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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Sep 08. 2022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 세키코세이 외

홀로 극장엘 갔다

홀로 극장엘 갔다

-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세키코세이 외, 1892~1927.





"나는 그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의 수치심을 크게 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웅지가 세상을 덮고 하늘에 닿을 호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구의 몸으로 지하에 누워 있게 된 것은 수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수군이 패한 수치는 다름 아닌 조선의 한 사내 '이순신' 때문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거늘, 어찌 오늘은 물론 옛일을 돌이켜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의연히 분발하지 않을 수 있으랴."

-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조선 이순신전>, 세키코세이, 1892.




1.


혼자 영화를 보았다.

폐암 말기 아버지의 호스피스병원을 누나들과 함께 알아보고 오랫만에 삼남매가 모였으니 서울 도심 구경도 하고 영화도 한 편 볼까했지만 비오는 종로의 횟집에서 낮술만 좀 마셨고 영화는 시간표가 맞지 않았다.


딱히 보고싶은 영화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누이들을 버스 태워 보내고 전철로 수유역에 내린 나는 집으로 걸어가다가 부러 극장 앞을 지났고 내처 들어가 영화시간표를 보았다.


사실 보고싶은 영화가 있었던 것도 같았다.

[한산 - 용의 출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이야기를 같이 보러 가자고 며칠전 아내를 잠시 꼬셔보았지만 아내는 귀찮다며 결국 영화관에 가지 못했다. 처와 함께 극장을 가본 일이 까마득하다. 그렇다고 누나들하고 꼭 [한산]을 보겠다는 건 아니었고 시간 맞는 영화 한 편 보고 싶은 정도였다.


그렇다.

나는 영화가 보고 싶은 게 아니고 극장에 가보고 싶었던 거다. 그러다가 떠오른 게 [한산]이었던 거다. 나 사는 방식이 늘 이렇다. 뭐 하나 절실한 게 없다. 그냥 절실하더라도 아닌 척, 준비했더라도 안한 척. 그렇다 보니 삶에 딱 절실하게 하고 싶은 게 없다. 그러다 보니 삶의 통증도 무디어져 가는 느낌이다.


결국 비오던 목요일 오후 처음으로,

홀로 극장엘 갔다.

나는 영화 [한산]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고 극장에 가고 싶었던 걸로 정리했다.



그리고 우연히 이순신 장군을 만났다.



2.


"견내량 전투에서 좁은 해협 입구를 피해 넓은 바다로 나간 다음 재빨리 함대의 진법을 바꾸어 일제 공격을 퍼부은 점과 야간에 척후선을 파송하여 우리 수군의 동정을 정찰한 일 같은 경우는 실로 현대 함대 전쟁의 상규와도 은연중 부합한다. 그 지략의 탁월함과 용의주밀함은 우리 장수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런즉 두 나라 군대의 승패가 어찌 이유가 없다 하겠는가. 나의 말이 얼토당토 않다면 모르되 만일 불행히도 맞다면 나중에 해군에 종사하려는 사람은 잘 새겨두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조선 이순신전>, 세키코세이, 1892.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이순신전]을 쓰신 게 1908년이라고 한다. 경술국치 한일합방을 목전에 둔 풍전등화의 조선에서 단재 선생께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신라 태종무열왕, 그리고 조선의 이순신 장군을 소환하고자 했다. 고대 동북아시아 대륙의 제패자 광개토대왕과 삼한일통 후 당나라 외세를 몰아낸 김춘추, 임진년과 정유년 일본이 촉발한 동북아 대전쟁이 낳은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이다. 아마도 단재 선생의 [이순신전]이 우리나라 최초의 이순신 장군 전기 아니었을까 싶고, 우리 어릴적 읽었을 이순신 장군 위인전의 모본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사실 최초의 [이순신전]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먼저 나왔단다.


필명 '세키코세이'라는 일본인은 19세기말에 [조선 수군통제사 이순신전]을 집필하여 친구인 시바야마 나오노리에게 보냈고, 일제 외무성 관리로 조선에서 근무하던 시바야마가 이를 1892년에 소책자로 발간한다. 필명 '세키코세이'는 1891년까지 조선에 근무하다가 상해 총영사를 지낸 일본 외무성 관리 오다기리 마스노스케라는 추측이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아마도 이 소책자의 '감수자'로 되어있는 시바야마 나오노리가 실제 저자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1908년 단재 선생의 [이순신전]은 조선을 구하는 영웅을 소환하기 위해 집필된 반면, 1892년 일본인의 [조선 이순신전]은 일본의 치욕을 곱씹으며 앞으로 같은 패배가 반복되지 않도록 뼈에 새기기 위함이었다.


집필의 목적이 확연하게 다름에도 결과는 같다. 16세기말에 위기의 조선을 구했던 단 한 사람은 바로 '이.순.신' 장군 그 한 분이었다는 사실의 확인과 재확인이다. 아마도 노론 벽파와 이완용 같은 전주 이씨 왕족 일부까지 야합하여 바야흐로 조선을 일제에 팔아먹으려 하던 19세기말 그 당시의 조선에서는 덕수 이씨 순신 장군을 영웅으로까지 평가하지 않았던가 보다. 일본 또한 영웅 이순신이 아닌 3백년전 일본의 패배를 복기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이순신 장군을 성웅으로 묘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세키코세이'의 [조선 이순신전]은 한산대첩과 명량대첩, 그리고 장군의 마지막 노량대첩을 중심으로 원균의 패착과 일본 수군대장들의 무력함, 패전 원인의 분석과 그래도 결국 조선을 구한 단 한 사람은 이순신이라는 결론으로 한편 조선의 무능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후 메이지 시대 해군 교관 오가사와라 나와나리가 1902년에, 해군대장 사토 데쓰타로가 1927년에 이순신에 관한 비슷한 짧은 글을 발표했고 이렇게 세 글들을 하나로 묶은 게 국역본으로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가갸날>, 2019.)라는 책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순신 이야기, 나폴레옹을 막은 영국의 해군제독 넬슨이 있다면 조선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막은 성웅 이순신이 있다는 이야기, 변방에서 여진족을 막던 이순신을 수군통제사로 추천한 유성룡과의 인연, 원균과 이순신의 악연 등등이 19세기말 다른 사람도 아닌 일본인에 의해 정리되고 평가되었다. 물론 유성룡의 [징비록]이나 이순신 장군 본인의 [난중일기]에 나오는 이야기일 수는 있겠으나 대중서로 본격 집필된 게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좀 씁쓸하기는 하다. 그래도 얼마 안 지나 위대한 조선인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나서주심에 깊이 감사하다.


어쨌거나 일본인에게든 조선인에게든 '이순신'은 조선을 홀로 구한 영웅임에 틀림없다.



3.


"후세의 누군가 이순신을 위해 붓을 쥐게 된다면 조선의 운명은 이순신 덕분에 회복될 수 있었고, 이순신의 용기와 지략은 유성룡 덕분에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음을 기록해야 할 것이다."

-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조선 이순신전>, 세키코세이, 1892.




비오는 목요일,

홀로 극장엘 갔다.

그리고 성웅 이순신 장군을 우연인 듯 만났다.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 영화 3부작을 기획하고 있단다.

1부 [명량]은 가장 극적인 승리를 이룬 '상유12척'의 명량대첩을 그렸고, 이를 기점으로 2부 [한산]은 이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임진전쟁 최대 승전인 한산대첩과 거북선의 출현을, 예정된 3부 [노량]은 명나라 제독 등자룡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가 전사한 이순신의 최후 노량대첩을 그릴 예정이라고 한다.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을 두려워하던 일본 수군대장 와카자키가 이전의 한산대첩에서 조선수군을 깔보던 바로  장수다. '세키코세이'  일본 이데올로그들이 조선 영웅 이순신전을 지은 관점이 바로 일본 수군제독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시각이다.


해저괴물 '복카이센'으로 묘사된 조선의 최첨단 전선 거북선과 함께 역사에 등장한 '해룡(海龍)' 성웅 이순신 장군을 추억한다.


***


1.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1892~1927), 사토 데쓰타로/세키코세이/오가사와라 나가나리, 김혜경 옮김, <가갸날>, 2019.

2. [이순신전], 신채호, <대한매일신보>,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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