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 번은 희극으로'
역사,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 번은 희극으로’
- K. Marx,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통해 본 21세기 대한민국 ‘여왕 파시즘’
"헤겔은 어느 부분에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 번은 희극으로 나타난다고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당통 대신에 코시디에르가, 로베스피에르 대신에 루이 블랑이, 1793~1795년의 산악당 대신에 1848~1851년의 산악당이, 삼촌 대신에 조카가 나타난다. 그리고 ‘브뤼메르 18일의 재판(再版)’이 나온 정세에서도 동일한 현상을 볼 수 있다."
- K. Marx,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제1장 중.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사유방식에 ‘역사의 순환’은 없다. 이 사유방식은 역사의 운동을 전제로 하여 그 발전과 진보를 하나의 확고한 경향으로 삼는데, 어느 시기에서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의 퇴보적인 ‘반복’을 목격하기도 한다. 맑스는 이를 ‘희극’에 비유하는데 이는 진지한 역사적 ‘선행 사건’을 상대적 ‘비극’으로 보이게도 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제정(帝政)이 민중의 힘에 의해 무너지고 공화정(共和政)이 세워졌지만 왕정복고주의와 타협하고자 했던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인해 공화정은 다시 무너진다. ‘공포정치’ 초반 숙청된 자코뱅파 우파 당통의 ‘비극’이 1848년 2월 공화정 우파 민주인사 코시디에르의 ‘희극’으로 반복된다.
이 틈을 탄 공화국의 젊은 장교 루이 나폴레옹 1세가 1799년 황제로 등극하면서 ‘제1제정’이 등장했다. 나폴레옹의 퇴위 후에도 시대착오적인 전제정이 지속되다가 1830년의 민중 반란에 의해 ‘시민왕 루이 필립’을 앞세운 ‘7월 왕정’이 들어섰지만 대금융 부르주아의 횡포에 착취당하던 프랑스 민중들은 1848년 ‘2월 혁명’을 통해 왕을 몰아내고 다시금 ‘공화정’을 선포한다. 그러나 역시 테르미도르 반동 쿠데타 당시 대다수 민중을 위한 ‘공포정치’의 주역이었던 자코뱅파 로베스피에르의 ‘비극’이 1848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소시민적 사회주의자 루이 블랑의 ‘희극’으로 반복된다.
대다수 프롤레타리아의 지지로 세워진 임시정부가 정치적 타협과 정쟁으로 대다수 민중의 요구를 배신했을 때 같은 해 6월 대규모 반란이 다시 일어나지만 대동단결한 왕정복고주의자, 부르주아지, 소시민 민주파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철저히 패배당하게 되는데, 대혁명기의 좌파 ‘산악당’의 ‘비극’이 2월 혁명기 ‘산악당’의 ‘희극’으로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역시 ‘희극적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3세였다. 자기계급 이익을 위해 공화정 가면을 쓰고 왕정복고의 흑심을 숨긴 부르주아지도, 혁명가인 척 하는 프티 부르주아를 대표로 내세운 결과 전혀 혁명적인 힘을 갖지 못하게 된 프롤레타리아트도 해당 시기의 지배계급이 될 수 없는 무능력한 상황에서 ‘부랑자, 거지, 퇴역군인 등의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를 앞세우고 군대를 장악한 조카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이후 의회와 민중들을 계속 기만하고 배신하는 과정에서 그는 결국 1852년 황제의 관을 억지로 머리에 얹은 채 프랑스 ‘제2제정’을 열게 된다. 삼촌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비극’이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희극’으로 반복된다.
이 시기 자본주의 발전의 법칙에 의해 자본이 팽창하면서 주변국들과의 지속적인 전쟁을 하게 되었고 더 이상 이를 참다 못한 프랑스 민중은 다시금 들고 일어나 1871년의 ‘파리 코뮌’을 건설함으로써 보나파르트 ‘제2제정’은 무너진다.
자본주의 역사발전의 법칙 속에서 정치체제는 ‘비극’에서 ‘희극’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 속에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환경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현세대는 자기자신과 만물을 개조하고 이제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무엇인가를 창출해내는 데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도, 바로 그와 같은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도, 그들은 자기의 일을 도와달라고 노심초사 과거의 망령들을 주술로 불러내며, 이 망령들로부터 이름과 전투구호와 의상을 빌려 이 유서 깊은 분장과 차용한 언어로 세계사의 새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 K. Marx,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제1장 중.
‘브뤼메르 18일’은 나폴레옹 1세가 황제로 등극한 1799년 11월 9일을 나타내는 공화력이라고 하는데 ‘희극적’으로 반복되는 역사적 사건을 목격한 맑스는 ‘브뤼메르 18일의 재판(再版)’ 과정을 정리함으로써 자본주의 역사에서 국가 정치체제의 구체적 실현체를 기록하게 된다. 이 저서가 바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다.
맑스는 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통해 ‘케사리즘(Caesarism)’이라는 ‘교과서적인 단어’를 없애버리는 데에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1869년의 제2판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케사리즘’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 중 1933년의 기록에 따르면, ‘갈등하는 세력들이 파국적인 방식으로 상호 균형지우고 있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논쟁적·이데올로기적 표현이지 역사해석의 기준은 아니다’라고 하는 바, ‘케사리즘에서 모든 새로운 역사현상이 오로지 기본적 세력들만의 균형에 의해 생긴다고 생각한다는 그것은 방법적 오류’로서 ‘기본적 계급들로 이루어지는 중요한 집단들과 그 집단들의 헤게모니적인 영향에 의해 지도받거나 종속되어 있는 보조적인 세력들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도 고려해야’ 하므로 ‘프랑스의 군사적 집단과 농민의 기능을 연구하지 않고는 1851년 12월 2일의 쿠데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람시에 따르면 ‘그러한 세력들이 역사적으로 유효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내재적인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세력들의 적의 무능력에 의한 것’이다.
맑스에 의해 역사 속에서 ‘계급균형’을 가장한 파시즘은 ‘케사리즘’이 아닌 ‘보나파르티즘’이 되었다.
이제 이 ‘희극’과도 같은 ‘보나파르티즘’에도 불구하고, 맑스에 따르면 ‘혁명은 자신의 과업을 일정한 방식에 따라 수행한다’.
1849년 12월 10일 보나파르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힘은 프랑스 대다수 국민을 차지하고 있던 ‘분할지 농민’들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노동자, 농민, 영세자영업자 등의 대다수 ‘분할된 민중’들이 군부독재 유신의 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듯.
"... 보나파르트는 한 계급을 그것도 프랑스 사회에서 수적으로 가장 많은 계급인 분할지 농민을 대변하고 있다. 부르봉가(家)가 대토지 소유자들의 왕조였고 오를레앙가(家)가 화폐소유자들의 왕조였듯이 보나파르트 왕조는 농민, 즉 프랑스 인민대중의 왕조이다… 1848년 12월 10일 선거는 1851년 12월 2일 쿠데타에 의해 비로소 성취되었다…"
- K. Marx,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제7장 중.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다시 한 번 발견하는 역사적 유물론의 진리는 ‘역사의 필연’이다. ‘일정한 방식에 따라’ ‘자신의 과업’을 수행하는 역사발전의 필연인 것인데,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행정권력을 장악한 루이 보나파르트는 과도한 세금으로 국가권력을 강화하면서 자신을 지지해준 대다수 ‘분할지 농민’들의 욕망을 배신하고 공화정 가면 뒤에 숨은 왕정복고주의자인 대부르주아지들을 기만하면서 ‘황제의 길’을 ‘희극적’이게도 묵묵히 가게 된다. 20세기에 대다수 민중을 압살하면서 동시에 자본을 탄압하기도 했던 ‘아버지 대통령’의 ‘비극적’인 길을 따라 21세기에 ‘잘 살아 보세’ 또는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는 ‘딸 대통령’의 ‘희극적’인 길이 다시금 열렸듯.
그러므로 이러한 시공을 초월한 ‘희비극’의 반복은 계급적으로 조직되지 못한 우리 대다수 민중의 ‘무능력’이 불러온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한 자루 분량의 감자들이 모여 한 자루의 감자를 이루듯이 프랑스 국민의 거대한 대중은 똑 같은 크기를 단순히 더함으로써 형성된다. 수백만의 가구가 자신의 생활 양식, 이해 관계, 문화를 다른 계급의 생활 양식, 이해 관계, 문화와 구별지으며 그것에 대해 적대적으로 대립하게 하는 경제적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한, 그들은 하나의 계급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들 분할지 농민들 사이에 단순한 지방적 연계만이 있는 한, 그리고 그들간의 이해의 동질성이 그들간에 어떠한 공통성이나 전국적 결합, 정치적 조직 등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그들은 계급을 형성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의회를 통해서나 국민공회를 통해서나 간에 자신의 이름으로 자기계급의 이해를 관철시킬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고, 누군가에 의해 대표되어야 한다.
… 그러나 오해는 없도록 하자. 보나파르트 왕조가 대변하는 것은 혁명적 농민이 아니라 보수적 농민이다. 분할지 경작이라는 자신의 사회적 생활 조건을 박차고 일어나는 농민이 아니라, 자신의 분할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농민, 도시와 연계하여 새로운 힘으로 구질서를 타도하고자 하는 농촌의 민중이 아니라 반대로 무감각하게 구질서 속에 갇혀 자신과 자신의 보유지를 제국의 유령에 의해 보장받고 축복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변한다. 보나파르트 왕조는 농민의 계몽이 아니라 농민의 미신을 대변하고 농민의 건전한 판단이 아닌 편견을, 미래가 아닌 과거를… 대표한다."
- K. Marx,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제7장 중.
19세기의 프랑스에서 맑스의 결론은 이렇다.
농민의 이해는 ‘비극적’ 나폴레옹의 ‘제1제정’과 달리 그 ‘조카’인 나폴레옹3세의 지속적인 사기와 배신에 의해 자본의 이해와 상충함으로써 ‘부르주아 질서의 타도를 외치는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자신의 자연스러운 동맹자요 지도자로 여긴다’는 것이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치환해 보자.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약속하는 사기극을 통해 ‘희극적’으로 반복된 ‘여왕 파시즘’은 결국 계급으로 조직되지 못한 국민, 시민, 민중들을 배반할 것이며, 이 제정(帝政)과도 같은 파시즘을 만들어준 대중들은 결국 새로운 세상, 더 나은 세상을 스스로 외치게 될 것이라고.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1848년 2월 혁명에서의 계급투쟁을 다룬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과 보나파르티즘을 무너뜨린 1871년 파리 코뮌을 상세히 다룬 [프랑스 내전]과 함께 ‘프랑스 혁명사 3부작’으로 통칭되고 있다.
(2013년 2월)
-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칼 마르크스, 임지현/이종훈 옮김, <소나무>,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