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한살 아들을 '국가'에 바치다
'국가'란 무엇인가
- 2026.3.4. 스물한살 아들을 '국가'에 바치다
예정된 시간이 왔다.
전날 늦은 밤에 전북 익산에 도착하여 다음날인 2026년 3월 4일 수요일 아침에 아들이 육군부사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버지로서 나는, 내가 살아온 50년의 이야기를 전부 다 해주고 말겠다는 듯 끊임없이 아들에게 '교훈'을 남기고자 했다. 남자로서 살아남기 위한 자세와 관점 그리고 인간관계들. 정답은 없지만 이 사회를 먼저 살아본 경험으로 좋았든 싫었든 모든 이야기를 다 해줘야 한다는 듯이 전방위적으로 설을 풀어대었다.
한편으로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도 그 선택들이 과연 또 다시 그러할지, 그 시절 나의 선택이 과연 옳았던 것인지 알 수 없기에, 현재의 나에 맞춰서 과거의 선택들을 합리화하지 않으면 지금의 내 정체성에 위기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모종의 두려움 때문에 군입대를 앞둔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먼저 산 남자로서 줄창 이야기를 해대었다.
1995년 10월 10일에 의정부 102보충대로 일반 사병입대한 나는 당시의 전통에 따라 입대를 3개월 남긴 채 아직 사회에 남았던 친구 승협이가 배웅을 해줬다. 괜한 감상이 싫었던 스물두 살 당시의 나는 부모님은 따라오시지 말라고 했고, 아침 일찍 큰절을 받은 아버지는 출근을 하셨으며 어머니는 전철역까지만 따라오셨더랬다. 나는 승협이와 의정부 어딘가의 오락실에서 테트리스를 한 판 했고 5개월 전 먼저 입대한 친구 철호로부터 물려받은 야구모자를 역시 당시의 전통에 따라 홀로 남은 승협이에게 주고는 보충대로 들어갔다. 승협이가 그 모자를 쓰고 입대했을지는 모르겠다.
입대 전날 조신하게 어둑한 내 방에서 책이나 읽고 있던 내게 나의 아버지는 긴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다만, "군대란 멀쩡한 사람 그냥 놀게 두지 않고 끊임없이 뭔가를 시키는 곳"이라는, 당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이야기를 해주셨던 것만 오래 기억에 남았다. 평상시에도 부대 흙바닥에 싸리비로 쓸어낸 자국이 있는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눈물이 날 줄은 몰랐다.
빡빡이 아들이 큰 가방을 들고 부모의 손을 놓고 떠나갈 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
먼저 눈물을 찍어대던 아내 은미가 휴지를 건넸고 나는 익산 실내체육관에 정렬한 육군부사관 후보생들이 관객석에 남은 부모들에게 큰절을 하는 순간까지 눈물을 찔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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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 상주로서 내가 눈물을 보이면 다른 유족들이 더 슬퍼할 것 같아서 염을 하며 아버지를 쓰다듬을 때도, 마지막 화장의 순간에도 참았다.
아들 가는데 괜한 눈물바람 말라며 처에게 엄포를 놓고는 시종 아들에게 쾌활한 척 떠들어 제끼던 내가 막상 처에게 받은 휴지 조각으로 눈물을 찍어낼 줄 몰랐기에, 아들을 보내는 내내 생각했다.
내가 왜 울었을까.
아들이 만약 공부를 좀 해서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하여 떠난다 해도 그랬을까.
오래전부터 가고 싶어했으나 면접에서 떨어졌다던 특전사 입대를 했어도 그랬을까.
18개월 후 집으로 다시 돌아올 일반 사병 입대였어도 과연 그랬을까.
실력이 모자랐건 운이 따르지 않았건 아마도 작은 실패를 겪었을 스물한 살의 아들이 마지막 갈 곳이라고 찾아 나선 곳이 육군부사관학교였을 거라는 내 지레짐작 때문이었을는지 모르겠다.
아들은 4년 이상 복무하다가 여차하면 직업군인으로 말뚝박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하사관 지원을 했고,
나는 그렇게 내내 속물적 아버지로서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들을 보았던 거였다.
어쩌면, 입대 전날 오후 반차를 내고 집에 들어섰을 때, 백만 년 동안 치우지 않던 2층 제 방을 깨끗이 정리하고는, 할 일 없이 1층 거실에 홀로 누워 낮잠을 자던 빡빡이 아들의 모습을 보았던 그 순간부터 나는,
아마도 속으로 이미 눈물을 삼켰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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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지금의 아들 나이였던 이십대 초반의 내게 '국가'는 '계급지배의 도구'이자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지의 의지를 실행하는 '위원회'에 불과했다. 그저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일 뿐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원초적 '국가론'의 신봉자였다. 그래서 스물두 살의 나는 '노동계급의 아들'로서 군대에 끌려갔다 생각했고 26개월 내내 이 '공권력'에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진심 못한 게 아니고 자발적으로 안했다. 그랬던 나는 병장 말년에 군기교육대를 다녀왔고 전역 후에도 동고동락했던 입대동기들과 매정하게 연락을 끊었다.
당시의 나는 국가권력이 싫었고,
공권력으로서 군대가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삼십 년이 지난 후 내 아들은 달랐다.
어려서부터 공부에는 취미가 없이 운동을 좋아했고, 중학생 시절부터 소방관과 특전사를 꿈꿨으며, 결국 스물한 살에 육군 하사관을 지원했다. 아버지인 내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길이었다. 세상 유일한 내 아들이지만 나와는 정반대였다. 내 아들 민규는 소방관을 꿈꾸며 전문대학의 관련 학과에 입학했지만 적응을 하지 않고 특전사를 지원했다가 마지막 면접에서 떨어지고는 바로 접고 육군부사관학교에 지원입대한 거다. 거의 매일 밤 늦게까지 게임을 하거나 새벽에 집에 들어오고 다음날 낮까지 늦잠을 자면서 나의 잔소리로 단련되었으나, 본인도 그런 생활이 이제 지겹다며 빨리 군대로 들어가고 싶다던 아들이었다.
그렇게, 내 아들은 '국가'가 부르기 전에 스스로 '국가'를 찾아 떠났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금 '국가'란 무엇인가,
생각을 한다.
지배계급의 여전한 계급지배 도구인가.
가족과 혈연이라는 구체적 삶을 초월하면서 추상적이지만 힘을 지닌 실체적인 공동체인가.
그로써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하는 궁극의 권력형태인가.
다수의 생활을 평등하게 해줄 '복지국가' 또는 '사회적 국가'의 길은 여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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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세상의 복잡한 대상을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제 나도 안다.
'국가' 또한 그렇다는 것을.
그나마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국가'가 군사독재나 수구보수세력의 쿠데타 내란정권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쨌거나 다행으로 생각하며,
이십년 동안 기른 스물한 살의 아들을,
적어도 처음 십년 이상 동안 기꺼이 아빠의 최고 절친이 되어 주었던 그 아들을,
그렇게 '국가'에 바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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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공부란 무엇인가" 하고 묻던 김영민 교수처럼 계속 자문을 해댄다.
'국가'란 무엇인가.
'아버지'란 또 무엇인가.
'아들'이란 과연 무엇인가.
(2026년 3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