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사회주의'도 돌아왔다!
어쨌든, '사회주의'도 돌아왔다!
- [좌파의 길(식인 자본주의)], 낸시 프레이저, 2022.
1.
아직도 '자본주의', '사회주의', '신자유주의' 얘기냐, 묻는 옛 친구들은 "시대가 변했으니 생각도 변해야 한다"는 말하나 마나인 당연한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먹고 살아남기가 얼마나 힘든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를 변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햇빛에 푸른 등을 반짝이며 날뛰던 산 고등어 시절에 잠시 빠졌던 '거대담론'들이 이제는 삶에 유효하지 않다는 말은,
'자본주의'라는 현 사회체제가 성공하여 역사의 종말을 증명해서였다기 보다는,
세상이라는 뜨거운 석쇠 위에 올라 등이 까맣게 탄 죽은 고등어가 되지 않으려 각자도생 쟁투하는 우리들 삶에선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었다.
그러던 중 21세기에,
'자본주의'가 돌아왔다.
2.
"... 현 위기를 발생시킨 책임은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 시스템에 있다... 이 모든 재난이 한데 모여 서로를 악화시키며 우리를 집어삼키겠다고 위협하는, 사회질서 전체의 전반적 위기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 역시 '경제' 위기만이 아니라 '돌봄(사회적 재생산)', '생태계(환경)', '정치(공적 권력)'의 위기를 함께 불러들이는 경향이 있으며,... 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접합부위마다 벌어지는 '경계투쟁(boundary struggles)'을 불러 일으킨다...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 사적 권력과 공적 권력의 관계, 인간 사회와 비인간 자연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구축해야 한다... '최선의 희망'은... 오직 '더 커다란 대안을 사고'해야만, 우리 모두를 잡아먹으려는 '식인 자본주의'의 끝없는 식욕을 제압하기 위해 싸울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
- [좌파의 길], <서문 - '식인'이라는 은유>, 낸시 프레이저, 2022.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 1947~)는 마르크스 이론을 기반으로 존 롤스의 미국식 '정의론'의 '분배' 이론에 각 주체들의 '인정' 이론을 접합한 '사회주의자'다. 여성운동가로서 좌파적 페미니스트에 자본주의 체제의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특징으로서 강력한 '정치'의 역할도 강조한다.
국내에서 올해 [좌파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진보정치 이론가 장석준 선생이 번역하여 출간된 낸시 프레이저의 최근 저서는 그녀가 2022년 발표한 책,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가 원제다.
코로나 팬데믹과 극심해진 불평등 자본주의 극단에서 프레이저 사상의 잠정적 총결산과도 같다.
21세기 금융자본주의가 성장할 수록 환경파괴와 기후위기는 심화되고 독점자본이라는 사적 권력을 향한 기업들의 경쟁이 생산하는 재화들이 '공공재(커먼즈:commons)'가 되면서 이 '공공재'를 공유하는 다수대중의 권력이 [어셈블리](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에서 주장하듯 더욱 확장되고 강화되는 현재, '럭셔리 공산주의 선언'(아론 바스타니)을 비롯하여 미국에서조차 '사회주의 선언'(바스카 선카라)도 이미 나왔다.
낸시 프레이저의 '사회주의' 또한 같은 객관적 세계체제를 배경으로 하니, 생산수단으로부터는 배제되어 있지만 공공재를 소유하게 된 집단적 다수대중의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사회주의적 '실천'을 강조하는 결론은 다들 대동소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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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프레이저의 책에서 중요한 개념은 '식인 자본주의'와 '수탈', '4D'와 '경계투쟁', 그리고 '생태 사회주의' 정도 되겠다.
1) '식인'이라는 은유
프레이저가 자본주의 사회체제 전반을 은유하는 '식인(cannibalism)'은 사람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들을, 나아가 체제로서 스스로 "제 살 깎아먹는"(같은책, <1>) 자본주의의 본원적 특징이다. 서양 신화에 나오는 "자기 꼬리를 먹는 뱀 '우로보로스(Ouroboros)'"다.
"따라서 요점은,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화된 측면'과 '비시장화된 측면'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예외적인 현상이나 우연적인 경험이 아니라 자본주의 DNA에 각인된 특징이다. 사실 '공존'은 이 둘의 관계를 포착하기에는 너무 약한 단어다... 이러한 측면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하는 말은 '제 살 깎아먹기(cannibalization)'다."
- [좌파의 길], <1. 걸신들린 짐승 : '자본주의'의 재인식>, 낸시 프레이저, 2022.
자본주의는 '정치'적으로는 자기자본 증식과 잉여가치 창출의 목적을 위해 자본의 사적 권력으로 '정치'의 공적 권력을 이용하거나 무력화시켰다.
'경제'적으로는 생산수단의 소유를 둘러싼 '계급투쟁'의 '경제' 영역 뿐만 아니라, 임금노동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가정과 여성의 '사회적 재생산' 및 '돌봄' 노동처럼 노동의 가치가 지불되지 않는 '비-경제' 영역까지 착취하며, 저발전 남반구의 유색인종들과 자연환경 일체를 아주 공짜로 착취한다.
이 '착취'는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이념을 넘어 '수탈'로 정의된다.
2) '착취'에서 '수탈'로? 아니 원래 '수탈'로부터
"자본이 임금을 대가로 '노동력'을 구매하는 계약관계 대신, '수탈'은 인간역량과 자연자원을 징발하여 자본확장 회로에 징용함으로써 작동한다... 인종화된 타자에 대한 '수탈'은 노동자 '착취'의 필수배경을 이룬다... '수탈'... 마르크스가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지 못한 또 다른 사회적 분할을 드러낸다. 자본이 임금노동을 통해 착취하는 (이중으로) 자유로운 노동자와, 자본이 다른 수단을 통해 '제 살 깎아먹기' 대상으로 삼는 부자유한 또는 종속적인 주체 사이의 사회적 분할이 그것이다... '수탈'과 '착취'의 구별은 '경제'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다."
- [좌파의 길], <2. 수탈 탐식가 : 착취와 수탈의 새로운 얽힘>, 낸시 프레이저, 2022.
낸시 프레이저는 사회주의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데, 그녀의 "확장된 자본주의론"은 마르크스의 '정통 교리'에 기반하고 있지는 않다. 즉, 마르크스의 [자본론]처럼 '착취'라는 '경제'적 개념으로 자본의 축적(본원적 축적 또는 원시축적)을 근원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 자연'과 '제국주의'적이든 아니든 패권에 의해 무력해진 '인종들', 그리고 '사회적 재생산'을 맡고 있음에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돌봄 노동과 여성들에 대한 전방위적 '수탈'로부터 정의한다.
장석준 선생의 <옮긴이 후기>에 의하면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의 이론적 계보를 잇는 낸시 프레이저의 '수탈' 이론은 "확장된 자본주의관"의 핵심이다.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 사이토 고헤이의 연구에 의하면 마르크스가 인간 사회의 '착취'를 발견한 1867년의 [자본론] 1권 이후 자본주의의 자연 '수탈'에 천착하여 그 뒤로 이어질 자본 연구를 초고 상태로 남길 수 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지구를 파괴하는 자본주의는 결국 무자비한 '자연 수탈'을 그 존재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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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된 관점의 자본주의는 임노동 '착취'의 기본 모순을 넘어 자연(환경), 인종과 여성(사회적 재생산), 정치(공적 권력)에 대한 '수탈'을 통해 "제 살 깎아먹기"(같은책, <1장>)를 시전하며, 위 영역들을 '분할'한 '식인 자본주의'가 그은 각종 '경계'에서 이뤄지는 '경계투쟁(boundary struggles)'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반자본주의' 연대 블록으로 결합된다.
3) '4D' 현상
이 "확대인식된 자본주의 사회"(같은책, <4>)의 모순은 이른바 '4D' 현상으로 압축되는데, '분할(Division)' + '의존(Dependency)' + '책임회피(Disavowal)'의 '3D'가 합쳐져 또 하나의 'D'인 '불안정성(Destabilization)'으로 현상한다는 주장이다.
'경제'와 '비-경제'를, '인간'과 '비인간 자연'을, '경제'와 '정치'를 '분할'하고, 소외된 주체(유색인종, 여성) 및 자연을 무상 또는 저렴하게 수탈하면서 '의존'하며, 잉여가치 창출 외에 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회피'를 일삼는 자본주의는 결국 '불안정'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는 의미겠다.
4) '경계투쟁' = '반자본주의'
"자본주의 사회는 역사적으로 여러차례 자신을 재발명했다. 특히 다양한 모순들(정치적, 경제적, 생태적, 사회재생산적)이 수렴하는 전반적 위기 국면에는,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제도적 '분할'이 이뤄지는 장소에서 '경계투쟁'이 분출했다. 그 장소란, 경제와 정치가 만나고, 사회와 자연이 만나며, 수탈이 착취와 만나고, 생산과 재생산이 만나는 곳이다."
- [좌파의 길], <3. 돌봄 폭식가 : 생산과 재생산, 젠더화된 위기>, 낸시 프레이저,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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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에서 공산주의자의 임무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투쟁과 연대하며 미래의 운동을 대표한다는 '반자본주의' 결론의 현대화다.
생산의 사회화를 위한 조직된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을 넘어 여성운동과 반인종주의운동, 생태주의 운동과 결합하는 대대적인 '반자본주의 연대 블록'의 형성과 근본적인 자본주의 체제변혁운동이 21세기 사회주의라는 것이다.
5) '확장'된 '생태 사회주의'
이제 "확장된 자본주의관은 사회주의에 관해서도 확장된 인식이 필요함"(같은책, <6>)을 말해주는데, '자본주의'와 함께 "돌아온" '사회주의'는 단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체제 붕괴의 징후적 배경과 함께 다시 떠오르는 '반자본주의'적이면서 '자본 이후'를 그려내는 실천적 현실이다.
'자연보호' 수준의 '생태주의'는 '반자본주의'로 방향을 잡고, 이제는 자본가들에 의해 수탈당하지 않는 자연을 복원하는 사회주의여야만 기후환경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할 수 있다.
"'반자본주의'라는 이 퍼즐조각은 환경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적 지향과 비판세력을 제시한다... 말하자면, '반자본주의'는 모든 역사적 블록에 필수적인 '우리'와 '저들' 사이의 대립선을 긋는 역할을 한다... '최대의 희망'... '환경을 넘어서는 반자본주의적 대항 헤게모니 블록'을 건설하는 데 있다... '생태 사회주의'..."
- [좌파의 길], <4. 꿀꺽 삼켜진 자연 : 수탈, 돌봄, 정치와 얽혀있는 생태 위기>, 낸시 프레이저, 2022.
낸시 프레이저의 "확장된 사회주의론"은 '생태 사회주의'다.
"어쨌든 사회주의도 돌아왔다... 나의 목표는 사회주의 역시 하나의 '제도화된 사회질서'로서 재인식하는 것이며, 이렇게 포괄적이어야만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한 믿을만한 대안이라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 [좌파의 길], <6. 진정한 대안의 이름으로 : 사회주의의 재발명>,낸시 프레이저, 2022.
"제 살 깎아먹는" 식인 자본주의라는 확장된 자본주의론에 걸맞게 그 대안으로서 사회주의 또한 '생산수단의 사회화'의 경제 영역만을 근본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인 정치적 자치의 범위를 확장"(같은책, <6>)하고 자본주의가 그은 "경계선들을 다시 그음으로써 자본주의가 '경제'적인 것과 관련지은 긴급한 사안들을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같은책, <6>)을 주요 실천적 임무로 둔다.
물론, 낸시 프레이저는 대안적 사회주의 미래상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다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 '식인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총체성"(같은책, <5>) 속에서 '경계투쟁'들의 실천적 연대를 기대하고 있다.
"좌익의 정통교리와는 달리, 자본 축적은 (이중으로) 자유로운 임금노동자의 '착취'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과 법적으로 유효한 권리를 빼앗긴 종속적 인구집단에 대한 '수탈'을 통해서도 전개된다. '착취'와 '수탈'의 이러한 구분은 전 지구적인 피부색의 경계선과 일치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내장된 특징인 인종적, 제국주의적 약탈은 현 위기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어 있다... (현재의) 노동계급은 더 이상 백인남성광부, 공장직공, 건설노동자로 전형화될 수 없으며, 이제 그 전형은 돌봄노동자, Geek(비정규직)-노동자, 저임금 서비스노동자다. (어쨌든 급여를 받을 경우에는) 재생산 비용보다 더 적은 급여를 받는 이 현대 노동계급은 '착취'를 당하면서 동시에 '수탈'도 당한다. 코비드(Covid-19)는 이 추악한 비밀까지 폭로했다."
- [좌파의 길], <에필로그 - 팬데믹, 식인 자본주의의 광란의 파티>, 낸시 프레이저, 2022.
3.
그리고 어쨌든,
'사회주의'도 돌아왔다.
새로운 '사회적 총체성'의 철학으로 무장한,
'생태 사회주의'로.
언젠가 은근슬쩍 사라졌던 '거대담론'들이 그러했듯,
객관적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서.
먹고 살기 바빠 언제나 생존의 전선에 선 생활인들이 인정하든 말든 말이다.
***
1. [좌파의 길(Cannibal Capitalism)](2022), Nancy Fraser,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23.
2. [어셈블리(Assembly)](2017),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3. [21세기 공산주의 선언 - FALC](2019), 아론 바스타니, 김민수/윤종은 옮김, <황소걸음>, 2020.
4.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2019), 바스카 선카라,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편집부 옮김, 2021.
5.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2020), 사이토 고헤이,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6.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 비판](2017), 사이토 고헤이, 추선영 옮김, <두번째테제>, 2020.
7.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 마르크스/엥겔스, 1848.
8. [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황광우/장석준, <실천문학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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