)'이 등장한다. 후백제를 건국한 바로 그 견훤이다. 저자는 이성계와 견훤을 '도플갱어'로 삼아 전주 기행문을 이어가고 있다. 이 책은 신라말기 후삼국시대 군웅할거의 난세 속에서 궁예 및 왕건과 마지막까지 천하를 다투다가 고려태조 왕건에게 항복하여 자기가 세운 후백제를 본인의 손으로 멸망시킨 견훤의 최후와 함께 논산에서 이야기를 마치는데, 단순히 '전주'라는 오래된 도시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시기 '9주 5소경' 중 하나였던 '전주'와 남원(남원경) 및 백제와 후백제 공히 멸망의 고장 논산까지 아우르는 후백제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현재까지도 전주를 지배하는 이성계와 오래전 잊혀졌지만 백제땅을 다시 지배했던 견훤의 시차적 약전(略傳)이기도 하다. 저자가 추적한 바에 의하면 견훤은 신라시대 '이씨'였고 그의 아버지였던 상주의 아자개의 본명도 '이원선'이었는데 신라의 서남쪽 해안에서 왜적을 막는 군인이었다가 장수가 된 후 백제땅에서 일가를 이룬 견훤은 본래의 '이씨' 성을 버리고 백제의 귀족성인 '견씨'를 택한다. 즉, '견훤'은 본래 '이씨'의 후예라는 추정으로 이성계의 조상일 수도 있음을 은연 중에 암시하고 있다.




"마침 이 당시 견훤은 전유와 비슷하게 892년부터 신라 서쪽을 통치하는 공(公)의 지위에 스스로 올라 있었으며, 900년부터 935년까지는 옛 백제 지역에서 후백제 왕으로 활동했다. 즉, 오월 왕 전유와 시기가 거의 겹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월과 후백제는 900년 전후부터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적극적으로 교류를 이어갔다... 이에 최승우는 고민 끝에 오월과 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후백제를 자신의 정착지로 선택한다."

-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 <신라 3최(崔) 중 최승우>, 황윤, 2022.



이성계에게 삼봉 정도전이 있었다면, 견훤에게는 최승우가 있었다. '신라 3최(崔)'로 불리는 최치원, 최언위와 최승우는 모두 당나라 빈공과에 합격한 신라의 수재들인데 6두품의 한계로 진골이나 성골의 벽을 넘지 못했다. 신라 말기는 골품제로 대표되는 중앙집권적 귀족제의 모순이 심화되어 새로운 체제의 대두를 요청하고 있었다. 견훤의 부친인 상주(지금의 경북 문경)의 호족 아자개(이원선)도 진골이나 성골이 아니면서 1두품 각간을 자칭하던 시대였으나 신라 최고 천재 최치원은 끝까지 신라에 충성했고 그의 사촌 최언위는 고려태조 왕건에 귀부하여 이름을 날렸다. 기록에는 없으나 이들의 친척뻘로 추정되는 또 다른 수재 최승우는 후백제의 견훤을 통해 새세상을 기획한다. 당시는 중국 대륙 역시 당나라 말기 군웅할거 시대였기에 중국의 동부 오월땅에는 전유라는 자가 '오월왕'을 자칭하였는데 최승우는 당나라 시절 한때 오월왕 영향권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로 귀국한 최승우는 최치원이나 최언위와 다른 길인 후백제왕 견훤을 선택한다. 이후 결말은 달랐지만 최승우와 최언위는 각각 견훤과 왕건의 서신을 통해 경쟁을 했고 알다시피 패자는 견훤을 선택한 최승우였다.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지만 아마도 신라말 군웅할거 정세의 당시는 견훤이 더 유력자로 보였을 수도 있다. 궁예가 초기에 의탁했던 죽주(죽산)의 기훤이나 북원(원주)의 양길, 후에 명주(강릉)에서 독립한 궁예보다도 먼저 스물다섯살에 이미 무주(광주)를 점령하고 8년 후인 900년 서른셋에 전주(완산주)를 장악하여 후삼국 최초로 왕을 자칭한 영웅이 바로 견훤이었다. 기훤이나 양길의 수하였다가 이들 모두를 평정한 '일목(一目)대왕' 궁예가 부랴부랴 후고구려왕을 자칭한 게 901년이니 이보다 한해 먼저 후백제왕이 된 견훤은 신라말 군웅할거 시대를 정리하고 이른바 '후삼국시대'를 연 장본인이었다. 물론 북쪽에서 급격히 팽창하던 궁예를 의식하여 선수를 쳤을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당시는 견훤이 최고의 실력자였을 수도 있고 신라 천재 최승우가 귀부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정도전도 최승우도 난세에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 했다. 정도전도 장자방을 존숭했듯 자신을 한고조의 책사 장자방에 견주었던 제갈량의 주군 유비도 역사에서 승자는 아니었다. '후삼국시대'는 궁예와 견훤이 각각 고구려(고려)와 백제를 동경하여 부흥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이미 이들 나라가 멸망한지 2백년 이상 지났으니 망국의 복위운동이었다기 보다는 각자의 할거 지역 정서에 따라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앞세운 것이리라. 종교적 이념은 불교의 미륵불사상, 정치적 이념은 각지의 정서를 반영하여 각각 고구려(궁예-왕건)와 백제(견훤)를 슬로건으로 내건 것이다. 당시는 당말의 중국대륙과 신라말의 한반도를 통틀어 동아시아 전체가 군웅할거의 난세였다. 이들로부터 5백년 전 광개토대왕이 대륙으로 뻗어나간 5호 16국 시대처럼 궁예와 견훤 또한 대륙의 난세 속에서 천하제패를 꿈꿀 수 있었다. 9세기말 10세기초의 한반도에서 그 첫 출발은 견훤이었고 최승우라는 신라 천재가 주군으로 선택할 만한 영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역사의 승자는 견훤과 궁예가 넘어서지 못했던 삼국과 통일신라의 고대 중앙집권 귀족체제를 끝장내고 새로운 지방 호족연합권력을 정립했던 왕건의 포용력이었다. 왕건은 궁예를 몰아냈지만 궁예가 기틀을 다진 국가체제를 부정하지 않았고 아들의 쿠데타로 인해 자신이 세운 국가를 버리고 귀의한 견훤을 내치지 않았다. 물론 궁예의 후고구려의 최대 기반이 송악(개성)의 왕건 호족집안이었고 고려의 마지막 최강숙적 후백제의 사기를 꺾을 자가 견훤 밖에 없었다는 배경은 있었겠지만 지방호족 연합정권 시대의 창시자 왕건의 내공이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니다. 신라말과 고려초(나말여초)는 신라의 삼한일통의 왕조통합과 다르게 고대 중앙집권 귀족체제에서 중세 지방호족 연합체제로 이행하는 체제의 시대적 교체기였던 것이다.




"이처럼 견훤은 자신이 세운 후백제가 멸망하는 모습을 확인한 직후 등창이 터져 이곳(황산) 사찰(논산 개태사로 추정)에서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으며, 왕건만 병력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전주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고려군이 최종승리를 만끽하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견훤은 세상을 뜬 상황이었다."

-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 <개태사와 왕건>, 황윤, 2022.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두 차례 '왕자의 난'으로 왕권을 찬탈한 쿠데타 후 '함흥차사'의 소문으로 남은 시기에 사실 이성계는 의정부(양주) 회암사에 머물며 함흥의 수하 조사의로 하여금 1만의 동북면 군대를 모아 반란을 사주했다. 당시는 1만의 조사의(이성계) 반란군과 5만의 조선군 사이 내전의 상황이었는데 이방원의 빠른 대처와 총력대응으로 인해 반란은 진압되었고 역사는 '이성계의 난'이 아닌 '조사의의 난'으로 기록한다. 이후 아버지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을 조선의 왕으로 인정했고 성리학 이념국가 조선에서 태종 이방원은 다행히 불효의 죄를 면할수 있었다.



견훤의 맏아들 신검이 아버지를 폐위시켜 금산사에 가두었고 나이가 들어 무력이 아닌 술책으로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이 왕건에게 항복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일흔을 바라보고 있었다. 논산에서 대치한 신검의 후백제 정예군은 고려군의 선봉에 선 후백제 건국자 견훤을 보고 창칼을 내려 놓았다. 쉽게 후백제군의 주력을 무너뜨린 왕건은 내처 후백제의 근거지인 완산주(전주)로 내달렸고 견훤은 병에 걸려 논산에 주저앉는다. 괘씸한 아들에게 복수하고 싶었겠지만 차마 자신이 만든 국가의 멸망을 직접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왕건이 후백제를 복속하고 돌아왔을 때 일흔의 견훤은 이미 자신의 나라 후백제와 함께 죽은 후였다.


똑같이 칠십대까지 살았지만 이성계는 아들에 대한 복수는 실패했으되 자신이 만든 국가 조선은 보존하면서 장수한 반면, 5백년 전 그의 '도플갱어' 견훤은 아들에게 복수는 했으나 자신이 세운 국가 후백제와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의 저자 황윤 선생은 명시적으로 말할 수 없다. 사료적 근거가 없이 역사학자는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이씨'였고 전주를 장악하며 후백제를 열었던 견훤이 그로부터 한 5백년 지난 후 '도플갱어' 이성계를 만나게 한 이유는 아마도 견훤이 이성계 일족의 먼 조상이라 암시하는 것은 아닐는지.


궁예나 견훤은 정도전이나 이성계와 달리 초상화가 남아있지 않아 얼굴이나 풍모를 상상할 수 밖에 없다. 한편, 고려 무신반란 초기 주동자 중 하나였던 이의방은 조선태조 일족의 조상이라는데 오래전 대하사극의 각각 다른 극 중에서 이의방과 견훤을 맡은 배우가 동일했던 것 또한 참으로 우연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역사학자가 아니라 소설이나 쓰고 싶은 나는 감히 추측한다.

소장 역사학자의 이 책을 통해 내가 찾은 견훤(甄萱)은 이성계 일족의 '할아버지'라고 말이다.


***


1.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 황윤, <책읽는고양이>, 2022.

2. [슬픈 궁예], 이재범, <푸른역사>, 2000.

3. [삼국사기](1145),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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