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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Mar 05. 2020

[에르푸르트 강령] 외 - 칼 카우츠키

잊혀진 이름, 칼 카우츠키를 읽자!

한미FTA 폐기와 ‘의회주의’ 정치
- 칼 카우츠키의 [에르푸르트 강령]에서 ‘의회주의’
 
 
비단 직접 노동자계급에 특별한 관계가 있는 법규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부분의 법규의 대다수가 많건 적건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다른 일체의 계급과 같이 노동자계급도 정치적 세력과 정치적 권력의 획득을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근대적 국가에 있어서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두 가지의 길이 있다. 첫째는 국가 수장에게 개인적으로 영향을 주는 일이다… (둘째) 국민 중의 나머지 일체의 계급은 근대적 대국가에 있어서는 그들이 선출한 의회를 통해서만 국가 시정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국민에 의한 직접적인 입법을 논외로 해도 무방하다. 적어도 근대적 대국가에서는 국민에 의한 직접적 입법은 의회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은 기껏해야 의회와 병립해서 개별적인 경우에 있어서 의회를 보정하는 활동을 할 수 있는데 불과하다. 이것에 의해서 국가적 입법 전체를 처리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근대적 대국가가 존재하는 한, 정치적 활동의 난점은 항시 그 의회에 존재할 것이다.
 
- K. J. Kautsky. [에르푸르트 강령],
제5장 <계급투쟁> 제9절 ‘정치적 투쟁’ 중
 
 
2011년 11월 22일, 한미FTA 국회비준안이 우리 국회 역사 초유의 날치기로 통과되었다. 한미FTA 협정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이식의 종결판으로 사회 양극화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며, 한미 양자간 불평등으로 점철된 협정으로 날치기 비준 이후 의회가 저버린 민중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노동자·시민들은 우리 역사에서 늘 그래왔듯 거리로 나섰다.
우리 현대사를 돌아봐도 질적인 전환의 계기는 언제나 ‘거리’였다. ‘의회’는 민중들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었고 대다수 민중들은 변혁의 열망을 ‘거리’에서 분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이 민중들의 열망을 배반하면서 일시적으로 마무리된 장소 또한 언제나 ‘의회’이기도 하다.
 
1917년 소비에트 혁명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권력을 쟁취했던 러시아 혁명 지도자 레닌의 볼셰비즘이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던 독일 사회민주당 이론적 지도자 칼 요한 카우츠키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의 영향 하에서 ‘배신자’로 낙인 찍혀 왔고, 적어도 우리의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의회주의’로 대표되는 기회주의, 개량주의의 영역에서 머물다가 21세기를 넘어서면서 우리 사회에서 잊혀져 갔다. 그러나 칼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주의 정통파 이론을 대표하였고 초기 레닌의 마르크스주의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당시 사회민주주의는 현재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사회민주주의와는 달리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을 견지하는 대표적인 당파였다. 카우츠키는 독일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명실상부한 대표자였고 1875년 ‘고타강령’으로 유명한 독일사회주의노동당 창당 후 1890년에 독일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꾼 사회민주당이 1891년에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더욱 발전시킨 ‘에르푸르트 대회’에서 ‘에르푸르트 강령’을 기초한 초안자였다. 그는 이 에르푸르트 강령이 당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것으로 자부하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처럼 과학적 사회주의를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른바 ‘사회주의 문헌 중에서 팸플릿과 특수저서 사이에 중간적인 저서’로서 ‘에르푸르트 강령’ 해설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에르푸르트 강령]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에르푸르트 강령에 따라서 ‘사회주의적 관념계 중에서 본질적이면서도 또한 사회민주주의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것들을 알기 쉽게 서술’하면서 소경영의 몰락, 프롤레타리아, 자본가계급, ‘미래국가’, 계급투쟁 등으로 개념을 분류하여 비교적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에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문헌, 기존의 여러 반대파에 관한 공산주의자의 입장의 순서로 저술한 방식을 채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용은 1892년 카우츠키의 초판 서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무튼, 대중들에게 사회민주주의를 선전·선동하는 당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저술하였으므로 학문적인 이야기보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본질적인 개념들을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분석하고 각 장의 각 절을 이루는 개념들이 쉽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서술한 점은 다른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서와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자본의 독점에 의해 소경영은 몰락하고 있지만 소자본은 대자본에게 철저하게 의존하면서 파산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화하여 언제든 노동력을 제공하는 ‘산업예비군’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이러한 소경영을 몰락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소경영의 증가를 촉진’시키고 있으며 대다수 노동하는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 내에서 다수화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계급투쟁을 통해 사회 변혁의 주체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의 선진적인 부분이 노동조합운동으로 실현되고 이러한 계급투쟁은 사회주의와 접목하면서 사회민주주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의 실현체가 사회민주당이며 그 정신이 바로 ‘에르푸르트 강령’이다.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을 가급적 (사회주의적) 목적의식적 또는 가급적 활동목적으로 형성하는 것이 사회민주당의 임무이다.
 
- K. J. Kautsky. [에르푸르트 강령],
제5장 <계급투쟁> 제12절 ‘사회민주주의: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중
 
소경영의 몰락과 대경영(대자본)에 의한 이들의 유지-‘증가·촉진’-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영세 자영업자 및 농민의 상황과 동일하다. 이러한 소경영 유산자는 고정자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옹색한 생산수단은 가지고 있지만 자본가처럼 착취자는 아니며 생활은 프롤레타리아와 다를 바 없다. 이는 또한 ‘공산주의 혁명은 비공산주의자들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명제가 근거하고 있는 지점이다. 간접세를 폐지하고 소득 누진세와 부유세,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무상법률지원 등을 주장하는 반(反)자본주의 정치 당파로서의 사회민주당과 ‘국민’의 관계를 다루는 마지막 장의 마지막 절에서 카우츠키는 말한다.
 
사회민주당을 강화하는 것은 비단 임금노동자의 이익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인민 중에서 노동으로 생활하고 착취로 생활하지 않는 모든 성원의 이익이기도 하다.
 
- K. J. Kautsky. [에르푸르트 강령],
제5장 <계급투쟁> 제14절 사회민주당과 국민 중
 
여기까지 카우츠키는 과연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다운 사상적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의회주의’이다.
현재 우리 사회 한미FTA 비준무효 정국에서 다시 한 번 ‘의회주의’를 생각한다. 의회가 날치기한 한미FTA를 무효화하려면 이를 반대하는 대다수 민중이 ‘거리’에서 모은 분노의 힘으로 진보정당이 통합되고 ‘중도진보’를 표방한 ‘민주통합당’ 세력과 연대하여 정권교체를 이룬 후 결국 ‘의회’를 통해 한미FTA 문제를 마무리 지을 수 밖에 없다. 우리 사회를 송두리째 바꿀 한미FTA를 중심으로 한 현 정세에서 한미FTA의 완전한 폐기를 목표로 하는 세력은 진보이고 자유무역의 환상을 버리지 못한 채 한미FTA 재협상을 목표로 하는 세력은 진보가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가능할 테지만, 모든 정치세력은 이미 내년 총선과 대선 과정에서의 정권교체를 중심으로 통합 재편을 하고 있는 중이다. ‘거리’의 슬로건은 한미FTA 폐기이지만, ‘의회’의 슬로건은 재협상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는  ‘의회주의’의 본질이기도 하다.
 
프롤레타리아가 자기의식적 계급으로서 의회를 위한 투쟁(특히 선거전)에 참여하고 또한 의회에서 의석을 갖게 되면 의회주의도 역시 지난날의 본질이 변하기 시작한다. 의회주의는 부르주아지의 단순한 지배수단을 멈춘다. 바로 이러한 투쟁은 아직도 무관심한 프롤레타리아의 여러 계층을 분발시켜서 그들에게 확신과 희망을 고취해야 할 가장 유력한 수단이다. 그것은 또한 다양한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더욱더 공고히 하나의 통일적 노동자계급으로 융합시켜야 할 가장 유력한 수단이다. 그리고 최후에 의회주의는 국권을 프롤레타리아에게 유리해지도록 좌우하고 또 사정에 따라서는 일시적으로라도 얻을 수 있는 양보를 하게 하는 수단 중에서 현재 프롤레타리아에게 제공된 가장 유력한 수단이다. 이것을 요약하면, 이러한 투쟁을 프롤레타리아를 그 경제적, 사회적 및 도덕적 침몰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지렛대에 속하는 것이다.
 
-         K. J. Kautsky. [에르푸르트 강령], 제5장 <계급투쟁> 제9절 ‘정치적 투쟁’ 중
 
독일에서 사회주의자 탄압 당시 영국의 마르크스와 엥겔스 곁에서 사회민주당 기관지 [노이에 차이퉁;Neue Zeitung] 발행까지 했던 마르크스주의 정통파 이론가 카우츠키는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가 주도하던 제2인터내셔널의 주된 경향처럼 ‘경제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정통파’인 그의 관점에서 사회민주당은 생산수단의 사유를 폐지하고 새로운 ‘조합적 소유’를 주장하지만 반대파가 공격한 것처럼 ‘미래국가’의 설계도를 제시할 수는 없다. 새로운 사회의 모든 맹아는 현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 본질상 전투적 프롤레타리아의 목적의식적 분자에 지나지 않는’ 사회민주당 조차도 이러한 객관적 경제발전 법칙에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의 주저 [자본론]에서 물려받은 주요한 유산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또한 자본주의가 성숙되지 않았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킨 레닌의 볼셰비즘을 비판했던 근거이기도 했다.
 
‘미래국가’를 설계할 수 없는 사회민주당의 관점으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무산자 및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자가 투쟁하여 강화시켜 온 ‘의회주의’가 최선은 아니겠지만 현실적 차선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 현대사를 봐도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 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던 해방공간에서 ‘극좌파’로 분류되던 박헌영의 ‘소비에트 교조주의’도 즉각적 무력혁명이 아닌 선거와 의회 장악을 우선으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로 설정한 바 있다. 그리고 수 십년이 지난 현재 수많은 ‘시민 민주주의 혁명’과 온갖 개혁과정을 거치면서 최근 십 수년 간 우리 사회 모든 진보정치 세력이 추구했던 진보정당 운동도 바로 카우츠키의 노선과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국면에서 무력했고 심지어는 전쟁을 찬성하기도 했던 유럽의 사회민주당과 이들이 다수를 차지했던 의회의 배반에 맞서 혁명적 사고를 급진전시켰던 레닌의 고민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지금, '의회주의'의 '독재'에 의해 촉발된 한미FTA 비준무효 국면에서 그 폐기를 목표로 하는 진보정치 세력에게 ‘의회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
 
1. [에르푸르트 강령], 칼 카우츠키 지음, 서석연 옮김, <범우사>, 2003.
: 1875년 ‘고타강령’으로 유명한 독일사회주의노동당 결성 후 1890년에 이 당은 독일사회민주당으로 당명으로 바꿨고 이듬해인 1891년 에르푸르트 대회를 통해 사회민주당 강령을 채택하는데 이 강령이 바로 ‘에르푸르트 강령’이며 그 초안자는 칼 카우츠키였다. 이 강령에서 “사회혁명은 일거에 단호하게 행해지지는 않는다. 이런 예는 아마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을 것이다. 혁명은 수 년 또는 수십 년 간의 정치 및 경제적 투쟁 속에서 준비되어 계급 및 당파의 세력관계가 끊임없이 융성, 쇠퇴, 소멸하는 가운데 행해지며 종종 장기간의 반동에 의해 단절되는 수도 있다”고 하며 마르크스 경제주의에 기초하여 역사적 경험은 “경제적 발전을 저지하는 모든 수단이 효과가 없거나 또는 그것을 제거하려고 하는 고통을 도리어 크게 만든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고 본다. 한편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유해한 영향을 가능한 한 방어할 수 있는 유효한 다른 수단을 찾아냈다. 그것은 그들의 경제적 조직(노동조합)과 그들의 정치적 활동이다”. 이들 개혁은 “혁명적 견지에서도 지지”될 수 있는데, “국민대중의 프롤레타리아화,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경제생활을 지배하는 소수자로의 전 자본의 집중, 공황, 생존의 불안, 이 모든 잔인하고 광포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영향은 오늘의 소유질서의 지반 위에서는 어떠한 개혁에 의해서도-설사 그 개혁이 아무리 철저한 것일지라도- 부단히 증대하는 것을 저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카우츠키의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전면적인 정치권력 쟁취를 내건 레닌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와 달리 “사유재산의 몰락은 가령 그것이 언제 또 어떤 식으로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어도 분명히 도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부터 계승한 지점이지만 ‘경제주의’에 매몰될 가능성이 크기도 했다. 이후 독일사회민주당은 1914년 전시공채문제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분열되었고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던 카우츠키의 중도파는 따로 떨어져 나와 독립사회민주당을, 로자 룩셈부르크의 좌파 또한 독립하여 스파르타쿠스단을 각각 결성하였다. ‘에르푸르트 강령’과 같은 경향은 우리 사회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험으로서 12년간 존재했던 민주노동당의 노선이기도 했다. 번역이 다소 매끄럽지는 못하다.
 
2. [프롤레타리아 독재/테러리즘과 공산주의:혁명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 칼 카우츠키 지음, 강신준 옮김, <한길사>, 2006.
: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 대하여 정면으로 비판한 카우츠키의 1918년 저작이다. 제헌의회 소집과 보통선거권을 거부하고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계급관계를 토대로 한   ‘계급민주주의’에 기반하여 중앙집중 권력을 구축한 레닌의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일당독재’의 맹아가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카우츠키 방식으로 증명하고 있다. 러시아 볼셰비즘 비판의 본질적 근거는 보통선거권과 ‘의회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였다. 카우츠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다름아닌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선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한 문장의 규정으로 요약된다. 카우츠키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란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는 때때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사고를 억누르기도 하지만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획득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 성숙해 가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수단이다… 그런 조건에서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권력을 잡게 될 경우 프롤레타리아는 즉각 경제발전의 방향을 사회주의로 향하게 하고, 즉시 사회의 전반적 복지를 증대시킬 수 있는 충분한 물적·정신적 권력수단을 갖게 될 것이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레닌은 카우츠키의 이 저작에 대하여 그 유명한 ‘배신자’ 낙인을 유래시킨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라는 글을 통해 ‘의회주의’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닌 ‘계급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임을 주장하였고, 카우츠키는 [테러리즘과 공산주의:혁명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이라는 반박문건을 통해 1789년 프랑스혁명의 자코뱅주의(이른바 ‘1차 파리코뮌’)와 1871년 파리코뮌(이른바 ‘2차 파리코뮌’)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러시아 볼셰비즘을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닌 ‘테러리즘’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카우츠키는 이 문건에서 “전세계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운동에 돌입해 있으며 그들의 국제적인 압력은 매우 커져서 이제 어떤 경제적인 발전도 자본주의적인 성격은 물론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함께 띠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면서 사회주의 이행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토대로 “의회주의와 민주주의는 국민의 유형과 그 계층에 따라서 다양한 내용과 형태를 가질 수 있다. 의회 내에서 부르주아 정당들이 우세할 경우 ‘의회주의’는 부르주아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의회 내에 사회주의 다수파가 자리를 잡게 되면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규정하며 사회주의 혁명에서 ‘국민의회’의 역할을 다시금 강조한다. ‘민주주의’와 ‘독재’를 철저히 구분하는 카우츠키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요약된다. “보통 및 평등선거권으로 이루어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적 지배의 특징이 아니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혁명 시기에 평등선거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차별선거를 도입했으며… 오랜 기간의 힘든 투쟁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프롤레타리아들이 보통 및 평등선거권을 쟁취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인데… 보통 및 평등선거권으로 이루어진 민주주의는 주먹에 의한 계급투쟁을 머리에 의한 계급투쟁으로 바꾸는 방법이며 자신의 적들에 비해서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더욱 성장해 있는 계급만이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1920년 레온 트로츠키는 같은 제목인 [테러리즘과 공산주의]라는 글로 다시 카우츠키의 ‘진화론적이고 자연법적’인 사회주의 이행강령을 비판하게 된다.
 
3. [트로츠키:테러리즘과 공산주의], 슬라보예 지젝 서문 / 레온 트로츠키 지음, 노승영 옮김, <프레시안북>, 2009.
: 카우츠키의 논문인 [테러리즘과 공산주의:혁명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을 같은 제목을 걸고 반박한 레온 트로츠키의 글이다.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에 대한 평생의 비판자이며 ‘불구대천의 원수’, 한편으로는 영구혁명론자이자 이후 소비에트연방에서도 끝내 복권되지 못한 트로츠키답지 않게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후 ‘일당독재’와 ‘노동의 군사화’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외부적으로 유럽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을 기다리면서 러시아 내부적으로는 부르주아 계급은 물론 러시아 사회혁명당 및 멘셰비키 등 사회주의 혁명의 적들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인 ‘의회주의’와 보통선거권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철저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이 글의 요지다.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 중요하다는 관점에서는 수긍이 갈 수 밖에 없다. 사회주의 적들과의 내전으로 인해 파괴된 러시아 산업을 지키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볼셰비키의 배타적 권력이 필요하다는 절실함이 묻어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의  스탈린주의와 교차점을 이루는 주장이기도 하다. 트로츠키에게 “코뮌은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살아있는 부정이었다”. 그럼에도 슬라보예 지젝에 의하면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궁극적 차이점은 이것이다.
“스탈린에게 ‘레닌은 영원히 산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외설적 영혼, 권력의 도구가 되어 인공적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영혼으로 말이다. 트로츠키에게, 죽은 레닌은 조 힐(누명을 쓰고 죽은 미국의 노동운동가)처럼 살아 있다. 같은 이데아를 위해 투쟁하는 민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도 살아 있다.”
 
4. [로베스피에르:덕치와 공포정치], 슬라보예 지젝 서문 /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지음, 배기현 옮김, <프레시안북>, 2009.
: 1789년 프랑스대혁명 당시 자코뱅주의를 통해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철저하게 구현하고자 했던 로베스피에르의 연설문 모음집이다. “이성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고, 직관 없는 이성은 공허하다”고 말한 칸트의 테제를 빌어 “공포 없는 덕은 무력하고, 덕 없는 공포는 치명적이고 완전히 맹목적이다”고 규정한 로베스피에르의 이념을 강조하고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말한다. “평상시에 인민정부를 움직이는 동인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시기에 그 동인은 미덕과 공포 양쪽 모두입니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라고. 군주정과 당시 부상하는 계급이던 소수 부르주아지의 ‘자유, 평등, 박애’가 아니라 다수 가난한 계급의 더 나은 삶과 민주주의를 위해 불가피하게 채택한 자코뱅주의의 ‘공포정치’를 우리는 더 이상 피하지 말고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 서문을 붙인 슬라보예 지젝의 해설이다. 대다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등장하기 이전이었지만 대다수 피착취자들을 위해 “대규모의 집합적 의사결정을 추진하기 위해 위험도 감수”한 자코뱅주의의 ‘공포정치’가 “아마도…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료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커다란 유산일지도 모른다”고 지젝은 이야기한다. “기회주의적 현실주의에 맞서며, 어떠한 고난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유라는 항구적 가치에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면, 로베스피에르의 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혁명은 ‘단지 하나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저지르는 또 하나의 소란스런 죄악’에 불과하다”는 서문의 결론은 피착취자의 혁명의 대부인 로베스피에르의 변하지 않는 정신을 후세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방향을 설정하여 준다. 나머지 로베스피에르의 길고 장황한 연설문들은 다소 지루한 점이 있기는 하다.
 
5. [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1989.
: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는 명제로 시작하여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호소로 마무리되는 과학적 사회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주요 저작이다. 과학적 사회주의 또는 공산당(공산주의자)의 역사를 중심으로 1848년 현재 공산당(공산주의자)의 입장을 군더더기 없이 서술하고 있는데 선언문이라 그런지 명료하기는 하나 주석과 같은 예비지식 없이는 제대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점도 있다. 레닌은 과학적 사회주의로서 마르크스주의가 세 가지 구성요소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첫째 독일의 관념론(변증법) 철학, 둘째 영국의 고전경제학, 셋째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하였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계급투쟁의 역사가 흐르면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본격적 출현과 프롤레타리아트와 공산주의자의 관계, 기존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들에 대한 비판을 곁들이고 19세기 중반 현재 온갖 반대파들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입장이 어떠해야 하는지 주장한다. 계급투쟁과 모든 반정부주의자를 포함한 국제연대를 통해 공산주의자는 ‘전체 운동의 이해’와 미래를 대변하고 적들을 공포에 떨게 하면서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강력히 주장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6. [독일 이데올로기],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박재희 옮김, <청년사>, 1988.
: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보다도 먼저였던 1845~1846년에 공동 집필한 저작이다. 칼 카우츠키의 [에르푸르트 강령]은 [공산당 선언]의 서술 형식을 따라 그 당시에 맞게 마르크스주의를 해석하여 발표한 노선이라 볼 수 있는데, 역사를 계급투쟁으로 보는 관점을 중심으로 [공산당 선언]이 주로 사회주의 사상 관련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독일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변증법적)유물론 철학의 밑그림을 그리면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고대, 중세,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사회구성체의 역사와 그 토대를 이루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역사를 좀더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초기 저작이자 미완의 저작이다. 아마도 몇 년 후 이 초안을 바탕으로 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이 [공산당 선언]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7. [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실천문학사>, 2009.
: 몰락 양반가의 ‘서자’로 1900년에 태어나 1955년 북조선공화국 정권으로부터 미제 간첩 혐의로 사형당한 남한 공산주의 운동의 최고지도자 박헌영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 남북한 단독정부 건설로 인한 분단초기와 한반도 내전의 역사를 다룬 소설이다. 소비에트연방의 스탈린과 중국인민공화국의 모택동 등의 국제적인 공산주의 지도자들로부터 ‘조선의 유일한 공산주의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공산당 건설 사업에 매진하다가 해방 후 중도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전술을 꾀하면서 남조선노동당의 지도자로 역할을 하는데, 박헌영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식민지 해방투쟁을 벌인 국가의 혁명 단계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로 설정한 코민테른의 지침을 ‘교조적’일 정도로 준수하려 했던 ‘원칙주의자’였기에 가능했다고 저자는  평가하고 있다. 월북 후에는 김일성에 의해 소위 ‘정의의 반격전쟁’으로 시작된 6.25 과정에서 전쟁을 묵인하는 등 소신없이 처신하다가 ‘패전의 원흉’이자 ‘미제의 간첩’의 혐의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역사에서 뛰어난 인물은 아닐지라도 대다수 민중들이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박헌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가 관통해 왔던 우리 현대사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평전이다.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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