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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Dec 14. 2022

아버지의 마지막 겨울 - 2022.12.

- 49재가 끝났다

아버지의 마지막 겨울





1.


49재가 끝났다.


아버지를 모신 경기도 양주의 수목장 뒷산 불곡산의 단풍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어제 내린 올겨울 첫 눈을 머리에 얹고 있었다.

아버지의 유해와 함께 왔던 늦가을의 공기는 겨울 문턱을 넘어 깊은 입김이 되어 나왔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여든넷 평생을 살다 가신 아버지의 넋을 기리는 방법으로 '삼우제(三虞祭)'와 '49재(四十九齋)'는 올리기로 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어 다음 세상의 몸을 받을 때까지 존재하는 영혼을 중음신(中陰身)이라고 하고, 이 중음신은 49일 안에 다른 몸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망자를 위한 '재(齋)'를 올리고 모두 일곱 번을 치르면서 '사십구재(四十九齋)'가 되었다. 물론 선행공덕을 많이 쌓은 망자는 49일 전에 좋은 세상으로 가서 태어나기도 하지만 늦어도 49일까지는 몸을 바꾸게 되어 있다."

- [사찰 속 숨은 조연들], '1. 명부전을 존상들 - 시왕', 노승대, <불광출판사>, 2022.




불교의 '시왕'은 열 명의 사후 심판관인 '십왕(十王)'이다. 이 중 제일은 염라대왕(閻羅大王)인데 인도 고대신화에서 제일 처음 죽음을 경험한 신 '야마(Yama)'라는 산스크리트 이름을 음역한 '염마' 또는 '염라'가 그 유래란다. 염라대왕은 이 열 명의 심판관 중 중앙인 다섯 번째 관문을 관장하는데 '49재'의 단계로 치면 죽은지 5주째가 된다. [금강경]을 면류관처럼 쓴 염라는 사자의 생을 비추는 업경을 비추며 지난 삶을 반성하게 한단다. 거짓으로 변명하는 자는 옥졸로 하여금 몽둥이 찜질을 가하게 하고 혀를 길게 늘여 소쟁기로 갈아엎는 '발설' 또는 '경설' 지옥을 운영한다. 생전에 거짓과 이간질을 일삼던 자들이 염라대왕의 주요 심판대상이다.

11월 말 5주차에 나는, 마감업무로 인해 서울집에 가지는 못했다. 대신 경기도 오산의 근무지에서 무학에 돈 버는 재주도 없어 평생 가난했지만 그래도 정직했던 아버지가 부디 염라대왕한테 고초를 겪지 않기를 멀리서나마 염원했다.



사후 7주째가 되는 '49재'를 주관하는 시왕은 '태산대왕(泰山大王)'이다. 중국 도교의 영향으로 신선 중 으뜸인 '태산부군'이 일곱 번째 지옥을 관장한다. 여기서 비로소 망자는 윤회의 길을 선택하는데 각자 살아온 업에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문을 열게 된단다. 이 49일간 유족들이 정성을 다해 재계를 하면 망자가 생전 쌓은 업에도 불구하고 좋은 문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나 또한 마지막 7주차 49재를 올리면서 하나뿐인 아들로서 아버지가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빌었다.



불교가 유교와 만나 49재 이후에도 세 명의 시왕을 또 만나는데, 100일째의 평등대왕, 1년째의 도시대왕, 그리고 햇수로 3년상인 만 2년째에 마지막으로 만나는 오도전륜대왕이 그들이다. 즉, 불교의 49재에 유교의 3년상을 결합하여 시왕의 심판도가 완성된다. 태어나 백일을 챙기고 걷기전까지 3년을 품에서 길러준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3년은 추모한다는 보은의 관념인 것이다. 사후세계 확정판결로 지옥 또는 천상 중 하나를 뺀 후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의 4계를 더한 '5도' 중에서 '전륜'이라는 불가의 최고 법도로써 다시 선택을 하게 하여 본격적으로 내세를 정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시왕설' 프로그램의 대단원이다.



아버지는 이제 열 단계 중 일곱 번째인 49재를 지났다. 이제껏 정식 제사는 아니지만 재계에 맞는 마음으로 매주 수요일 가급적이면 근무지인 경기도 오산에서 서울 도봉구 집으로 귀가하여 향을 피우고 막걸리를 따라 올렸다.

이제 수요일의 마지막 49재 막걸리를 올렸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다시는 막걸리를 마시지 않을 작정이다.



2.


"정을 떼려고 그러냐?"


아버지가 흐릿한 눈으로 말씀하셨다.

폐암 말기 진단  1년이 되어가던 10 중순경 안방 침대로 들어가셨다던 아버지는  후로 다시는  방을 스스로의 힘으로 나오지 못했다. 한일병원 정기진료 모시려고 아들인 내가 차에 태워드리기 위해 안거나 업었을 , 아버지는 이미 솜털처럼 가벼웠다. 곡기를 끊은지는  달이 넘었고 이제는 누운  물도  넘기셨다. 그나마 드시는  서울탁주 막걸리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아버지가 요양병원 들어가셔서 가래 석션과 소변 도뇨 등을 하고 약물치료 제대로 받으면 기운을 차리실 줄 알았다. 요양병원 들어가면 고령 폐암 환자라 다시 나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줄로 착각했다. 요양병원 입원 결정이 어렵지 결정만 하면 이제부터 장기전을 치르게 될 줄 알았다.


큰 착각이었다.

말기 암환자가 누우면 다시 못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요양병원 입원 4일째 돌아가신 뒤에야 나는 알게 되었다.


아무튼, 나는 이제 요양병원 들어가시면 막걸리를 드실 수 없으니 어렵더라도 물을 마시고 죽을 드시라고 했고, 끊임없이 어머니나 나를 불러서 막걸리를 달라는 아버지에게 급기야 역정을 냈다. 마치 마약이라도 되는 듯 '한 잔만 마실게'라고 말하는 아버지 면전에다가 '평생 가족들 말이라고는 절대로 안 들으시더니 아들이 드시지 말라니까 더 드시는거냐'며 타박하는 내게 아버지가 쥐어짜듯 한 말씀이 이제 마지막이 다가오니 '정을 떼려고 그러느냐?'는 거였다.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식인 나는 아버지가 말기 암으로 누웠지만 돌아가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버지 본인은 삶이 끝나가고 있다는 걸 아셨을 게다. 자식들만 몰랐다. 결국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요양병원 입원을 결정한 나는 마음을 바꿔 막걸리를 두 병 사다가 마지막으로 실컷 드시라고 드렸다. 유일했던 먹을거리 막걸리를 아버지는 병상에 누운채 혼신을 다해 빨대로 빨아드셨고, 아들인 내 기억 속에는 그 처연한 모습이 계속 각인되어 남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때 처음 다짐했던 거다.


내 평생 막걸리는 마시지 않겠노라고.



3.


"깊은 감사인사를 올립니다.


어제(11월 2일)가 저희 부친이 폐암말기 정식 진단을 받으신지 정확히 1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있어 달라고 붙잡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른 지나갔으면 싶던 그런,

아버지와의 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어린 시절,

생신날 새벽 집앞 도로를 쓸어주던 환경미화원 아저씨들을,

누추한 집으로 모셔와 미역국을 대접했던 우리 아버지는,

엄하지만 따뜻했고,

가난하지만 정직했던,

그런 분으로 아들인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나눠주시어,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2022년 10월 27일 목요일 새벽 1시반에 요양병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을 때 나는 직감했다.

우리 아버지가 이제 떠나시려는구나.


그 주 월요일에 요양병원에 입원시켜드리면서 나는, 다시 일어서지 못하시더라도, 대소변을 간병인에게 맡긴다 하더라도, 뼈만 남은 두 손은 꼭 힘을 주고 계시라 당부드렸다. 먹고 마시거나 휴대폰 들고 통화가 힘들면 문자 보내는 등 중요한 일들을 꼭 스스로의 손으로 해야만 하니 앙상한 두 손은 아버지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생각하시라 강조했다. 그러나 그 '자존심'은 돌아가시기까지 3박4일간 단 한 번도 내가 당부드린 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월요일 입원하자마자 아버지는 깊은 잠에 빠졌고 주치의는 코로나 상황이지만 가족들에게 면회를 준비하라고 전해왔다. 위독하다는 의미였음에도 당시까지 어머니와 누나들, 그리고 아들인 나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은 안했다.

수요일 저녁에 가족면회를 하였으나 머리를 빡빡 깎은 아버지는 의식없이 계속 잠만 주무셨다. 심박동 충격기와 혈압 강화제로 연명하는 과정이었겠으나 우리는 아버지와 계속 대화를 시도했고 꼭 잡은 아버지의 손이 조금씩 움직인다고, 아버지가 가족들의 말은 알아듣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음에 금방 또 올게요.'하고 집에 돌아와 누운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새벽 병원 전화를 받은 거였다. 어머니는 갑자기 춥다 하셨고 할 수 없이 나 혼자 병원으로 가면서 누나들에게 연락을 했다.

아버지가 이제 그만 돌아가시려나 보다고.


병원에 내가 먼저 도착했을 때 간호사가 말했다. 밤새 아버지가 호흡기와 심박동기들을 몇 번이나 막 떼어냈단다.

아버지는 우리가 다녀간 걸 진짜 알고 계셨던 거였다. 그리고 아들인 내가 말한 '마지막 자존심'인 앙상한 손으로 물을 마시거나 휴대폰 문자를 누르는 대신 유일한 생명줄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던 거다.



어렸을 때,

겨울의 추운 생신날 새벽에 출근하기 전,

집앞 도로를 쓸고 있던 환경미화원 아저씨 두세분을 거의 단칸방이나 다름 없던 누추한 우리집으로 모셔와 미역국을 대접했던 아버지였다.

나는 사실 스무살 이후 아버지와 살갑게 대화를 해본 기억이 없다. 가족에게 억압적이고 무관심하기도 했던 아버지가 싫었다. 나도 한창 청춘일 때는 극우적인 아버지의 정치성향에 진심으로 적대적이던 시간도 꽤 길었다. 그러다가 내가 가정을 꾸리고 난 후에는 삼대가 함께 사는 집안의 평화를 위해 정치경제사회노동 문제를 절대 논하지 않았다. 급기야 그 옛날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용돈으로 데모하러 따라다녔듯, 이제는 아들이 드리는 용돈으로 태극기어르신 집회에 나가시는 아버지를 인정하는 수준까지는 왔지만, 그걸 '관용' 또는 '포용'으로 생각했지 '이해'나 '인정'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지금의 나보다 아마도 더 젊었을 그 추운 새벽 아버지 생신날의 기억은, 내가 아버지를 엄하지만 매우 따뜻했던 분으로 떠올리게 하는 아련한 장면이다.


돌아가시고 나니 더욱 또렷하게 떠오르는 듯한 따뜻했던 그 기억은 우리 유가족을 위로해준 고마운 분들에게 꼭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장례를 다 치른 후 조문 감사인사에 그 내용을 적었다.


적어도 아들인 나에게 아버지는,

엄하지만 따뜻했고,

가난하지만 정직했다.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

싫어했던 기억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오로지,

따뜻했고,

정직했던,

나의 아버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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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려던 그 새벽에 아쉽게도 마지막 유언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난 아버지께 약속했다.

다음에는 제 아들로 태어나시라고.

그러면 내가 아빠로서 학교는 꼭 보내드리겠다고 말이다.


아버지는 1970년대에 중동을 세 번이나 다녀오셨다. 아마도 그 정도면 우리집 가난을 어느정도는 벗어났을 것 같겠지만, 국민학교 졸업장도 없던 아버지는 돈을 많이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모부의 졸업장을 빌려서 중동 열사의 산업역군이 되었지만, 졸업장 세탁의 약점을 아는 브로커들이 중간에 다 떼어먹었을 것이고, 그마저 마지막에는 몸을 다쳐서 귀국하셨다. 그 후로 며칠 일하고 또 며칠은 아랫목에 누워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내게 가장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럼에도 책과 신문을 열심히 읽으셨고 붓글씨와 수묵화도 잘 치시던 아버지는, 만약 다음 생이 있어 나의 아들로 만나게 된다면, 더 이상 형제들에게 양보할 일 없이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또 대학원과 해외유학까지 다 보내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5.


오산의 자취방에서 혼자 지내는 중에도 사실, 아버지가 서울집 안방에 누워계시는 듯 했다.


아프시기 전에는 전화통화라고는 거의 하지 않았지만,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바로 그 한달 후 내가 경기도 오산으로 발령받게 되고는 퇴근 후 전화를 거의 매일 드렸다.

돌아가신지 7주, 49재까지도 전화하면 받을 것만 같다. 아니, 진짜로 받으실까봐 겁나서 차마 전화를 할 수가 없기도 하다.


어쩌면 남들 보기에 가늘고 긴 인생을 사셨을 지도 모를 내 아버지는 그러나,

마지막 겨울의 문턱에서는 아주 짧고 굵게 아프다 가셨다.

사후의 모든 정리도 깔끔하게 해놓고 아들인 내가 바란 방식은 결코 아니었을지라도 '마지막 자존심'까지 지키고 떠나셨다고 나는 생각하기로 했다.

누나가 사망신고 후 받은 정부의 문자에서도 세금 체납액은 0원이었다.

평생 빚으로 살았지만 돌아가신 지금,

아직까지 확인된 채무는 없어 보인다.

물론, 남기신 것도 없다.

공수래 공수거를 몸소 실천하셨달까.




이제, 나는 아버지 방에 들어가 평생 열심히 쓰셨던 아버지의 일기를 펼쳐봐야겠다.


아버지의 낡은 일기장을 여는 순간,

아프고 외롭고 두려웠을 내 아버지의 마지막 겨울 문턱을 넘어,

화사한 봄길이 열리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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