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서에 바람이 인다
농서에 바람이 인다
- [풍기농서], 마보융, 2017.
"장무 3년(223년) 봄 2월, 승상 제갈량이 성도에서 영안(백제궁)으로 왔다... 유비는 질병이 심해지자 승상 제갈량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상서령 이엄(이평)에게 보좌하도록 했다."
- 진수, [정사 삼국지], <촉서>, '선주전', 3세기.
"장무 3년(223년) 봄, 유비는 영안에서 병세가 위중하므로 성도에서 제갈량을 불러와 뒷일을 부탁했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말했다.
'당신 재능은 조비의 열 배는 되니 틀림없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는 큰 일을 이룰 것이오. 만일 나의 후계자(유선)가 보좌할 만한 사람이면 그를 보좌하고, 그가 재능이 없다면 당신이 스스로 나라를 취하시오.'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은 감히 온 힘을 다하여 충정의 절개를 바치며 죽을 때까지 이어 가겠습니다.'"
- 진수, [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3세기.
"장무 3년(223년)에 유비의 질병이 악화되자, 이엄(이평)은 제갈량과 함께 어린 유선을 보좌하라는 유조를 받았다. 이엄을 중도호로 삼고 안팎의 군사를 통솔하여 영안에 주둔하게 했다."
- 진수, [정사 삼국지], <촉서>, '이엄전', 3세기.
관우를 죽인 오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벼르던 중 장비까지 어이없이 죽자, 이성을 잃고 출정했다가 이릉에서 대패하고 영안의 백제성에 틀어박힌 유비는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한나라의 부흥을 명분으로 '백절불요'(진수, [정사 삼국지])의 삶을 질기게 이어오다가 파촉의 구석에서 기어이 황제가 되었으나 그 영웅의 최후는 북벌의 대의에 바쳐진 것이 아니라 의형제간의 의리에 바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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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읽든, 나관중의 [삼국연의]를 읽든 '백절불요(百折不撓)'의 영웅 유비도, 유비와 본인을 천하의 진짜 두 영웅이라 떠보았다던(나관중, [삼국연의]) '시대를 초월한 영웅'(진수, [정사 삼국지]) 조조도, 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까지 그 모든 난세의 군웅들이 내게는 만만해 보였다. 그리고 무수한 선학들이 내린 평가에 나 또한 세치혀와 고사리손가락을 얹으며 그들을 평가해댔다. 물론 나 개인적으로 군주든 제후든 주군이든 낡아빠진 권력관계를 싫어해서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삼국지'에 그들 말고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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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중국역사의 원동력은 농민반란이다"라는 사회주의 혁명가 마오쩌뚱의 계급투쟁론에 동조하며 후한말 당시 황건농민반란에 주목하고 썩은 한나라를 무너뜨린 건 대다수 농민과 민중계급이라 본다. 위나라 조조 가문이든 촉한의 유비든 강동의 손씨든 민란의 거대한 바람에 올라탔다.
고대 삼국의 군웅들이 대규모 농민반란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그 바람을 따라 갔다면, 대중민주주의가 정착된 현대의 우리 역사에서 주기적인 전국적 시위와 항쟁 후 민주당이라는 세력은 그 바람에 편승한 점만 다를 뿐.
고대의 사회적 '군주'는 '황제'였지만, 현대의 '군주'는 다수 '민중'이기 때문이다.
민중반란이라는 계급투쟁의 거대한 바람에 숟가락 빨며 올라탄 이들은 사실, 낡은 체제를 결코 바꾸지 않는다. 황건농민반란은 세상을 뒤엎고 싶었겠지만,'황건적'을 진압하기 위해 조직된 '17로 제후연합군'은 후한 '황제'를 보위한다는 명분으로 당시 실권자 동탁을 쳤다.
현실의 정치적 영웅들은 혁명적 전환의 시대적 요구에도 '혁명'을 '개혁'으로 포장하며 오히려 본인 당파의 기득권을 공고히 한다. 결과적으로 낡은 체제는 전환은 커녕 그들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2016년 촛불항쟁의 바람에 편승한 민주당 정권이 또 다시 그랬다. 역사에서 사라졌어야 할 국힘당 파시스트들이 굳이 자본가 정권이라고 할 것 없다. 민주당 정권도 그에 못지 않은 철저한 자본가 정권이었다.
역시, 후한말 황건농민반란의 난세에 군웅할거하다가 권력을 쥔 이 영웅들 또한 낡은 한나라의 군주제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구분하자면 조조의 위나라는 한나라의 건국초기 '약밥삼장'으로부터 갈수록 복잡해진 법체계나 낡은 제도 등을 개혁하기는 했다. 이는 유가와 법가를 아우르는 조조의 실용성에 기인한다. 사마의는 조조의 방식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한편으로 촉한의 유비는 오로지 하나의 슬로건 뿐이었다.
"모든 것이 한나라 부흥을 위한 것!"
- [풍기농서], 마보융, 2007.
"[풍기농서]에... 등장하는 음모는 당연히 팩트가 아니다.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이용한 공상일 뿐이다. 나는 전혀 다른 세상의 관점에서 이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 가능성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지만 아주 흥미롭다. 역사적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지만 그 내막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빈치 코드]는 명화에 얽힌 사소한 에피소드를 아주 그럴싸한 천 년의 전설로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공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안의 세계에 푹 빠지지 않았던가?"
- [풍기농서], <후기 1>, 마보융, 2007.
중국의 젊은 작가(중년이지만 나보다 젊다) 마보융의 첫소설 [풍기농서]의 부제는 <이름없는 영웅들의 비밀첩보전쟁>이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와 나관중의 [삼국연의]를 통해 알려진 역사적 사실 하나를 배경으로 삼아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처럼 이야기를 꾸몄다. 주인공은 촉한의 창업자인 선제후 유비나 제갈량 등의 거물들이 아니라 위-촉-오를 넘나드는 가상의 간첩들과 이들을 색출하여 제거하려는 정보관리들이다.
"건흥 5년(227년), 제갈량이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 한중에 주둔...
건흥 6년(228년) 봄, (읍참마속 후) 겨울에 제갈량은 또 산관을 나와 진창을 포위했는데 위나라 대장군 조진이 이를 막았으며, 제갈량은 식량이 다 떨어져 돌아오고 말았다. 위나라 장수 왕쌍이 기병을 이끌고 제갈량을 뒤쫓아 왔는데, 제갈량은 그와 싸워 깨뜨리고 왕쌍의 목을 베었다.
건흥 9년(231년), 제갈량은 다시 기산으로 출격하였으며, 목우를 이용하여 군수물자를 실어 날랐는데 (이엄의 농단으로) 식량이 다 떨어져 군대를 물렸다. 위나라 장군 장합과 싸워 그를 활로 쏘아 죽였다."
- 진수, [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3세기.
이야기는 회사원인 작가 마보융이 좋아하는 추리소설들의 중국식 '패러디'([풍기농서], <후기>)이라고는 하나 배경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풍기농서]는 유비 사후 제갈량의 북벌을 큰 배경으로 삼고 228년(촉한 후주 건흥 6년) 위나라 장수 왕쌍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231년(건흥 9년) 역시 위나라 장군 장합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렇다고 위-촉 북벌전쟁의 주역들인 촉한의 강유와 조위의 장합 등 조조, 유비, 제갈량보다 한등급 아래 영웅들이 한중에서 벌인 치열한 전투 이야기는 아니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 <열전>에서 다루는 위나라 장군 장합, 촉나라 승상 제갈량 및 제갈량과 함께 유비로부터 후사를 부탁받은 탁고대신 이엄(이평) 등은 조연에 불과하다. 다만, 탁고대신 제갈량과 이엄(이평) 간의 촉한 최고 지고층 내부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제갈량이 자신을 모함한 이엄을 탄핵하고 승리한 역사적 사실이 주요 배경이며 그 중간에 촉한 내부 양의와 위연의 알력 등의 역사적 양념이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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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보융의 [풍기농서]는 이들이 주로 등장하던 제갈량의 4차 북벌 과정에서 암약한 것으로 그려지는 가상의 간첩들과 정보관들이 주인공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물론 정보전 일체는 공상이고 픽션이다. 마치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유일한 역사적 사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렸다는 것 하나 뿐인 것처럼. 그러나 촉한의 정보관 순후나 호충, 위나라에 파견된 촉나라 간첩 '흑제' 진공(두필)이나 촉나라에서 활동하는 이중간첩 '촉룡' 등의 특정 인물들이 가상인 것이지 전시의 그러한 첩보전쟁 상황까지 가상으로 보이진 않는다. 즉, 작가 마보융이 소설 <후기>에서 밝히듯 "삼국 역사 소설이 아니라 삼국 역사를 차용한 공상 소설"이기는 하나, 정사와 구전, 문헌과 기록에 없을 뿐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의 구성이다.
추리소설 형식이므로 내용 전개가 빠르다. 재미있기도 하여 하마터면 밤 꼬박 새며 다 읽을 뻔 한 걸 정신차리고 불을 껐다. 다음날 출근은 해야 하니까. 최근 읽은 재미진 소설을 하나 추천하라면 아마도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고 조만간 마보융의 역사소설을 나도 모르게 더 찾아 읽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주인공의 결론이 "모두 한나라의 부흥을 위해!"라는 것.
작가 마보융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촉한정통론'의 춘추필법을 따르는 [삼국연의]의 흐름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주장하듯 "소설은 재미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가장 대중적인 바람을 타야 하기 때문이겠다. 이 대풍의 흐름에서는 제갈량은 여전히 신적인 존재이고 황건농민군의 잔당 일파인 '오두미교'의 반란정신은 진압의 대상이거나 간첩들의 이용대상에 불과하다.
즉, 재미있고 흥미로운 '촉한정통론'과 '삼국지영웅론'의 이야기 바람은 농서의 전장에서 쉴새없이 불어대나 그 바람에 민중은 없다. 더구나 가상의 소영웅들이 판치는 첩보전쟁에서 그 동안 만만했던 거물들은 더더욱 독자들과 멀어지고 거리감까지 생긴다.
결국, 농서에 부는 간첩들의 바람에는 '민중'도 '영웅'도 없다.
[풍기농서]의 이야기는 가상이지만 '민중'도 '영웅'도 없는 실제 현실을 본의 아니게 보여주는 소설같은 '리얼리즘'이 있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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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풍기농서(風起隴西)](2007~2017), 마보융, 양성희 옮김, <RHK>, 2021.
2. [정사 삼국지 - 촉서](3세기), 진수,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
3. [조조 평전](2000) / [유비 평전](2004), 장쭤야오, 남종진 옮김, <민음사>, 2010~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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