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풍가(大風歌)]와 [해하의 노래(垓下歌)]
[대풍가(大風歌)]와 [해하의 노래(垓下歌)]
- 꽉막힌 항우와 방만한 유방
알라딘에서 읽어볼 책을 검색하다가 ‘초한지 원본번역’이 떠서 급궁금하여 더 찾아보니,
2000년대 중반에 동아일보에서 연재할 때 다음 회를 기대하며 재미있게 읽었던 이문열의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가 [이문열 초한지] 총 10권으로 나와 있었다.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는 한고조가 된 유방이 고향 패현으로 놀러가서 고향 선후배, 친구들과 음주가무를 즐기다가 전쟁터에서 지낸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지은 시의 첫 구절이다.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大風起 雲飛揚 : 대풍기 운비장)
위세가 해내에 떨쳐 고향에 돌아왔네 (威加海內 歸故鄕) : 위여해내 귀고향)
어떻게 하면 맹사를 얻어 사방을 지키게 할까 (安得猛士 守四方 : 안득맹사 수사방)
한고조 유방의 인생 절정기에 지어 부른 이 노래의 제목은 [대풍가(대풍의 노래)]다.
유방은 이 노래를 부른 다음해에 53세(혹은 63세라고도 한다)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한다.
그는 반란을 일으킨 영포를 치던 중 화살을 맞았고 치료받다가 “내가 포의로 세 자 검을 들고 일어나 천하를 취했으니 이것이 천명이 아니겠는가? 명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편작이 온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며 치료를 중지하고 의사에게 금 50근을 주어 돌려보냈다. 반진초한전쟁에 목숨을 내던진 협객 유방은 가는 목숨을 진시황처럼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
유방 최후의 적수 초패왕 항우도 해하에서 ‘사면초가’를 듣고는 유방에게 패배를 인정한 후 총애하는 우미인과 준마 추를 앞에 두고 독주 한 잔 마시면서 시를 한 수 읊는데 이 노래는 유방의 [대풍가]보다 유명한 [해하의 노래(해하가)]다.
31세의 항우는 이날 최후의 결전을 벌이고는 하늘을 탓하며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한다.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세상을 덮어도 (力拔山 氣蓋世 : 역발산 기개세)
때가 이롭지 않아 추가 나아가지 않네 (時不利 騅不逝 : 시불리 추불서)
추가 나아가지 않음을 어찌하랴 (騅不逝 可奈何 : 추불서 가내하)
우야 우야 너를 어찌한단 말이냐 (虞兮虞(兮) 奈若何 : 우혜우(혜) 내약하)
어조사 ‘혜(兮)’는 뜻은 없이 음율을 맞추기 위함인데 일종의 쉼표와 같다. 예를 들어 ‘대풍기 운비장’ 중간에 넣어 ‘대풍기혜운비장(大風起兮雲飛揚)’과 같이 부르는데 우리 어릴적 중국에서 온 ‘비단장사 왕서방’이 “우리 사람 ‘혜’ 명월이한테 반했어~” 같은 것 아닐까 싶다.
아주 오래전인 기원전 12세기 이전부터 중국 하북지역은 ‘2+2=4’글자 시를 지어 불렀고, 춘추전국시대 중국 남방 초나라 지역의 ‘초사’는 ‘1+2(역+발산) 또는 2+1(대풍+기)’ 운율이 전해지다가 진시황의 전국 통일 후 섞이고 섞여 ‘2+3 또는 3+2’에 ‘2 또는 2+2+4’가 붙어 5글자 또는 7글자 운율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리가 시조를 보며 익히 들어온 ‘4언절구’, ‘5언절구’, ‘7언절구’ 등일 것이다.
아마도 ‘3언절구’가 없는 것이 항우의 초나라가 망해서 그런 것 아닌가 싶은 것은 오로지 나의 추측이다.
초패왕 항우는 초나라 사람으로 정통 ‘초사’에 따라 ‘3+3=6’을 철저히 따른 반면,
한고조 유방은 그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인 성정 그대로 술이 꽐라되어 남방의 ‘3+3=6(대풍기+운비장)’으로 거창하게 시작했다가 ‘2+2+3(위여+해내+귀고향 / 안득+맹사+수사방)’으로 형식에 구애없이 막 부른 듯 하다.
이런 자유로움 속에서 ‘7언절구’가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역시 나만의 추측이다.
여기서도 꽉막힌 항우의 형식주의와 방만한 유방의 자유주의적 성정의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 참고 : [패권], 진순신/오자키 호츠키 편, <솔>, 2000.
명나라 말기 ‘종산거사’ 견위라는 사람이 적었다는 ‘서한연의’ 원본번역을 읽어보려고 사가는 길이다.
(2019년 2월 23일)
***
명나라 말기 ‘종산거사’ 견위가 정리한 ‘서한연의’ 원본번역을 읽어보니 정사에 기초한 평역으로서의 이문열의 작품과는 역시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와 황석영의 ‘원본번역’ [삼국연의]의 차이가 그대로 전이된 듯 하다.
해하의 대회전에서 한고조 유방과 대원수 제왕 한신이 초패왕 항우를 대패시킨 ‘극적 장치’로서 ‘구리산 십면매복’을 배치시킨 이 원본완역은 조선후기 언문번역으로부터 350년만이라고 한다.
이문열은 ‘초한지’를 ‘평역’하면서 ‘구리산 십면매복’을 인위적인 허구로 치부하여 과감히 삭제하고는 ‘역사적 리얼리티’를 위해 사마천 [사기]의 내용으로 대체했다.
이제 원본완역자 김영문에 따르면 우리 ‘초한지’는 ‘구리산 십면매복’이 있는 초한지와 없는 초한지로 구분된다.
350년만에 원본을 번역한 김영문의 [초한지(서한연의)]는 중간중간 삽입된 시들과 견위의 ‘역사논평’ 일체를 전부 번역한 우리 최초의 ‘원본완역’이다.
(2019년 3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