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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Apr 23. 2022

[난세의 리더, 조조](2013) - 친타오

조조, 시대를 초월한 '난세의 영웅'

조조, 시대를 초월한 '난세의 영웅'

- [난세의 리더, 조조], 친타오, 2013.





"한나라 말기는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영웅호걸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 중에서 원소는 네 주를 근거로 하여 호시탐탐 노렸으며 강성함은 대적할 자가 없었다. 태조(조조/위무제)는 책략을 이용할 계획을 세워 천하를 편달하고, 신불해와 상앙의 치국 방법을 받아들이고, 한신과 백기의 기발한 책략을 사용하여 재능있는 자에게 관직을 주고, 사람마다 가진 재능을 잘 살려 자기의 감정을 자제하고 냉정한 계획에 따랐다. 옛날의 악행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마침내 국가의 큰일을 완전히 장악하고 대사업을 완성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오직 그의 명석한 책략이 가장 우수했던 덕분이다. 따라서 그는 '비범한 인물'이며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 [삼국지], <위서>, '무제기-評曰', 진수, 3세기.



'치세(治世)의 능신(能臣),

난세(亂世)의 간웅(奸雄).'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에서 조조(曹操)를 평가한 문장이다. 주지하다시피 원말명초 시기에 몽골족의 압제에 맞서 중국 한(漢)족의 독립투쟁에 가담했다던 나관중은 고대 중국 한나라의 정통성을 복원하기 위해 '춘추필법'에 따라 한나라 유씨 왕조 후손을 자처했던 촉한의 유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따라서 유비의 최대 맞수 조조는 교활하고 간악한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오랫동안 우리에게 전해진 조조의 이미지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중국 4대 정사'인 [사기], [한서], [삼국지], [후한서] 중 가장 문장이 유려하다는 범엽의 [후한서]의 <허소전>은 후한말 당시 인물평의 대가였던 유학자 허소가 아직 관리가 되기 전의 부잣집 건달 조조의 협박에 못이겨 "그대는 태평한 시대에는 간적(奸賊), 혼란한 시대에는 영웅(英雄)이 될 것"이라고 내린 평을 조조가 듣고는 크게 웃으며 돌아갔다고 전한다. 사실의 기록은 [후한서]가 맞을 것인데, 유비의 주적인 조조를 폄훼하려는 [삼국지연의]는 손성이 쓴 [이동잡어]의 설을 채택하여 조조를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또는 간적'이라 전한다. 어쨌든 중국의 문호 루쉰이 "세상의 어떤 잣대로 평가해도 문무를 겸비한 '최소한의 영웅'이었다"고 평가한 조조는 이 '최소한의 영웅'이 되었으니 크게 웃으며 돌아간 것이다. 중국 역사가 이중톈이 [삼국지강의(品三国)]에서 말했듯 조조는 '최소한의 영웅(英雄)'이면 되었지, '간사하든(奸雄)' 아니면 '능력있든(能臣)'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92


위-촉-오 삼국 중 조조가 세운 위나라를 무너뜨리고는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서진(西晉)의 학자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는 위나라 무제 조조의 열전인 <위서-'무제기'> 말미에서 "평하여 말하기(評曰)"를 "비범한 인물이며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라 할 수 있다"고 남겼다.


'간'이든 '능'이든 신경쓰지 않고 '최소한의 영웅'이면 족했을 난세의 '실용주의자' 조조가 여전히 '72개 가짜무덤(의총)' 중 어딘가에서 크게 웃고 있다.





"사실 조조가 태어날 때부터 난세의 간웅이었던 것은 아니다. 세상이 깨끗하고 공정했다면 그 역시 정상적으로 훌륭한 신하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조조의 인생은 그 자신이 선택한 결과였지만 모든 선택은 그에 합당한 배경이 있기 마련이다."

- [난세의 리더, 조조], <5. 삼기삼락>, 친타오, 2013.



2017년에 [노모자사마의(老謀子司馬懿)]를 통해 음흉하고 복잡다단한 인물 사마의를 후한말 난세가 낳은 극단적 '개인주의자'로 평가했던 중국의 법사학자 친타오는 이미 2013년에 [흑백조조(黑白曹操)]라는 책으로 조조를 '72가지 얼굴'을 지닌 '실용주의자'로 평가했다. 국역으로 '더봄' 출판사 '평전시리즈'로서 '평전 시리즈-1' [결국 이기는 사마의](2018)와 '평전 시리즈-3' [난세의 리더, 조조](2022)로 각각 출간되었다.

참고로 여담이지만 '평전 시리즈-2'는 [제왕의 스승, 장량](위리, 김영문 옮김)인데 내가 좋아하는 인물 장자방의 흔치 않은 평전이라 나 개인적으로는 제일 재미있게 읽었다.



하긴 위나라 관리이자 조조의 후계자 조비의 참모였고 촉한의 명재상 제갈량을 이기고 결국 맞수 제갈량이 없어지자 내부로 칼을 돌려 자신이 섬기고 있던 위나라를 멸망시킨 사마의를 평가함에 있어 그의 대선배 조조를 빼놓을 수는 없다. 후한말 난세가 배출한 전형적 '개인주의자'였던 노련한(老謀子) 사마의(司馬懿)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를 없애고 사마씨 아들과 손자로 하여금 새나라를 세우도록 판을 깔았지만, 명목상으로는 삼국 중 위나라를 '계승'했다고 선전했다. 사마의가 평생 경외했던 유일한 존재가 바로 조조였기 때문이다. 조조의 가문이 한나라 유씨 왕조로부터 선양을 받았듯, 진나라의 사마씨 가문 또한 위나라의 조씨 왕조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후한말 극단의 '개인주의자' 사마의는 난세의 대선배인 극단의 '실용주의자' 조조를 유일하게 두려워 했다.

불가능한 가정이겠지만, 조조와 사마의가 동년배였다면 승자는 조조였을지도 모른다.


[조조 평전]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장쭤야오가 2000년도에 쓴 것이 있다. [난세의 리더, 조조]의 저자 친타오도 장쭤야오의 책을 참고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친타오는 장쭤야오처럼 장대한 정치경제학적 방식이 아닌 테마를 중심으로 한 대중적 서술로써 조조를 쫓아간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1


부잣집 환관 가문의 유협 건달(1-난세의 악동)에서 15 태학생 시절 겪은 '당고의 '(2) 여파, 효렴이지만 환관 가문의 배경으로 출사한 벼슬직에서 세번이나 물러난 경력(5-'33'), 여백사 일가족 인사건인 '착방조의 진실'(6) 물론 원소와의 건곤일척 '관도대전'(10) 황제를 등에 업고(8) 시대의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12-'명법의 ' 13-'인재 모집령')하며 결국 '선양' 형식이지만 본인 방식으로 '혁명' 대업을 이룬 조조의 (15-대단원의 ) 조명한다.


장쭤야오는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의 평가인 '법가'와 '병가'의 정치인 조조에 유학의 '천명'과 '성리'를 투과하여 결론적으로 '유가'로서의 조조를 평전한다. 그에 의하면 조조는 난세에 환관 가문 출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면서 본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정치에 적극 투신했지만, 한편으로는 민중들을 안정시키고자 권력을 쥐고 개혁을 실시한 정치인으로서 '성리'를 현실에 조화시키려 한 그 나름의 정치이력을 통해 결국 낡고 부패한 구체제를 뒤집고 새로운 왕조를 열어 '천명'을 실현한 현실 정치가였던 것이다. 물론 조조의 '천명'은 '인의예지' 같은 높은 덕목이 아니라 지극히 '실용주의'에 입각한 현실정치였는데, 유학이나 성리학의 특징은 신을 모시는 관념적인 종교의 영역보다는 사람을 우선으로 하는 현실정치를 중시한다는 지점이고 장쭤야오가 조조에게서 뜬금없이 '유가'적 측면을 끌어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조조는 한고조 유방이 초한전쟁를 시작하기 전의 '법삼장'에서 시작했지만 400년간 왕조가 이어지며 복잡하고 방대해진 한나라 법률을 단순화시킨 '명법의 치'를 세웠는데 사례마다 매번 새로운 규정이 신설되는 대신 일련의 포괄적인 규칙들이 서로 연결되어 신설법 없이 탄탄하게 돌아가게 만드는 이 방식은 이후 왕조 법령들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조조 자신도 젊은 시절 '평판'에 매달려 허소를 칼로 협박하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 환관 집안 유협건달을 멸시하던 유학자들에 대한 반발심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난관을 헤치고 '황제를 등에 업은' 최고 권력자가 된 조조는 세차례의 '인재 모집령'을 내려서 '평판'보다는 '능력' 중심의 인재를 중시한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하였는데, 실제로 이 인재 모집령으로 등용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원래부터 실시되어 왔던 조조의 인재 모집 원칙을 더욱 공고히 밝히기 위한 반복적 선언에 불과했다. 후한말 인재들 출사의 원칙을 가문이나 허울좋은 평판이 아닌 '실용'적인 '능력'에 두었던 것이다. 뜬구름 잡는 '현학'이 사상계를 지배하며 허위적 풍류를 쫓던 후대 '위진풍도(위진풍류)'의 유래는 후한말의 이 난세였는데 당시는 유학이 장려하던 '충효'의 덕목을 지키기 위해 사기는 물론 복수와 살인까지도 불사하던 행태가 만연했다고 한다. 조조 또한 이러한 시대가 낳은 아들이었지만 그의 '비범함'은 시대에 편승하기보다는 이를 극복하고 혁신하려는 노력에서 나온다. 후한말 난세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조조가 다양한 '능력'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용인술(用人術)'의 대가였다는 평가는 보편적이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213


물론, 조조가 펼친 이 난세의 '용인술'이 치세에도 맞았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난세의 영웅'(허소)일지 '난세의 간웅'(손성/나관중)일지 알 수 없는 '72가지 얼굴'의 조조가 '치세의 간적'(허소)일지 '치세의 능신'(손성/나관중)일지 어찌 알겠는가.





"72기 의총은 사실이 아니지만, 조조에게는 72가지 얼굴이 있다."

- [난세의 리더, 조조], <16. 사후 미스터리>, 친타오, 2013.



아무튼 이토록 난세의 최강 능력자인 '실용주의자' 조조에 대해서는 그가 죽은지 1,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갖가지 평가가 난무한다. 그래서 저자 친타오는 조조의 흑색에서 백색까지 조명한다는 의미에서 짧은 평전의 제목를 [흑백조조]로 하였을까. 결국 "매우 다양하다"는 진부하면서도 불가피한 결론이지만, 선배 역사학자 장쭤야오처럼 고전적이며 전형적인 방식의 통시적 평전이 아닌 테마를 중심으로 한 어느정도 공시적이고 간략하며 그로 인해 더욱 대중적인 평전을 시도한다.


난세에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조조가 사후 무덤이 파헤쳐질 것을 우려하여 '72개의 가짜무덤(의총)'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실용주의자' 조조는 소박한 무덤을 지정하고 장례도 간소하게 하며 금은보화를 부장물로 무덤에 묻지 말라고 유언했다. 후한말과 삼국시대의 허위의식은 수많은 재화들을 경쟁적으로 시신과 함께 순장시키면서 실물경제를 바닥치게 만들 정도였다고 하니 '비범한 인물'이자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며 시대의 경세가였던 조조가 이에 편승했겠는가.


"내가 천하를 버리는 한이 있어도 천하가 나를 버리게 하지는 않겠다"하지도 않은 말로 평가의 기준이 되기도 하고, "죽어도 남의 손에  목숨을 맡기지 않겠다" 당대의 명의 화타까지도 죽인 의심의 달인이었으며, 있지도 않은 '72 의총'으로 교활함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지만, 욕을 먹든 말든 '72가지 얼굴' '실용주의자' 영웅 조조는 죽는 순간까지 시대를 바꾸고자 했던 것이다.


'3의 배수'인 '72가지'는 '36계'와 같은 논리로 '무한대'를 의미한다. 중국에서 '3'은 완벽의 수 단위로서 '3의 배수'는 서로 교차하고 조합하며 무한한 형태로 나타난다. '36계'는 무한한 전략과 전술의 조합이고, 서유기 손오공의 '72가지 도술'은 그 자체로 셀 수 없다는 뜻이다. 조조의 '72기 의총(가짜무덤)'은 그 설 자체가 가짜지만 조조의 '72가지 얼굴'은 이 난세의 '실용주의자' 영웅이 지닌 '무한대'의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다.


***


1. [난세의 리더, 조조](2013), 친타오, 양성희 옮김, <더봄>, 2022.

2. [삼국지 - 위서](3세기), 진수,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

3. [조조 평전](2000), 장쭤야오, 남종진 옮김, <민음사>, 2010.

4. [삼국지강의(品三国)](2006), 이중텐, 김성배/양휘웅 옮김, <김영사>, 2007.

5. [결국 이기는, 사마의](2017), 친타오, 박소정 옮김, <더봄>, 2018.

6.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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