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이 전제가 맞는다면, 나는 지금껏 아주 잘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20년 지기 친구가 한 명 있다. 그 어떤 감정의 변화도 놓치지 않고 공유하는 사이, 아니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넘어 ‘영혼을 주고받는 사이’라고 할까. 간지러운 이 표현도 하나 틀리지 않는다.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에 손에 꼽을 만한 사건 중심에는 늘 그 친구가 있었고, 그건 그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붙들고 울고 웃고 했던 시간이 쌓이는 동안 우리는 떼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고, 아직도 세상에서 오직 우리 둘만 아는 철옹성을 높이 쌓아 올리고 있다.
세상의 쓴맛 볼 때마다 항상 그 친구와 술을 마셨다. 대상이 바뀔 일은 절대 없다. 자주 가는 단골 술집은 부산 문현동 어느 골목길에 있는 작은 실비 집. 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주인 언니 손에서 뚝딱뚝딱 만들어지는 골뱅이무침, 계란말이, 소고기 전골, 한치 무침, 북어포. 장르를 넘나드는 기가 막힌 안주들의 향연, 그중에서도 우리는 참치김치찌개를 가장 좋아했다. 그거 하나면 둘이서 소주 서너 병은 거뜬히 해치울 수 있었다. 찌개 맛이 생각이 날 때마다 집에서 만들어 먹기를 시도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아마도 그건, 찌개 앞에 그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겠지.
새로운 남자 친구가 생기면 꼭 그 실비 집에서 인사를 나눴고, 둘 사이 겹치는 인연이라도 생길 때면 어김없이 그곳으로 데려갔다. 다른 곳에서 술자리를 시작했으면, 2차든 3차든 마지막은 언제나 그곳이었다. 애정 하는 술집이 있다는 것은 두둑한 현금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든든하고, 친정엄마만큼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게 아닐까. 우정의 역사를 켜켜이 쌓은 그곳에서 우리는 풋풋한 인생사를 논하고 빛나는 청춘을 어루만졌다.
찬란했던 그 청춘의 빛은 안타깝게도 그 친구가 결혼 후 인천으로 거처를 마련하면서 조금씩 흐릿해져만 갔다. 남편의 지인을 소개해 줄 때만 해도 우리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이렇게나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 그제야 남편의 출생지가 인천이라는 게 생각이 났다. 깨달음이 너무 늦었다. 날마다 만나던 우리가 일 년에 한 번 보면 다행인 날이 올 줄은 절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6년 동안 우리는 조금씩 변해갔다. 아들에게 참 정성을 쏟던 친구는 공부를 더 하겠다고 아동학과로 편입을 결심했고, 나는 경력 단절을 뚫고 5년 만에 일을 시작했다. 각자 열중할 곳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만날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멀어짐을 인지한 어느 날, 이렇게 두고 볼 수만은 없다며 남편과 자식들을 두고 그 먼 거리를 뛰어넘어 무리한(?) ‘만남’을 시도했다.
남들을 무리라는 표현을 했지만, 우리에겐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인천과 진주, 각자의 거주지를 벗어나 약속이라도 한 듯, 부산 문현동으로 향했다. 잠시나마 아이들을 맡겨둘 친정이 둘 다 부산에 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어떤 미션 수행자들보다 날렵하게 움직였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거침없던 대화와 술과 욕과 울분들을 다시 나눌 수 있겠단 설렘만으로도 시공간을 뛰어넘기엔 충분했다.
십여 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아니라 신고 벗기 편한 운동화를 신었다는 것이고 몸에 붙는 청바지나 H라인의 스커트가 아니라 펑퍼짐한 운동복에다 긴 패딩 하나씩을 걸친 모습이라는 거. 화장기 없는 얼굴에 질끈 묶은 파마기가 어렴풋이 남은 검은 머리, 누가 봐도 애 엄마가 확실했던 우리 둘은 사실, 멋지게 꾸밀 시간조차 아깝다고 생각했다. 겉모습은 달라졌을지언정 친구와의 만남은 그때의 마음과 하나 다를 바 없었다. 만남과 동시에 꼭 잡은 두 손이 대신 말했다.
셀 수 없이 함께한 많은 날이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술잔을 부딪치며 이 친구가 말했다.
“마음이 살쿵거린다”
‘살쿵’이 뭐냐고 물었더니, 마음이 부딪히는 소리란다. 그리고 이건, 들을 수 없고 꼭 느껴야 하는 소리라고 했다. 두 마음이 수없이 ‘살쿵’ 거리던 그날 밤을 나는 기억의 액자에 박아뒀다.