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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스 Nov 01. 2022

자전거 여행 | 김훈

대나무 같은 단단한 삶 속에서의 사유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다. 대나무는 죽순이 나와서 50일 안에 다 자라 버린다. 더 이상은 자라지 않고 두꺼워지지도 않고 다만 단단해진다. 대나무는 그 인고의 세월을 기록하지 않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자전거 여행 2권 담양 편에서 대나무의 특징을 열거하는 내용 중 어느 대목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김훈의 글은 대나무를 닮았다. 올곧은 기개가 있고 정갈하다. 다 자라 버린 대나무 가지처럼 속이 가득 차 밀도가 높다. 그래서 가끔은 동일한 문단을 수차례 읽고 나서야 겨우 그 뜻에 근접해서 이해할 수 있다. 


자전거 여행은 솔직히 김훈의 여느 책과는 다르게 더 잘 읽히지 않는 책이다. 특히나 자전거로 직접 경험한 내용을 응축해서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경험이나 지식이 없다면 쉽게 읽어 내려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지역을 어떤 사물을 이토록 입체적으로 조합하고 해석하고 관찰하고 상상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김훈만의 강점이다. 


상상한다. 매일 밤 숙소에서 한낮의 경험을 날려버리지 않기 위해서 연필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고 때로는 지우개로 고쳐 써넣어 더 이상의 밀도를 만들 수 없을 때 연필을 내려놓을 작가 특유의 과정을 말이다. 그 밀도를 견디고 단단함을 깨부수면서 글을 완독 했다. 한 줄 한 줄 사력을 다해 쓴 글을 정성을 다해 읽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것은 나의 낮은 문해력 때문인지 오랜 시간 독서로 인한 뇌 용량의 한계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 책은 곁에 두고 여러 해 읽을 심산으로 종이책으로 샀다. 잘 읽히고 쑥쑥 진도가 나가는 페이지가 있고 그냥 읽어 내려가는데 의의를 두는 장면도 있다. 지금은 손바닥으로 쓸어 담은 물처럼 쑥 빠져나가는 문장들도 언젠가는 다른 감성으로 이해할 날이 오겠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읽는다. 


연필로 글을 쓰는 삶처럼 작가는 자전거 예찬론자다. 몸의 힘이 자전거 체인의 마디를 지나서 바퀴로 펴져 흙 속에 스미고 허벅지에 가득 찬 힘이 바퀴를 굴린다. 그 과정에서 계절의 풍경은 마음 속에 흘러와 스미는데 그때 풍경을 받아내는 것이 몸인지 마음인지 구별되지 않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똑같이 경험하지 않고서는 작가의 시선에서 느낀 감정을 100% 이해할 수는 없다. 


책을 읽다가 작가의 표현력에 한참을 멈춰서 생각한 문단이 있다. 대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민속 5일 장인 모란시장의 풍경을 보면서 써 내려간 문장들이었는데 ‘권력화 되지 않은 유통의 풍경’이라는 부제로 된 챕터다. 


‘유통은 생산보다도 민첩하고 소비를 향하여 소비를 이끈다.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격은 유통이 거두어가는 이윤의 밭이지만 그 간격에 숨어있는 위험을 유통은 생산과 소비 양쪽으로 재빨리 전가시킨다. 권력은 제1차 산업의 생산물에 대해서 더욱 지배적인데 농업과 어업에서 생산은 노동이고 유통은 권력이다’


깨끗하게 두고두고 읽으려고 책장도 접지 않은 책이건만 문장 한편에 연필로 이렇게 써넣었다. ‘시장 체제의 원리를 이렇게 명쾌하게 풀어쓰기도 힘들 것이다.’ 경제 전공자로서 이렇게 심플하게 생산과 소비와 유통을 정의하지 못한 채 졸업을 한 것이 내내 부끄러워지는 문장이기도 했다. 자전거 한대에 몸을 의지해 이곳저곳을 바라보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의 체계를 잡아서 밀도 높은 사유를 녹일 수 있는 작가의 천재성이 부러울 뿐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는 당장 자전거를 꺼내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사놓고 몇 번 타다 말고 처박아둔 내 자전거는 더 이상 쓰임을 찾지 못해 한 두해 전 당근마켓으로 팔아버렸다. 이런 스스로를 후회하면서 걸어서라도 가까운 곳은 한번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전에 단단한 대나무처럼 속을 꽉 채운 단단한 삶 속에서의 사유로 나를 더욱 두껍게 만들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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