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략(計略) 또한 변증법(辨證法)이다"
"계략(計略) 또한 변증법(辨證法)이다"
-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통해 보는 고사성어(故事成語) (1)
: 변증법적(辨證法的) 세계관의 진수(眞髓)를 보여주는 계책(計策)들의 기묘한 관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병법(兵法)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누구나 익히 들어 잘 아는 위 문구는 중국고대의 유명한 병법서, [손자(孫子)] 13편 중 제 3편 모공(謨攻)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知彼知己 白戰不殆,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즉, 나를 알고 상대방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으나, 상대는 모른 채 나 자신만 알면 이길 확률은 반반이며, 나도 상대방도 모두 모르면서 싸움에 임하면 매번 위태롭다는 뜻이다. 여기서 위태롭지 않기 위해서는 나와 상대방에 대한 바른 인식을 그 기본으로 삼고 있는데, 양자(兩者)간의 관계는 상대방에 대해 알아야 나 자신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동시에, 나 자신을 어느 정도 알아야 상대의 힘을 측정해 볼 수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으나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일 터, 결국 위태롭지 않은 상황을 만들기 위한 관건은 바로 상대를 정확히 아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양자간 투쟁에서의 기본전제이다.
후한 말기(後漢 末期), 황건(黃巾) 농민반란이 일어난 184년 경부터 위(魏), 오(吳), 촉(蜀)의 삼국 정립시기를 거쳐 사마염(司馬炎)의 진(晉;西晉)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한 280년 경까지 약 100여년간의 기록은 [삼국지(三國志)]라 하여 우리에게 꽤나 익숙한 이야기이다. 이 장대한 이야기는 정사(正史)로 보면 진(晉)나라 사람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를 기초로 하여 이후 남북조(南北祖) 시대의 송(宋)-5대10국(五代十國) 이후 후주(後周)의 절도사였던 조광윤(趙匡胤)이 중국을 통일하여 건국한 송(宋)나라가 아닌-의 문제(文帝)가 중서시랑(中書侍郞) 배송지(裵松之)에게 명하여 편찬한 방대한 <주석(註釋)>을 거치면서 각종 야사(野史)가 덧붙여져 더욱 풍부해졌고, 원말명초(元末明初) 시기 나관중(羅貫中)에 의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 대중화되면서 지금의 이야기로 정착되었다. 나관중의 <연의>는 오랜 기간 필사본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한참 후 명나라 중기인 1522년에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는 제목으로 처음 간행되었는데,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총 120회의 이야기로 정리된 판본은 그보다도 더 이후인 청(淸)나라 때 모종강(毛宗岡)이라는 사람이 정리한 ‘모종강본(本)’이다.
왕조의 교체, 혹은 권력을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온갖 전쟁과 전투, 인간들 사이의 각종 책략 등, 세상만사의 이치가 한데 녹아있다는 찬사를 받는 동양의 고전(古典)으로서의 [삼국지]는 국경(國境)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들을 준다고 하는데, 이처럼 [삼국지]는 서로 먹고 먹히며, 믿음이 배신으로 변하나 그 배반 또한 또 다른 신의의 원천이 되는 순환론(循環論)적이면서도 무척 풍부한 동양철학 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도 하다. ‘세상만사는, 나뉘어진 지 오래되면 합쳐지고, 합쳐진 지 오래되면 나뉘어진다(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면서 시작되는 [연의]의 첫 문장은, 후한 말기 삼국으로의 분열과 다시금 진나라로의 통일이라는 또 한 번의 순환을 예고하며 이러한 사상을 단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는 각각의 인물, 상황을 깊게 통찰하는 수많은 고시(古詩)들이 담겨져 있으며, 특히 총 120개에 이르는 각 회들은 짧은 시로써 다음 회를 예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다양하고도 현란한 계책들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짧은 구절로 압축하고 있는 바, [연의]의 71회와 72회를 이어주는 싯구(詩句)를 한 편 소개한다.
魏人妄意宗韓信,
(魏;나라 위 / 人;사람 인 / 妄;망령될 망 / 意;뜻 의 / 宗;따를 종;從 / 韓信;한신),
위나라 사람이 망령되어 한신을 따라 본받지만,
蜀相那知是子房
(蜀;나라 촉 / 相; 재상 상 / 那;어찌 나 / 知;알 지 / 是;곧 시 / 子房;장자방;장량)
촉나라 재상이 바로 장자방(장량)임을 어찌 몰랐는가
여기서 위인(魏人)은 조조(曺操;孟德)의 장수 서황(徐晃)을 이르고, 촉상(蜀相)은 유비(劉備;玄德)의 책사(策士)이자 촉의 재상인 제갈량(諸葛亮;孔明)을 지칭한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71회와 72회의 무대는 유비가 관중(關中)을 지나 파촉(巴蜀) 땅에 근거를 마련한 후, 유비를 쫓아 한중(漢中)을 평정한 위나라 승상 조조가 장수 하후연과 장합을 앞세워 대치하고 있을 때이다.
하후연은 용맹하기는 하나 경솔하고 지략이 없는 장수였다. 반면 촉의 황충(黃忠)은 고령이었으나 용맹과 지략을 모두 겸비한 장수였는데, 군사의 사기를 독려하고 조금씩 전진하여 영채를 세우면서 성미급한 하우연에게 싸움을 걸어 결국 그의 목을 베고 대승을 거두어 전략적 요지인 정탐산을 차지한다. 이 과정에서 황충에게 촉의 책략가 법정(法井)이 건의한 이 계책 또한 ‘반객위주지계(反客爲主之計)’로서, 민간병법 삼십육계(三十六計)의 서른 번째 계책이다. 즉, 처음에는 객(客)이었지만 상대방의 약한 부분을 정확히 분석, 공략하여 조금씩 발을 들이밀면서 점차로 상대방의 심장부에서 주(主)가 되는 계책인 것이다.
한편, 위의 맹장 하후연의 죽음을 전해들은 조조는 결국 건안23년(218년) 7월에 40만 대군을 일으키고 몸소 한중으로 나선다. 이 때 서황은 오래 전 한나라 대장군 한신이 그러했듯이 물을 등에 지고 싸우는 배수진(背水陣)을 앞뒤 가리지 않은 채 그대로 본받아 한수를 건너 진을 세웠고 이를 말리던 왕평은 어리석은 서황이 전투에서 지고 달아나는 동안 촉에 투항하게 된다. 당시 촉은 황충과 조자룡의 활약으로 승세를 타면서도 신중하게 방어를 하고 있는 중이었고, 위는 군사의 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되는 패배에 사기가 떨어질 때로 떨어진 상황이라 촉상 제갈량의 손바닥 위에서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배수진’은 적합치 못한 병법이었다 할 수 있다. 위 시는 이런 상황을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배수진(背水陣)의 유래를 잠깐 살펴볼 만 하다. 이는 진말한초(秦末漢初)에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패권을 다투던 시기, 유방 휘하에 있던 한나라 대장군 한신(韓信)의 기책(奇策)이었다. 기원전 203년이자 한고조(漢高祖) 원년(元年), 항우가 의제(義帝)를 죽이자 각 제후들에게 격문(檄文)을 돌려 56만의 대군을 규합한 한왕(漢王) 유방이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의 근거지인 팽성(彭城)을 도모하였다가 항우의 3만 정예부대에게 어이없이 대패하고 한중(漢中)으로 퇴각하던 중 대장군 한신으로 하여금 3만의 군사로 조(趙)나라 땅을 평정하도록 하였다. 당시 조나라의 승상은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였는데, 자신의 20만 대군만 믿고 자만스럽게도 한 판의 싸움으로 대장군 한신을 꺾으려 하고 있었다. 당시 진여에게는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佐擧)라는 책사가 있었는데, 그는 진여의 이 거만한 태도에 누차 경계를 주었지만 들어 먹히지 않았고, 결국 진여가 죽고 조나라 땅이 평정된 후 한신의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3만의 군사를 지휘하던 한신은 2천의 정예병을 뽑아 진여의 진채 부근에 매복시켰고, 1만의 군사는 ‘저수’의 물가쪽으로 보내 먼저 진채를 세우라고 명한 후, 나머지 본진을 몰고 조군을 도발하여 ‘저수’가로 유인했는데, 자만한 진여는 자신의 본영에 정병을 두지 않고 모든 군을 들어 한신을 뒤쫓았다. 역시 이좌거는 정병을 진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진여는 대장군만 잡으면 나머지 군사들은 자연스레 진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저수’가로 한군을 쫓아갔다. 이 또한 ‘금적선금왕지계(擒賊先擒王之計)’로서 ‘삼십육계’의 열 여덟 번째 계책이긴 하였으나 전투의 형세를 보았을 때 적절치 못한 선택이었다. 어쨌든 ‘저수’를 등에 지고 진채를 세운 1만의 군사와 조군을 유인한 2만여의 한군은 처음에는 당황하였으나 10월 겨울에 접어든 시퍼런 ‘저수’의 강물을 보니 뒤돌아 더 이상 달아날 방도가 없고, 또한 얼마 전 팽성에서 많은 군사의 수(數)만 믿고 경솔하게 대응하다가 항우의 군대에 의해 10여만이 넘는 군사의 시체가 ‘수수’라는 강물의 흐름을 막았던 뼈저린 기억이 생생했던 지라, 함께 뭉쳐 목숨을 걸고 조나라 본군과 필사의 전투를 개시하였다. 이제 쉽게 제압되지 않는 한군을 보고 문득 자신의 본영이 생각난 진여는 군사를 물려 자신의 진채로 돌아왔지만 정병을 남겨두지 않았던 조나라 진영은 이미 한신이 미리 떼어놓은 2천의 정에병에 의해 이미 점령된 상태였다. 결국 한신에게 사로잡힌 진여는 불귀의 객이 됨으로써 한신이 조나라 땅을 온전히 평정할 수 있었던 이 전투에서 빛나는 계책이 바로 ‘배수진(背水陣)’이었다. 물론 당시 병법(兵法)을 안다 하는 장수들은 모두 강물을 등지고 싸움에 임하는 것을 흉(凶)한 전술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한신은 지난 팽성전투의 생생한 기억과 정예병을 이용하여 적의 앞뒤를 공략한 복배협격(腹背夾擊), 즉 대군을 믿고 자만에 빠진 진여로 하여금 2천의 소수군보다는 대장군기를 보위하는 나머지 본군을 쫓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듦으로써 승리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서황이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실패했던 배수진은 얼마 후 촉이 위의 대군을 물리친 계책으로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승세를 잡은 촉상 제갈량이 유비에게 직접 한수를 건너 물을 등에 지고 진채를 세우라는 계책을 알려주었고 이에 조조는 다른 숨은 계책이 또 있을까 하여 진채를 버리고 퇴각하고 말았다.
이어서 제대로 촉에 대응하지 못한 채 한중으로부터 아예 퇴각하려는 조조의 결정은 또한 ‘계륵(鷄肋)’의 고사를 낳았다,
한중에서 군세가 밀리는 것으로 판단한 조조는 어느 날 저녁상으로 나온 닭고기탕의 닭갈비를 보고 퇴각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는데, 이는 닭갈비가 먹자니 먹을 게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것으로서 한중에 머문 위나라 군사가 앞으로 나아가자니 이기지 못할 것이고 물러서자니 세간의 웃음거리가 될 터이지만 더 머물러 있어봐야 이익이 없으니 차라리 중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데에서 유래한 성어이다. 조조는 ‘계륵’을 통해 자신의 번민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였고 위나라 군중에는 양수(陽修)라는 행군주부(行軍註簿) 외에는 그의 뜻을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다. 양수는 재능이 뛰어나고 총명하나 조조 앞에서 자신의 총명함을 너무 과시하여 조조로부터 미움을 계속 사고 있던 바, 마침 ‘계륵’의 의미를 군중 내에 떠벌린 양수에게 군심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을 씌워 참수(斬首)함으로써 간신히 위신을 세우기는 했지만, 조조는 이후 죽을 때까지 다시는 한중을 넘보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계책이라 해도 그것은 상황의 추이에 따라 결코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한신의 ‘배수진’은 ‘복배협격’의 계책과 어우러져 진여의 ‘금적선금왕지계’를 제압하였고, ‘반객위주지계’를 비롯하여 복잡다단했던 제갈량의 전략을 꿰둟어보지 못한 서황의 ‘배수진’은 결국 잘못된 선택이었으며, 그럼에도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 제갈량의 전술은 다른 계책도 아니고 서황이 실패했던 바로 그 ‘배수진’이었다.
하나의 책략(策略)은 그 하나만으로 따로 존재할 수 없다. 나 자신만의 틀에서만 상황을 볼 것이 아니라, 상대를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대전제 하에 나의 기량을 정확히 가늠한 후에야 진정한 계책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자신 또는 즉자(卽者)와 상대 또는 대자(對者)의 복잡한 운동에 대한 명확한 분석을 토대로 하여 도출된 정확한 정세판단을 세상만사의 기본으로 삼는 변증법적(辨證法的) 세계관의 진수(眞髓)를 보여준다.
(2005년 7월)
- 고시(古詩) 발췌 : [三國志], 卷六, 七十一回, 羅貫中 著, 황석영 譯, <창작과비평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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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삼국지] 번역본은 청나라 모륜, 모종강 부자의 텍스트가 대만을 통해 국내로 유입된 것이 주류였으나,
황석영의 [삼국지] 번역본은 모종강 부자의 '오류'를 바로잡아 나관중의 그것에 가능한 가깝게 만든 중국의 <인민출판사>본을 원본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형식적으로는 총 120회의 극 사이에 시(詩) 한 편씩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문열의 [삼국지]도 저자가 보수적 시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나름의 '평역'으로서 방대한 역사문헌적 지식을 기반으로 쓰여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존 문헌을 바탕으로 각 인물과 시대상을 나름의 시각으로 평가한 점은 그 시각과는 무관하게 훌륭한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황석영의 [삼국지]는 저자가 진보적 시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원본에 가까운 '완역'으로서 특정의 가치관이 배제된 채 '사실주의'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부르주아의 삶을 객관적으로 형상화한 발자크의 사실주의 소설로부터 엥겔스가 당시 부르주아지 계급의 부패상을 읽어냈듯이, 지난 역사에 가치를 불어넣는 것은 독자의 몫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황석영 선생의 [삼국지]를 추천합니다.
위 글은 황석영 [삼국지] 제71회와 72회의 이야기를 그 배경으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