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꼰대성'의 '위험한(toxic)' 기원
지금 '꼰대성'의 '위험한(toxic)' 기원
- [남성성의 역사], 루성옌, 2021.
"'남성성(masculinities)'이란 남성이라면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사회가 기대하는 행위다."
- [남성성의 역사], <프롤로그>, 루성옌, 2021.
1.
반백의 중년이 된 지금 돌아보면 믿을 수 없지만,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 '여자'가 되고 싶었다.
남자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뭔가 있어 보이려고 친구들끼리 떼지어 뭉쳐다니기 일쑤였지만, 사실 1980년대의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의 정겨운 골목마다 마주치는 동네형들이 '뒤져서 나오면 십원에 열 대'라고 내 귀에 속삭이는 말에도 이미 신물이 났고, 남자학교에서 욱해서 어쩌다 싸움이라도 할라치면 안구액션과 구강액션은 현란해도 속으로는 얻어터지고 창피나 당할까봐 피하는 내가 싫었다.
세지도 않으면서 괜히 '강한 남자'로 보이려고 하는 짓거리들이 좀 피곤했다. 그 때 생각에 만약 내가 여자였다면 이러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남자고등학교라면 어디든 있었을 '미친년'이라는 별명의 진상들을 보면 걔들은 진심으로 자기가 여자인 줄 아는지 일거수일투족이 일관되게 역겨웠으므로 그 생김새라도 안그러면 안되겠느냐 붙잡고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싶었다. 원래 남자가 진짜 여자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1980년대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때는 차마 발설은 못했지만 졸업해서 스무살이 되면 여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현실적인 목표로 수정했다. 키도 작고 '곱상하게' 생겼다고 어린 시절 동네 어른들한테 들었다던 어머니의 구전을 진심으로 믿었고 내 자식은 내게만 예쁘다는 진실은 13년 후에 내가 직접 부모가 된 이후에야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고등학생 당시의 나는 스무살이 되면 원래 '곱상한' 외모를 바탕으로 미니 스커트에 삐딱구두를 꼭 알다리로 신고 돌아다니고 싶었다. 당시의 나는 화장만 진하게 하면 아무도 나를 남자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나는 스무살이 되었고 세상에 나온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어느날 그런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을 거울 앞에 세워놓고 셀프 따귀를 몇 대 때려주었다.
세상 누구보다도 '남성성'으로 중무장된 중년의 지금 다시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2.
대만의 역사학자 루성옌은 [남성성의 역사]를 통해 '위험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의 간략한 역사(brief history)를 이야기한다. 우리 말로 '위험'하다는 형용사는 원문 제목으로 '유독(有毒;toxic)'이다. 저자인 루성옌은 여성인데 그렇다고 페미니즘적인 내용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심리적 기반인 '위험한 남성성'이 여성은 물론 남성에게도 해롭다(有毒;toxic)는 결론이다.
약사(略史;brief history)이니 '남성성'이 어떻게 진화했나 보니,
고대 그리스에서는 항상 전쟁을 벌이던 도시국가체제였으니 정치에 참여하고 전쟁에 나가던 '시민' 남성의 강인함이 찬양되었지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같은 곳에서 이미 '혈기왕성'하고 본인만 잘난 아킬레우스나 헥토르 같은 남성은 전투만 잘했지 큰 그림을 보는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에 비해 비판받을 요소를 두루 남겨놓았다고 한다.
실제로 알렉산더 대왕은 여자를 아예 무시하고 피해다녔단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162
미국의 심리학자 줄리언 제인스는 그의 저서 [의식의 기원](1976)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아] 속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말을 직접 듣는다'고 진심 믿었다는데, 인류사의 단계로 치면 어린이 수준으로, 정신분석의 영역에서는 정신분열과 같이 우뇌가 더 발달된 직관적 시기였다고 본다.
한마디로 호메로스의 문헌 속 고대 그리스인들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 또는 미친놈 단계였다는 얘기다.
좀더 문명화된 로마에서도 '남성성'에 관한 의식은 그리스 시대와 같았지만 인류는 이전에 비해 이성적 좌뇌가 좀더 발달된 어른이 되었으니 신들의 직접적인 간섭은 어느 정도 멀어졌고 카이사르를 비롯한 남자 중의 남자들은 검투사 같이 온몸이 무기인 남자보다는 '비르투스;(virtus;덕성)'를 겸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단다.
북유럽의 바이킹들은 그들의 오딘 신화에 따라 남자라면 전투를 하다가 명예롭게 죽어 오딘을 섬기는 전투의 여신 발키리의 인도하에 '발홀'에 간다고 믿을만큼 남자 중의 상남자들이었는데, 이 '발홀'이 영화 매드맥스에 나오는 '발할라'다.
이들 북방 게르만족이 남하하여 기독교와 만나 '남성성'은 또 한 번 진화한다.
중세는 인류사에서 이미 문명적으로 가부장제가 확립되었기 때문인지, 기독교는 사제와 수도승 같은 이미지를 시대의 '남성성'으로 변모시켰다. 그럼에도 당시의 남자들은 주요 이혼 사유였던 성기능 장애가 아님을 '현명하고 신실한 여성들'에게까지 대놓고 증명해 보여야 했던 원초적 남성성까지 거세할 수는 없었단다.
역시 발기는 '남성성'의 처음이자 마지막인가 보다.
이후 중세 봉건제의 '기사(knight)'와 근대의 부르주아지의 등장과 함께 확장된 '신사(gentleman)'는 무력은 물론 '예의'를 갖추고 '자제력'과 '신중함'까지 공식적인 덕목으로 갖춰야 했으니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 이르면 현실적으로 그런 인간은 거의 없었겠으나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인간이 바로 '남성성' 자체가 되었다.
물론 '신사'는 부르주아 계급들이나 가능했고 다수 노동계급은 본인의 육체노동만으로 가족을 먹여살려야 했기에 근육팔뚝과 선술집의 주정난동이 대표적인 '남성성'이 되는 아주 저질의 가부장제가 뿌리내리게 된다.
물론 역사적으로 완벽을 향해 확장된 이 '남성성'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실질적으로 무너졌다. 정확히는 소수 지배계급은 애초에 알고 있었던 게 모든 남성이 참전해야하는 '민주주의적' 세계전쟁을 통해 공식화되었다고 해야겠다.
남성이 아무리 '용기'라는 덕성으로 무장한들 전쟁에서 죽음의 '공포'라는 본능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남성성'의 이데올로기는 건재하다. 여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패권주의와 피지배의 상징인 '여성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남성성의 역사]의 저자 루성옌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남성성'의 '위험(toxic)'함을 강조하며 이 '위험한 남성성'이 여성은 물론 남성들 본인까지도 억압해 온 간략한 역사를 조명한다.
3.
여성과 공존하지 못하고 지배하려는 '남성성'의 위험성이나, 이런 구습에 대한 즉자적 반발로서의 거세를 주장하는 극단적 '여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하여 뭐 이런 얘기를 하려고 '남성성의 역사'까지 들먹이나 싶기도 하다.
고등학생 때 잠시 '여자'가 되고 싶었던 매우 끔찍한기억에도 불구하고, 세상 반백년을 살면서 나는 주변 누구보다도 '남성성'을 강조하는 마초적 '꼰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내 생각대로 세상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다.
다만, 지금 '꼰대'로 사는 내 삶에 뿌리깊게 잠재된 '위험한 남성성'을 제압하기 위해 우선 할 수 있는 일들을 새삼 다짐해 보기로 한다.
남에게 쓸데없이 잔소리하지 않기.
내 생각과 다르다고 세상 말세가 되지 않는다.
치장하거나 집안일 하는 남자 흘겨보지 않기.
그런다고 그 남자가 여자가 되는 건 아니다.
말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하기.
왜 세탁기는 나만 돌려야 하느냐 항변하기 전에 내가 돌려야 하는 배경 먼저 찬찬히 생각해봐야 한다. 실제로는 함께 번갈아 돌리고 있는 경우가 더 많더라.
지금 꼰대인 내가 더 늙어 태극기 할아버지 같이 되지 않으려면,
'위험한 남성성'보다 우선 지금 나의 '더 위험한 꼰대성' 먼저 돌아봐야겠다.
그 더 위험한 '꼰대성'의 기원이 '위험한(toxic)' 남성성과 여성성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이십년 후 이해심과 관용이 충만해진 사회에서 할머니 여장을 하고 돌아다닐 나를 보고 사람들이 돌이나 던지지 말기를.
***
1. [남성성의 역사](2021), 루성옌, 강초아 옮김, <역사산책>, 2023.
2. [의식의 기원](1976), 줄리언 제인스, 김득룡/박주용 옮김, <연암서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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