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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Mar 18. 2020

'장의열전(張儀列傳)’, ‘소진열전(蘇秦列傳)’

고침이와(高枕而臥), 전화위복(轉禍爲福)

고침이와(高枕而臥), 전화위복(轉禍爲福)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열전(史記列傳)>를 통해 보는 고사성어(故事成語)(6)
: ‘장의열전(張儀列傳)’, ‘소진열전(蘇秦列傳)’, : 유세객(遊說客)의 뒤집어진 정세(政勢)판단
 


고대 중국, 폭정(暴政)을 일삼던 은(殷,商)나라 주왕(紂王)을 목야(牧野)의 싸움으로 멸(滅)하고 패권(覇權)을 쟁탈(爭奪)한 주(周)나라는 중원을 평정하며 거대한 영토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고민하던 끝에 본래 주나라의 근거지였던 호경(鎬京)을 종주(宗周)로 하고 낙양(洛陽) 부근에 성주(成周)를 건설하면서 서주시대(西周時代)를 여는데, 효율적인 지배체제 확립을 위하여 각 지역에 제후국(諸候國)을 두게 된다. 이 제후국들은 각 왕족 또는 태공망 여상(太公望 呂尙;姜太公)과 같은 공신들이 일정 지역의 영토를 할당받아 제(祭)를 지내며 대대손손 통치하는 봉건체제(封建體制)의 동양적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러던 중 기원전 770년 제후들에 의해 주나라 수도가 낙양으로 옮겨지게 된 때를 기점으로 동주시대(東周時代)가 열렸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시작이다. 이 시대에는 쇠락해가는 주나라를 보위하며 이민족들의 침입을 막는 일, 즉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이를 주도적으로 지휘하는 제후를 패자(覇者)라 지칭하며 이러한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위해 각 제후들이 경쟁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한 나라의 씨를 말려버린 오월쟁패(吳越爭覇) 이후 중국은 서로가 서로를 멸망시켜야 하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전국시대(戰國時代)로 넘어간다. 전국시대는 기원전 400년대 춘추시대의 제후국 중 하나였던 진(晉)나라 삼대부(三大父)가 한(韓), 위(魏), 조(趙)로 나뉘면서 독립적인 제후국으로 인정되는 시기를 기점으로 시작되는데, 충성(忠誠)과 신의(信義), 제자백가(諸子百家)로 표현되는 일관된 철학(哲學)이 더 이상 생존의 덕목(德目)이 될 수 없는 합종연횡(合從連橫)의 책략(策略)이 중요시되고, 그의 대표적인 유세객(遊說客)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활약하던 시기가 바로 이 전국시대이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의 세력판도를 ‘진본기(秦本記)’, 효공(孝公) 원년, 기원전 361년의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산(河山) 동쪽에 여섯 강국의 제후, 즉 제(齊)나라의 위왕(威王), 초(楚)나라의 선왕(宣王), 위(魏)나라의 혜왕(惠王), 연(燕)나라의 도왕(悼王), 한(韓)나라의 애왕(哀王), 조(趙)나라의 성왕(成王)이 나란히 힘을 겨루고 있었다.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주변에는 십여 개의 소국이 있었으며, 초나라와 위나라는 진(秦)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주왕실은 쇠약해졌으며, 제후들은 정치에 힘을 기울이고 다른 나라를 병합하려고 서로 다투었다. 진나라는 변경에 치우친 옹주(雍州;지금의 섬서성)에 위치하여, 중원의 제후들과 동맹을 맺지 않고 이적(夷狄)과 상대하고 있었다’


위에서 말하는 제, 초, 위, 연, 한, 조, 진 등의 7국이 바로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서 제후들은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고 봉토(封土)는 국토(國土)가 되어 각국은 말 그대로 독립적인 왕국으로서 각 지역에 할거(割據)하게 된다. 그나마 주나라 왕실이 형식적으로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나라도 혼자 힘으로는 천하통일을 이룰 만큼 강력하지 못해 괜히 왕실을 도모했다가는 반역자(反逆者)로 몰려 다른 여섯 나라로부터 공격을 받아 멸망하게 되므로 500년이 흐른 후에 나타난 ‘천하삼분(天下三分)’이 아닌 ‘천하칠분지세(天下七分之勢)’를 이룰 수밖에 없었기에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과 외교책(外交策)이 무엇보다 중요하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우선 소진은 낙양 사람으로서 일찍이 유세를 배우기 위해 당시로서는 가장 풍요로웠던 제나라의 수도 임치로 건너가 귀곡선생(鬼谷先生)이라는 일종의 선인(仙人)의 문하에서 외교전략을 전수받는데 이때 소진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수제자가 바로 장의였다고 한다, 전한시대(前漢時代) 유향(劉向)이 지었다는 <전국책(戰國策)>이나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소진은 항상 자신이 장의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장의의 연횡책을 채용한 진나라가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결과를 가지고 추론한 이야기일 것이다. 어쨌든 당시의 정세로 보면 동쪽에는 조, 위, 한, 제, 연, 초 등의 여섯 나라가 서로 이웃하고 있고 함곡관(函谷關) 서쪽에 문화적으로 고립된 진나라가 웅거하고 있는 상황으로서 6국은 기존의 오랜 관습이나 가신집단들의 이전투구로 인해 부국강병을 위한 국책들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는 반면, 상대적으로 변방에 위치하고 있던 진나라는 타국 사람들의 등용이나 형명학적(刑名學的) 법가사상의 채용 등을 통해 민중에 대한 억압적 철권통치를 기반으로 점차 군사강대국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나온 외교전략이 바로 여섯 나라 사이의 합종이냐, 신흥강대국 진나라와 개별적으로 외교를 맺는 연횡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복잡한 외교술인 합종연횡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종횡가들은 귀곡선생의 문하를 나온 이후 한참 동안을 한량처럼 떠돌아다녀야 했다. 먼저 소진은 진나라로 가서 처음에는 연횡책을 유세하였지만 아직 국력이 다져지지 못하여 외교보다는 내치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혜문왕의 말에 좌절을 맛보아야 했고, 장의는 초나라로 가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중 도둑으로 의심받아 유세객의 재산인 ‘입’만 살아남을 정도로 얻어맞고 쫓겨나야 했다. 이는 전국시대 초기 유세객에 대한 불신의 여론을 반영하고 있다. 이후 소진은 강태공의 저서인 <음부경(陰符經)>을 통해 췌마술(揣摩術), 즉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도 모르게 결단을 내리도록 유도하는 설법을 통달하고 약소국 연나라 왕을 설득하여 이번에는 합종책을 제시, 신임을 얻고 결국 합종을 통한 6국의 재상이 된다. 그러나 당시의 천하통일은 외교만으로는 안되는 것. 결국 전쟁을 통해 다른 나라를 삼켜야만이 가능한 것이었으므로 합종책은 그 스스로 불완전한 책략이었다. 이에 소진은 조나라에 있던 시절, 아직까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던 장의를 불러들여 일부러 괄시를 하고 그의 승부욕을 부추긴 후 조나라에 앙심을 품고 진나라로 쫓아가도록 한다. 이때 소진은 자신의 수하에게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장의를 쫓아가게 하는데, 진나라로 간 장의는 연횡책을 제시함으로써 소진의 합종책으로 위기를 느낀 혜문왕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객경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고 이 과정에서 소진의 명에 따라 장의를 쫓아간 소진의 수하가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후 진나라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물질적으로 도와준 사람이 다름아닌 소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장의는 ‘소진이 있는 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서 6국을 침범하지 않겠노라 약속했다고 하는데 결국 소진의 합종책이나 장의의 연횡책은 서로 상응(相應)하지 않으면, 경쟁하지 않으면 안되는 터라 장의의 탄식은 하나마나한 것이었다는 것을 소진은 물론 장의 자신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진나라 재상에 올라 처음으로 초나라를 치고 위나라를 공격한 장의는 이후 진나라와 짜고 위나라로 건너가 위나라의 재상이 된다. 합종이냐 연횡이냐를 놓고 고심하던 위나라 애왕에게 장의가 말한다.


“위나라의 땅은 사방 천 리가 되지 않고 군대도 30만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사방이 모두 평지로 되어 있어 다른 나라의 공격을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위나라는 사방 국경의 초소와 요새를 지키는 데만도 10만명의 군사가 필요합니다. 또한 남으로 초나라와 화친하고 제나라와 거리를 두면 제나라가 동쪽을 공격할 것이고, 제나라와 화친하고 조나라와 거리를 두면 조나라가 북쪽을 공격할 것입니다. 한나라와 화친하지 않으면 한나라가 서쪽을 공격할 것이고, 초나라와 동맹을 맺지 않으면 초나라가 남쪽을 공격할 것입니다. 이른바 사분오열(四分五裂)의 형세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제후들이 합종을 맺는 것은 나라를 안정시키고 왕의 지위를 보장하며, 군대를 강하게 만들어 나라의 명예를 빛내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합종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천하를 하나로 묶어 형제의 맹약을 맺게 했습니다만, 친형제조차 재물을 다투는 법인데 사기와 배신을 일삼는 소진의 하찮은 계책에 의지하고 있으니 실패로 돌아갈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합니다. 왕께서 진나라를 섬기지 않으시면 진나라는 군대를 일으켜 공격할 것이고, 조나라가 구원하지 못한 채 합종의 약속은 깨지고 위나라는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왕을 위해 한 계책을 말씀드리자면 진나라를 섬기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렇게 되면 초나라와 한나라는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왕께서는 근심이 없이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누워 주무실 수 있습니다(高枕而臥). 합종론자들은 말주변은 좋지만 믿을 만한 말이 없습니다. 제후 한 명을 설득하면 벼슬을 얻기 때문에 천하의 유세객들이 모두 눈을 휘번득거리면서 합종을 내세워 군주를 설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벼운 깃털도 많이 실으면 배가 가라앉고, 가벼운 물건도 너무 싣게 되면 수레가 부서지며, 여러 사람이 떠들면 쇠도 녹이고, 비난을 계속 받으면 뼈도 삭는다고 합니다. 왕께서는 잘 생각하시어 나라를 보존하옵소서, 신은 이만 물러나 위나라를 떠나려 하니 허락해 주십시오.”


이렇게 위나라와 진나라의 연횡을 성사시킨 장의는 다시 진나라로 돌아와 재상이 되었으며 또 다시 제나라로 넘어가 연횡책을 유세한다.


여기에서 유래하는 고사성어가 하나 있다.
 
高枕而臥(高:높을 고 / 枕:베개 침 / 而:접속사 이 / 臥:누울 와), 혹은
高枕安眠(高:높을 고 / 枕:베개 침 / 安:편안할 안 / 眠:잠잘 면)
베개를 높이 하고 편안히 잠자다. 즉 아무 걱정없이 지낸다는 뜻의 고사성어이다. 이는 강대국 진나라와 약소국들간 이합집산의 대립상태에서 강대국과 손을 잡는 것이 상책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면서 인용한 문구인데, 결국 베개를 높이 하고 편하게 잠을 자는 사람은 강대국에 종속된 약소국 사람이 아니라 약소국을 지배하는 강대국 사람이라는 점에서 현실과는 정반대의 표현이긴 하지만 주객과 본말이 전도된 논리임에도 연횡의 목적을 이루는 이러한 힘이 바로 유세가들의 언변인 것이다.
 
이후 혜문왕이 죽고 무왕이 등극하자 태자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못하던 장의는 제나라는 자신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신이 위나라로 가면 제나라는 위나라를 칠 것이므로 그 사이에 진나라는 한나라를 공격하여 주나라 왕실을 거머쥐라는 계책을 내고는 위나라로 돌아가서 재상이 되었고 1년후 병사한다.
 
한편, 소진이 합종책을 유세하여 6국의 재상이 된 이후 진나라는 15년 동안이나 함곡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기간은 합종을 통해 서로 의심을 하느라 6국이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는 동안 진나라가 부국강병을 탄탄하게 진행할 수 있게 해준 준비기간이 되어주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진나라가 제나라와 위나라를 꾀어 조나라를 함께 침으로써 합종을 깰 계책을 마련하고 제나라와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였으며 조나라 왕으로부터 명을 받은 소진이 연나라로 가서 함께 제나라를 칠 것을 제의하였으나 거절당함으로써 합종책은 붕괴되고 만다. 한편, 진나라는 연나라와 연횡하기 위해 공주를 연나라 태자에게 시집을 보냈고, 그 무렵 연나라가 상중인 틈을 타서 제나라는 연나라를 공격하여 10개의 성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연나라 왕은 소진을 불러 비난하였고 소진은 제나라로 가서 왕을 만났다.


“굶어 죽어도 독초는 먹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먹으면 먹을수록 죽음을 재촉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연나라가 약소국이긴 하지만 진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왕께서는 연나라의 10개 성을 빼앗았지만, 장차 연나라가 진나라의 힘을 빌려 쳐들어오게 되면 그것은 곧 굶주렸다고 독초를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공하는 자는 화를 복으로 바꿀 줄 안다(轉禍爲福)’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빼앗은 열 개의 성을 지금 즉시 돌려주시는 것이 가장 상책입니다. 그렇게 되면 연나라는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며 진나라 왕도 기뻐할 것입니다. 옛날 환공(桓公)께서 노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아무런 대가 없이 되돌려줌으로써 천하의 패자가 되었듯이 왕께서도 반드시 패업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유래된 익숙한 고사성어 하나를 더 보자.
 
轉禍爲福(轉:바뀔 전 / 禍:재앙 화 / 爲:될 위 / 福:복 복)
재앙이 오히려 복이 되다, 화를 복으로 만들다, 현재의 어려움을 바꾸어 이로움으로 만들다 등의 의미이다. 이 또한 유세가의 독특한 표현법으로서 제나라가 성을 빼앗은 것은 애당초 화(禍)도 아니었을 뿐더러 성을 연나라에 반환하는 것 또한 별로 복(福)될 것도 없었던 것이었으나 강대국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제나라 군주의 심중을 이용하여 연나라의 재신임을 얻기 위한 소진의 간책에 불과한 것이었다.
 
제나라 왕은 즉시 빼앗은 성을 연나라에 반환하였다. 그리고 소진은 제나라에 머물고자 했으나 이곳저곳에 나라를 팔고 두 마음을 품은 자이므로 곧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며 소진을 비난하는 여론이 드세었다. 이에 소진은 연나라로 돌아왔지만 연나라왕은 그를 신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생지신(尾生之信)의 고사에서 보았듯 다시금 연나라의 신임을 얻고 다시 제나라로 돌아가 합종을 꾀하다 자객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소진은 한참 후에 아무런 변고 없이 병사한 라이벌 장의와는 달리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긴 하였지만 죽어가면서도 제나라 왕에게 자신이 죽은 후 ‘소진은 연나라의 첩자였다’는 소문을 퍼뜨리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자객이 자수를 하게 만들고, 결국 그 자객을 참수시킴으로써 복수를 하고 만다. 역시 마지막까지 ‘종횡가’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이다.
 
원칙과 일관성이 아닌 간책과 술수만이 처세(處世)가 되던 전국시대, 그리고 임금삭감없는 주5일 근무제가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화(禍)가 되고 고삐풀린 효율과 이윤의 추구만이 오히려 복(福)이 된다고, 그래야 모두가 ‘고침이와’할 수 있다고 지배자들이 열심히 떠들고 있는 지금의 시대. 전도된 본말을 다시금 뒤집을 수 있는 정세판단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
 
(2003년 9월)


- 고사성어 발췌 :

1. [史記], ‘列傳’, 司馬遷 著, 김진연 編譯, <서해문집>, 2002.

2. [史記 列傳], 司馬遷 著, 김원중 譯, <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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