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 철학
'상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 철학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사회주의와 같은 거대한 시도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전면적 파악이 가능하다는 대단한 믿음 위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실패는, 단순히 어떤 정치적 청사진이 몰락하는 사건을 넘어, 현실을 전면적으로 파악한다는 일이 많은 이들에게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다가오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산한 것은 현실이라기 보다는 현실을 냉정히 파악하고 기획하고자 하는 태도다...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관념론자가 되어야 하고, '살기 위해서는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반영웅으로서 영웅, 관념론자로서 유물론자, 죽은 자로서 살아있는 자 : 고스트 독>, 김영민, 2001.
인류는 어떠한 시련에 닥쳐도 꿈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덩치큰 다른 종에 밀려 밀림을 떠나 초원으로 나왔던 600만 년 전에는 먹고살기 위해 두 발로 서서 손을 사용했고, 어쩌다 얻어걸린 생고기를 소화시키느라 시간낭비를 하는 대신 '불'을 찾아 화식을 하고는 덩치큰 종들이 쫓아오기 전에 얼른 자리를 떴다. 70만년 전에는 직립 후 자유로워진 손으로 도구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노동'을 했으며, 1만년 전부터는 아예 다른 종들을 쫓아내고 떼거지로 모여 살았다. '공동체' 또는 '사회'의 시작이다. 이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말'과 '글'을 만든 인류는 자신들의 고난과 혁신과 미래를 '꿈'으로 만들어 대대로 전승해 왔다. 이를 통해 사람은 있는 것을 지키는 '보수'도 꿈꾸고, 조금씩 바꾸는 '개혁'도 꿈꾸며, 아예 뒤집어 엎는 '혁명'도 꿈꿔왔다.
'적응'과 '혁신'이라는 양면성이 '사피엔스'의 생존비결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말'과 '글'을 통한 '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으로 2018년에 '칼럼계의 아이돌'로 부상한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의 에세이집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2018)를 며칠전 추천받았을 때, '나는 에세이는 읽기 싫은데'라는 속마음과는 달리 "너무 잘 쓴 글이라 읽고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보다 나이가 많고 액면으로는 나보다 지혜로워 보이는 군대 후임 이재환 병장 형님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래도 '에세이'는 여전히 싫어서 같은 저자의 [공부란 무엇인가](2020)라는 제목의 아마도 '에세이'는 아닐 것 같아 보이는 책과 함께 구입했고, 잘난체 하려는 나는 [공부란 무엇인가]부터 펼쳐들었다.
그랬더니 역시 '에세이'를 엮은 것 같은 [공부란 무엇인가]에 초반에 잠시 실망하며 서울대 교수면 교수지 대체 얼마나 공부를 했기에 "공부란 무엇인가?" 대놓고 묻는가 싶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짜 책을 많이 읽고 공부도 엄청나게 했을 이 '(정치)사상사 연구자'의 '무엇이란 무엇인가?'라는 일련의 질문은, 그 '무엇'을 '내가 잘 아니 이리와봐 알려줄게'가 아니라 이 세상이 그 '무엇'으로 부르는 '상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이었다. 200여 년 전 독일 철학자 헤겔이 "철학은 상식과 다르다"고 했듯이 시대의 사상가 김영민 교수 또한 우리가 '적응'해서 알고있는 '상식'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대놓고 제기하고 있었다. '공부란 무엇인가?', '추석이란 무엇인가?', '독서란 무엇인가?', 서평이란 무엇인가?'... 세상 모든 '상식'에 대한 그의 '철학'적 질문은 사피엔스의 역사만큼이나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아마도 아침 댓바람부터 '죽음'을 생각하라는 저자의 주장 또한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삶에 관한 또 하나의 철학적 질문을 하라는 권유였을 거다. '삶'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실존주의 철학일지 아니면 '죽음'이라는 '음'이 없다면 '삶'이라는 '양'도 없다는 서양의 헤겔식 '변증법'이나 동양의 도가적 '음양오행' 또는 유가적 '무극이태극'일지 모르지만 '죽음'을 '철학'적이고 근본적으로 사색하지 않으면 '삶' 또한 '상식'에 머물고 만다는 사상가의 깊은 통찰로 읽힌다. '죽음'이라는 미래로 가는 '삶'의 길에서 '상식'이라는 이름의 만물을 다시 돌아보는 작업은 그 '상식'들에 대한 끝없는 근본적 '질문'을 필요로 한다.
아마도 '혁명'이라는 거대한 현실의 정치적 기획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본 저자는 인간세상에서 "총체적이고 현실적인 비전으로 번역"하는 그 거대한 기획의 파산을 통해 산산히 흩어져가던 '상식'들에 주목하게 되었을 것이다. 1998년에 영화평론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한 작가이기도 한 저자는 2001년에 이미 <고스트 독>이라는 영화평론글에서부터 '죽음'을 전제로 한 '삶'에 관한 통찰을 썼다. 그리고 2015년에는 심지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도발로 이어가더니 이윽고 2018년 즈음에 이르러 "언제 결혼하니?"라고 묻는 당숙의 추석 안부말의 면전에다가 "당숙이란 무엇이며, 추석이란 무엇인가?" 대놓고 반문하라 권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언뜻 뜬금없어 보이는 이 질문들은 저자가 여러 번 표현하듯 답답하고 열받아 "테이블을 당수로 쪼개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목젖을 뽑아 줄넘기를 한 다음에 창문을 온몸으로 받아 깨면서 밖으로 뛰쳐나가기"라는 현실도피 대신에, 세상의 온갖 '상식'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그 근원에 대해 침착하게 반문하며 결국 세상을 조금씩이나마 새롭게 혁신하자는 위대한 '철학'의 길인 것이다.
더디고 돌아가기도 하며 간혹 진창에 빠지거나 제 얼굴에 침을 뱉을지도 모르는 이 질문의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그래도 인류답게, 사피엔스의 후예답게 품위를 지키려면 이 길 밖에 없다. 이것이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philosophy;哲學)이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인문학(humanities;人文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인간'으로, 존재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침을 열면서 공동체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일단 실제로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이미 죽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부고는 늘 죽음보다 늦게 온다... 이러한 시절에 아침을 열 때는 공동체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첫째, 이미 죽어있다면 제때 문상을 할 수 있다. 둘째, 죽음이 오는 중이라면, 죽음과 대면하여 놀라지 않을 수 있다. 셋째, 죽음이 아직 오지 않는다면,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보다 성심껏 선택할 수 있다. 넷째, 정치인들이 말하는 가짜 희망에 농락당하지 않을 수 있다. 다섯째, 공포와 허무를 떨치기 위해 사람들이 과장된 행동에 나설 때, 상대적으로 침착할 수 있다. 그렇게 얻은 침착함을 가지고 혹시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과 이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는거다."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2015.
학자도 아니도 서울대학교 신입생은 더더욱 아니며 글쟁이는 아니지만 서평과 소설을 쓰고 싶은 나로서는, 김영민 선생이 묻고 알려주는 [공부란 무엇인가]에 대해 100퍼센터 응답하기는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름의 관심사를 쫓아 '독서란 무엇인가?'와 '서평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저자 나름의 답변의 문장들은 옮겨 적어봐야만 할 것 같다.
"사회로부터 도망하기 위해 책을 읽다가 거꾸로 소통을 위한 언어가 풍부해지는 역설이 독서행위에 있다."
- [공부란 무엇인가], <3-3. 정신의 날선 도끼를 찾기 위하여 - 독서란 무엇인가?>, 김영민, 2020.
원래 좀 튀고 싶고 잘난체 하고 싶었는데, 아쉽게 잘나지도 못하고 말도 잘 못하는 내가 찾은 것이 '책'이었다. 독서를 하면 다른 걸 잊을 수 있었고 조금은 똑똑해진다고 착각도 되어 더욱 파고들었다. 나한테도 '역설'은 생겼다. 사람들을 만나 할 말이 많아졌고 심지어는 말할 기회를 안주면 남의 말을 끊고라도 내 말을 하고 싶어졌으며, 잘 쓰지는 못해도 '글쓰기'가 어느새 개인적 취미가 되어 버렸다. 다른 이들이 나를 보기에는 어떨는지 몰라도 나 스스로는 '소통'의 기제가 독서였고, 나 혼자 생각이지만 '언어도 풍부'해졌다. 저자가 말한 '독서'의 '역설'을 나는 200퍼센트 이상 동감한다.
있는 척 해보려고 두껍고 어려운 '고전'들을 읽으니 얇고 가벼운 책을 읽는 것은 저자의 말마따나 진짜로 '휴식'이 되었고, 어려운 책들을 읽어나가는 극복의 과정은 '자기갱신'의 '공부'라는 저자의 가르침도 실감했다.
나는 이제 '책'을 놓고는 어디에도 못 간다.
사실 나는 독서를 많이 하고 난 다음에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소질이 없어 그나마 읽은 책을 정리하면서 독후감을 써놓았고 혼자 '서평'이라 불렀다. 에릭 홉스봄이 지난 세기 역사를 서술하면서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돌아본 것처럼, 김영민 선생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책"에 대해 말하는 '서평'에 대해서도 '서평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하고 있다. 영화평론작가이기도 한 김영민 선생에 의하면 '서평'은 단순한 책의 요약이나 느낌을 남기는 '독후감'과는 달리 그 책이 전하고자 의도했든 아니든 그 '맥락'을 전달하기도 해야하고 더 나아가 해당 '서평' 나름의 '문체'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즉, '추천사'나 '출판비평'과 달리 소개하려는 책과는 별개로 하나의 '작품'으로서 독립된 '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과는 별개로 '문학비평' 자체가 하나의 '작품'인 것처럼 말이다. 역시 영화 '제작자'가 아닌 영화 '평론가'다운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지력, 매력, 멍청함, 편견 등"을 드러내는 줄 알지만 '서평'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소설'은 못 쓰더라도 '작품'은 언젠가 쓰고 싶기 때문이다.
"어떤 책을 비평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비평의 독자가 꼭 그 비평대상이 된 책의 저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책의 저자에게는 말조차 걸고싶지 않아도, 광의의 독자에게 말을 건내기 위해서 서평을 쓸 수도 있다... 서평은 서평의 대상이 된 책 뿐 아니라 서평자 자신의 지력, 매력, 멍청함, 편견 등을 대대적으로 홍보할 좋은 기회다."
- [공부란 무엇인가], <3-4. 하나의 전체로서 책에 대해 말하기 - 서평이란 무엇인가?>, 김영민, 2020.
'에세이'는 싫어하지만, '상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날리는 김영민 선생의 글을 읽은 후 결국 나는 저자의 의도든 아니든 걸려들고 말았다. '사상사 연구자'인 김영민 교수의 '본업'을 담은 글이 궁금해졌다.
다음 책으로 그의 [중국정치사상사](2021)를 읽고 싶어진 거다.
초반 몇 장을 읽다가 졸음이 몰려와 '죽기 전에 꼭 다 읽어야지~' 하면서 중간에 덮은 20세기에 나온 E.K.헌트의 [경제사상사]가 책장에서 먼지만 덮어쓰고 있는데, 그 옆에 [정치사상사]가 한자리 더 차지하지 않을까 짐짓 염려가 되기도 하지만.
그냥 눈감고 주문한다.
( 결국, 주문했다. )
https://brunch.co.kr/@beatrice1007/269
( 결국, 읽었다. ^^* )
https://brunch.co.kr/@beatrice1007/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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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어크로스>, 2018.
2. [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어크로스>, 2020.
https://m.blog.naver.com/beatrice1007/222716186233?afterWebWrite=tr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