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확한 건 오직, '불멸'의 '유전자'
명확한 건 오직, '불멸'의 '유전자'
-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1976.
"진화에서 실제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실체, 그리고 이에 근거한 관점이 의미를 가지는 실체는 오직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이기적 유전자'다."
- [이기적 유전자], <8장. 세대 간의 전쟁>, 리처드 도킨스, 1976.
1.
실적이 바닷속 심해 가오리처럼 바닥을 훑고 있다.
팀장이 된 지난 1년 반 동안 올해 상반기가 최악이다.
나를 팀장으로 추천한 선배팀장은 '선한 영향력'을 확장시키라고 권유했다.
실적은 결국 그에 따라올 것이라는 희망을 담아서.
후임자는 기본적으로 전임자로부터 배운대로 '모방'하고 '복사'한다. 선배팀장은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선한 영향력'을 지녔고, 그를 보고 배운 나는 이를 '확대재생산'해야 할 필연적인 의무가 있다.
내가 원래 선한지 악한지 '백지 이론(tabula rasa)' 또는 '빈 서판(the blank slate)' 이론을 따르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고는 싶다. 여태껏 반백년 살아오면서 실제로 어땠을지 모르지만 나는 언제나 그러려고 노력했고 지난 1년 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팀내 동료들 간 우애는 나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실적이 하향세만 그리면서 바닥을 치기 직전이 되니 문득 '이기주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쨌든 나도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 눈에 들어온 책이 [이기적 유전자]였다.
2.
"나의 목적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생물학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이 '유전자(gene)'가 만들어낸 기계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논의하려는 것은, 성공한 '유전자'에 대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성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정한 이기주의'라는 것이다... '자연선택'의 과정을 보면 자연선택을 거쳐 진화해온 것은 무엇이든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선택(집단선택이 아닌 자연선택)의 기본단위, 즉 '이기성'의 기본단위가 종도 집단도, 개체도 아닌, 유전의 단위인 '유전자'라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 [이기적 유전자], <1장.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리처드 도킨스, 1976.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 1941~)의 대표 저서는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1976)다.
찰스 다윈 진화론의 '자연선택설'을 지지하는 '신다윈주의' 일파를 표방하지만, 생명 진화의 기본 단위를 19세기 다윈을 포함한 보통의 생물학자들처럼 '개체'가 아닌 30억년 전 원시 지구의 생명의 기원부터 존재한 최소의 '분자', 즉 DNA라는 '자기복제자(the replicators)'로 불리는([이기적 유전자], <2장>) '유전자(gene)'로 본다.
"우리는 '생존기계'다. 즉 우리는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자다."
- [이기적 유전자], <초판 서문>, 리처드 도킨스, 1976.
"자기복제자... 이제 그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며, 우리(신체)는 그들의 '생존기계'다."
- [이기적 유전자], <2장. 자기복제자>, 리처드 도킨스, 1976.
"우리 모두는 같은 종류의 '자기복제자', 즉 DNA라고 불리는 분자(유전자)를 위한 생존기계다... '유전자'들은 '자기복제자'이고 우리는 그들의 '생존기계'다."
- [이기적 유전자], <3장. 불멸의 코일>, 리처드 도킨스, 1976.
유전자가 생명 진화의 기본단위고, 생물 개체들의 몸은 유전자가 영원토록 번식하고 살아남기 위한 '생존기계'라는 말은 이 책에서 계속 반복된다. 나머지 대부분의 장들은 과학자의 논리전개답게 이 가설을 증명하는 각 동물 개체들의 '행동'이다. 1976년의 <초판 서문>에서도 도킨스는 스스로를 "동물학자"이며 이 책은 "동물의 행동에 관한 책"이라 규정한다. 그러나 계속 오해가 없도록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본인은 다윈주의자이며 그럼에도 '생존기계'에 불과한 생물 '개체'가 아닌 불멸의 '유전자'를 연구하는 중이라고.
결국 도킨스의 진화론은 '개체'를 중심으로 한 '집단선택'이 아닌 다윈주의적 '자연선택'이다. 다윈이 '개체'에 머물렀던 건 19세기 중반 그가 [종의 기원]을 발표할 당시에는 '유전자'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진화는 '집단선택' 즉 각 '개체'들 집단의 오랜 선택의 누적이 아니라, '유전자'가 '생존'하고 '번식'하며 '불멸'의 존재로 이어지기 위한 '안정'적 선택, 즉 '자연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유전자의 '자기복제'가 기본인데 '자기복제'는 '진화적으로 안정된 생존전략(ESS)'을 위해 3가지 특성을 지닌다. '안정적 수명(장수)'과 '다산성', 그리고 '정확성'이다(같은책, <2장>). 이 특성으로 무장한 '유전자'는 결국 살아남는 '성공한 유전자'다. 물론 이들 특성에서 이탈한 '오류'(같은책, <2장>)는 아마도 진화의 질적 변화를 추동하는 '돌연변이'일 것인데, 실제 동물집단 사례에서도 처음에는 소수였던 생존전략이 다수가 되면서 '선택'의 질적변화를 이끄는 행동들을 이 책은 많이 소개하고 있다.
물론, 개체들의 '집단선택'이 아닌 유전자의 다윈주의적 '자연선택'이라는 전제는 잊을만 하면 재차 강조하면서 말이다.
"'이기적 유전자'... 그것은 온 세상에 퍼져있는 특정 DNA 조각의 모든 복사본들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목적은 유전자 풀 속에 그 수를 늘리는 것이다. 유전자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생존'하고 '번식'하는 장소인 몸(신체)에 프로그램을 짜넣는 것을 도와줌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한다."
- [이기적 유전자], <6장. 유전자의 행동방식>, 리처드 도킨스, 1976.
'이기주의'냐 '이타주의'냐는 현상일 뿐이다.
'유전자'의 궁극적 목표는 '생존'이므로 겉으로는 '이타적'으로 보여도 해당 '유전자'가 '생존기계'인 여러 신체들을 죽이고 갈아타며 안정적으로 장수하기 위한 '이기성'이 그 본질이다. 다만, 이 책 [이기적 유전자]가 다루는 분야는 인문학이 아닌 자연과학이므로 '신'의 목적이나 프로그램 따위를 상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 스스로도 이 책의 제목으로 [이기적 유전자]보다는 [불멸의 유전자(코일)]가 더 맞을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어쨌든, 도킨스에게 결국 '이기주의'나 '이타주의' 같은 인문학적 가치판단 개념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전자(gene)'가 유전자 풀 내에서 퍼져나갈 때 정자가 난자를 운반자로 하여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뛰어다니는 것과 같이, '밈(meme)'도 밈 풀 내에서 퍼져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mimeme)'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 다닌다."
- [이기적 유전자], <11장. 밈-새로운 복제자>, 리처드 도킨스, 1976.
[이기적 유전자] 1976년 <초판>의 마지막 장은 원래 '밈(meme)'에 관한 내용이었다.
생명 전체에서는 '유전자'의 생존이 주제였지만, 인류에게는 뇌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유전자'의 생존이라는 원시 형태를 넘어서는 '문화'와 '문명'이 있음을 짚고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즉, 인류진화사에서 뇌에서 뇌를 통해 이어지는 '모방'과 전승의 '문화' 말이다.
이를 우리는 인류의 '문명'이라 부른 것이다.
이 '문명'의 발전을 가능케 하는 기본단위는 '유전자'라는 일차원적 개념과 차별화되어야 했기에 도킨스가 고대 그리스어 'mimeme(모방)'를 어원으로 'gene(유전자)'처럼 단음절의 개념을 만든 것이 'meme(밈)'이다.
'gene'은 자연계, 'meme'은 인간문명계 진화사의 기본단위라는 차이 외에, 도킨스는 '가치중립'적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한 인문학적 가치판단으로 <초판>을 아래와 같은 문구와 함께 끝맺는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 [이기적 유전자], <11장>, 리처드 도킨스, 1976.
물론, 1976년 도킨스의 '유전자'의 '확장'은 인간계의 '밈'에서 끝나지 않는다. 1982년 그 스스로 "일생 동안 학자로서 성취했던 그 어떤 것보다 자랑거리이자 기쁨거리"(같은책, <13장>)라 표현한 또 하나의 대표 저서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 발표 후 도킨스는 1989년 [이기적 유전자] 제2판에서 '밈'의 <11장> 이후 2개의 장을 추가한다.
마지막 장인 <13장. 유전자의 긴 팔>은 그의 "자랑거리이자 기쁨거리"인 [확장된 표현형]의 예고편(예고와 본편의 선후는 바뀌었지만)이자 요약본이니 나로서는 그의 '자랑거리' [확장된 표현형]을 다음 책으로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마도 [이기적 유전자] 개정판의 <13장> 요약을 미리 읽었으니 내가 좋아하는 '동물의 왕국'을 시청하듯, 저명한 동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소개해 주는 여러 동물들의 '행동'을 읽어보고자 한다.
"유전자 간의 중요한 차이는 그 '영향'으로서만 드러난다... '표현형(phenotype)'이라는 용어는 하나의 유전자가 신체로 발현되는 것, 즉 배 발생 과정을 통해 유전자가 그 대립 유전자에 비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말할 때 쓰인다... 우리가 숙주의 변화는 기생자에게 이익이 되는 적응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숙주의 변화를 기생자 유전자가 '확장된 표현형(extended phenotype)'에 미치는 '영향'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유전자'는 자신의 몸 바깥까지 팔을 뻗쳐서 다른 생물체의 '표현형'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 [이기적 유전자], <13장. 유전자의 긴 팔>, 리처드 도킨스, 1989.
그리고 개정판에 추가된 <12장>의 제목은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한다"이다.
3.
"... 현실생활에서 인간과 동식물의 생활은 관중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실생활의 많은 측면은 '비영합 게임(nonezero sum game)'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이 종종 물주' 역할을 하고 개개인은 서로의 성공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반드시 경쟁자를 누를 필요는 없다. '이기적 유전자'의 기본법칙에서 벗어나지 않고도, 우리는 서로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세계에서조차 협력과 상호부조가 어떻게 번성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액설로드의 말대로 어째서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 [이기적 유전자], <12장.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한다>, 리처드 도킨스, 1989.
'권선징악'의 도덕책 얘기가 아니다.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의 개정판에 추가한 <12장>에서 소개한 게임 이론과 '죄수의 딜레마'를 주제로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액설로드가 수차례 실험한 사례들이 보여준 과학적 결과다.
'이기적'으로 싸워야 하는 게임에서도 결국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한다'니.
여기서 조건은,
1) 서로 피터지게 빼앗아먹는 '영합 게임(zero sum game)'이 아닐 것,
2) '비영합 게임(nonezero sum game)'으로서 '자연'이라는 '물주'가 있어 자연은 망가지든 말든 게임참가자들이 공생할 수 있을 것,
3) 가장 중요한 건, 그 게임의 끝이 언제일지 알 수 없도록 '불멸의 시간'일 것,
대충 이렇다.
따라서, '마음씨 좋은' 전략이 '일등' 즉, '불멸'이 되기 위해서는 생명진화사와 같은 영겁의 시간이 필수전제인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에 의하면,
'불멸'의 시간 속에서 마음씨 좋은 '이타성'이 생존이라는 '이기성'과 동일해지게 된다.
과학자처럼 명료하지 못하고 온통 뒤죽박죽인 문사철 편애자인 나는 또 다시 헷갈린다.
이 끝이 보이는 '실적'의 게임에서 나의 '생존'은 역시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가.
일단, 나의 의식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맹목적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불멸의 유전자'만은 명확하다.
"우주의 어느 장소든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복제자(유전자/코일)' 뿐이다."
- [이기적 유전자], <13장>, 리처드 도킨스, 1989.
이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1976)는 덮고 그의 '자랑거리'인 [확장된 표현형](1982)이나 펼쳐봐야겠다.
일요일 오후 '동물의 왕국'을 틀듯 편안한 자세로 말이다.
***
1.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1976~1989), Richard Dawkins, 홍영남/이상임 옮김, <을유문화사>, 2018.
2.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1982), Richard Dawkins, 홍영남/장대익/권오현 옮김, <을유문화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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